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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colcolor=#fff> 예루살렘 왕국 앙주 왕조 제 5대 국왕 시빌라 Sibylla | سيبيلا | ||||
이름 | 시빌 당주 (Sibylle d'Anjou) | |||
출생 | 1159년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 |||
사망 | 1190년 7월 25일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향년 31세) | |||
매장지 |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불명 | |||
가문 | 앙주 가문 | |||
배우자 | 굴리엘모 델 몬페라토[1] (1176년 결혼/1177년 사망) | |||
기 드 뤼지냥 (1180년 결혼) | ||||
자녀 | 보두앵 5세, 알리스, 마리 | |||
부모 | 아버지 아모리 1세 어머니 아녜스 드 쿠르트네 | |||
형제 | 보두앵 4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재위기간 | 1186년 8월 말 ~ 1190년 7월 25일 (3년 11개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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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루살렘 왕국의 제9대 여왕.아모리 1세와 아녜스 드 쿠르트네의 장녀로 보두앵 4세의 친누나였다. 그녀의 동생 보두앵 4세가 나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자 아버지 아모리 1세는 시빌라를 유럽의 좋은 집안과 결혼시켜 예루살렘 왕국의 후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프랑스에서 상스르의 에티엔(Étienne de Sancerre)라는 귀족이 이에 호응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왔으나, 오자마자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을 바꾸어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다.
Amalric's choice of a son-in-law was Count Stephen of Sancerre, a member of the house of Blios. He was extremely well connected his sister, Adela had married Louis VII of France, two of his brothers were married to the daughters of Louis VII by his first wife, Eleanor of Aquitaine, and stephen was also related in his own right to the English royal house. He responded favourably to Amalric's proposals and came to Jerusalem in 1171, accompanied by Hugh III, duke of Burgundy, who brought gifts from Louis VII.
아모리가 사위로 택한 것은 블루아 가문의 일원인 상스르 백작 에티엔이었다. 그는 누이동생인 아델라가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결혼했고, 그의 형제 중 두 명은 루이 7세의 첫 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 의해 루이 7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에티엔은 영국 왕실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아모리의 제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1171년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고, 그는 루이 7세로부터 선물을 가져왔다.
The Frist symptoms of Prince Baldwin's illness may have appeared by that time and it may have been necessary for Amalric to consider the possibility that Baldwin might not become king. In that case Sibyl and her husband would be the heirs to the throne.
보두앵 왕자의 병의 초기 증상은 그 무렵에 나타났을지도 모르며, 아모리는 보두앵이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라면 시빌라와 그녀의 남편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다.
Yet, for reasons which are not known, Stephen refused to marry Sibyl and returned to France. His change of heart is unlikely to have been caused by his discovering some scandal about her, since she was still a child and was living under the strict supervision of her great-aunt in the convent of Bethany. It is possible that negotiations broke down because the situation in the Latin kingdom had changed since Stephen had accepted the terms offered to him in the king's name by the archbishop of Tyre: before Stephen reached Jerusalem Amalric, realising that no military help would be forthcoming from the West, had made a state visit to Constantinople in 1171 and had recognised to Byzantine emperor, Manuel I comnenus, as his overlord in return for his protection. Western princes from the time of the Frist Crusade had found great difficulty in accepting Byzantine claims to their allegiance, and it may have been for the reason that Stephen declined to marry Sibyl, because as a possible future regent of king he would not accept Byzantine suzerainty.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에티엔은 시빌라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심경의 변화는 그녀가 아직 어린 아이였고 베타니 수녀원에서 그녀의 대고모의 엄격한 감독 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에 대한 어떤 스캔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 같지는 않다. 에티엔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아모리는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하기 전에, 티레 대주교가 그에게 왕의 이름으로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라틴 왕국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티엔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아모리는,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인식했고, 117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했고, 비잔틴 황제 마누일 1세 콤네노스에게 그를 보호해줄 대가로 그를 그의 상위 군주로 인정하였다. 1차 십자군 전쟁 당시의 서방 제후 들은 그들의 충성에 대한 비잔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에티엔이 시빌라와의 결혼을 거절한 것은 아마도 미래의 왕 혹은 섭정으로서 비잔틴의 통치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아모리가 사위로 택한 것은 블루아 가문의 일원인 상스르 백작 에티엔이었다. 그는 누이동생인 아델라가 프랑스의 루이 7세와 결혼했고, 그의 형제 중 두 명은 루이 7세의 첫 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 의해 루이 7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에티엔은 영국 왕실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는 아모리의 제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1171년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고, 그는 루이 7세로부터 선물을 가져왔다.
The Frist symptoms of Prince Baldwin's illness may have appeared by that time and it may have been necessary for Amalric to consider the possibility that Baldwin might not become king. In that case Sibyl and her husband would be the heirs to the throne.
보두앵 왕자의 병의 초기 증상은 그 무렵에 나타났을지도 모르며, 아모리는 보두앵이 왕이 되지 못할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라면 시빌라와 그녀의 남편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다.
Yet, for reasons which are not known, Stephen refused to marry Sibyl and returned to France. His change of heart is unlikely to have been caused by his discovering some scandal about her, since she was still a child and was living under the strict supervision of her great-aunt in the convent of Bethany. It is possible that negotiations broke down because the situation in the Latin kingdom had changed since Stephen had accepted the terms offered to him in the king's name by the archbishop of Tyre: before Stephen reached Jerusalem Amalric, realising that no military help would be forthcoming from the West, had made a state visit to Constantinople in 1171 and had recognised to Byzantine emperor, Manuel I comnenus, as his overlord in return for his protection. Western princes from the time of the Frist Crusade had found great difficulty in accepting Byzantine claims to their allegiance, and it may have been for the reason that Stephen declined to marry Sibyl, because as a possible future regent of king he would not accept Byzantine suzerainty.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에티엔은 시빌라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심경의 변화는 그녀가 아직 어린 아이였고 베타니 수녀원에서 그녀의 대고모의 엄격한 감독 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에 대한 어떤 스캔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야기된 것 같지는 않다. 에티엔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 아모리는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하기 전에, 티레 대주교가 그에게 왕의 이름으로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라틴 왕국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티엔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아모리는,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오지 않을 것을 인식했고, 1171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국빈 방문했고, 비잔틴 황제 마누일 1세 콤네노스에게 그를 보호해줄 대가로 그를 그의 상위 군주로 인정하였다. 1차 십자군 전쟁 당시의 서방 제후 들은 그들의 충성에 대한 비잔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고, 에티엔이 시빌라와의 결혼을 거절한 것은 아마도 미래의 왕 혹은 섭정으로서 비잔틴의 통치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Bernard Hamilton <The Leper king and his heirs>
1174년 아모리 1세가 죽자 보두앵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 어렸으므로 트리폴리의 레몽 3세가 섭정을 하였다. 1176년 보두앵 4세와 레몽은 시빌라를 아스칼론의 굴리엘모(기욤)라는 귀족과 약혼시켰는데, 굴리엘모는 프랑스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1세의 사촌이었다. 그 해 9월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시빌라는 야파와 아스칼론 백작부인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굴리엘모는 이듬해 6월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고 유복자로 아들 보두앵을 남겼다.
이에 남편을 잃은 시빌라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노리는 야심만만한 귀족들의 표적이 되었다. 친척인 플랑드르의 백작 필리프가 예루살렘으로 와서 자신의 가신과 시빌라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예루살렘의 귀족 가문인 이벨린 가문이 이끄는 귀족회의에서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시빌라는 재혼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에 1180년 트리폴리의 레몽과 보에몽 3세는 예루살렘에 들어와 자신들의 의도대로 신랑감을 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동생인 보두앵 4세는 외국에서 시빌라의 신랑감을 데려오는 것이 왕국에 군사적으로 도움이 되었기에 프랑스 필리프 2세 및 잉글랜드 헨리 2세와 연관이 있는 기 드 뤼지냥을 신랑감으로 정하고 결혼시켰다.
보두앵 4세는 처음에는 기를 신임하여 섭정으로 임명하고 많은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러나 기는 섭정을 수행하면서 르노 드 샤티용과 함께 이집트와 시리아를 오가는 대상(隊商)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것을 묵인하는 등 보두앵의 뜻에 많이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 이에 분노한 보두앵은 1183년 기를 섭정에서 짤라버리고 시빌라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 보두앵 5세를 공동 통치자로 세운 후 기와 시빌라의 결혼을 무효로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던 중 보두앵 4세가 1185년 봄에 죽었다. 시빌라의 아들 보두앵 5세는 단독으로 왕이 되었고 레몽이 섭정, 에데사의 조슬랭 3세가 보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두앵 5세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1186년 여름 아크레에서 죽었다. 시빌라는 예루살렘 왕국의 후계자로서 단독으로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시빌라에게 반대하는 귀족 가문들이 꽤 있었고, 또 다른 상속자이자 시빌라의 이복동생 이사벨[2]이 있었기 때문에 시빌라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새로운 남편을 구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왕위에 오르자마자 남편을 다시 기로 정해버리고 그를 공동왕으로 세웠다.
시빌라는 레몽과 이사벨 같은 반대파를 아우르고 자신의 지위를 보존했다. 당시 살라흐 앗 딘의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구하려고 애썼지만 기 드 뤼지냥과 레몽의 협력관계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의 군대에 패배하고 기는 살라흐 앗 딘의 포로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단숨에 예루살렘 왕국의 나머지 영토를 점령하고 마지막 남은 성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시빌라와 하틴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벨린의 발리앙은 예루살렘에서 방어전을 폈으나, 결국 10월 2일 예루살렘을 살라흐 앗 딘에게 넘겨주었다.
시빌라는 트리폴리로 쫓겨났으며, 살라흐 앗 딘은 1188년 기를 다마스쿠스에서 풀어주었다. 기와 시빌라는 다시 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예루살렘 왕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항구 도시인 티레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티레를 지배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Corrado del Monferrato)[3]의 반대로 성 밖에서 머물게 되고 말았다. 기는 새로 발흥한 제3차 십자군 원정에 호응하여 아크레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거의 2년을 끌었고, 1190년 공격군의 진지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시빌라와 그의 어린 두 딸 알리스, 마리는 죽고 말았다. 시빌라의 사후,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놓고 시빌라의 이복동생이자 처제뻘인 이사벨[4]과 기 드 뤼지냥이 대립했다. 결국 이사벨이 적법한 후계자가 되었다.
2. 매체에서
리들리 스콧의 영화〈킹덤 오브 헤븐〉에 배우 에바 그린이 맡았으며 메인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 속의 모습은 실제 역사와는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작중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과의 관계는 실제 역사에선 정적이었다.[5] 위에 언급한 시빌라의 이복동생 이사벨이 바로 발리앙의 양녀였다. 이사벨의 어머니인 마리아 콤니니가 아모리 1세의 사후 발리앙과 재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리앙은 양녀가 된 이사벨을 지원했고, 이 과정에서 시빌라와 대립하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