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1:42:09

기 드 뤼지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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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왕국 뤼지냥 왕조 초대 국왕

Guy
파일:Guy de Lusignan.jpg
이름 기 드 뤼지냥 (Guy de Lusignan)
출생 1150년 전후
프랑스 왕국 뤼지냥
사망 1194년 7월 18일
키프로스 왕국 니코시아 (향년 43~44세)
매장지 키프로스 왕국 니코시아 템플기사 교회
가문 뤼지냥 가문
배우자 시빌라 (1180년 결혼/1190년 사망)
자녀 알리스, 마리
부모 부친 위그 8세 드 뤼지냥
모친 부르곤디아 드 랑콩
형제 위그, 로베르, 조프루아, 피에르, 애므리, 기욤
종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
재위기간 1186년 8월 말 ~ 1192년 (시빌라와 공동 재위 이후 콘라드 1세와 대립왕)

1. 개요2. 생애
2.1. 프랑스에서의 행적2.2.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행적2.3.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1187)2.4. 포로 석방 후
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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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자군 전쟁 당시의 기사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제9대 공동 국왕.

프랑스어로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이며 영어로 Guy of Lusignan이라고 쓴다. 그 외에 예루살렘의 기(Guy of Jerusalem), 키프로스의 기(Guy of Cyprus)란 칭호도 존재한다.

2. 생애

2.1. 프랑스에서의 행적

  • 뤼지냥 가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링크 참고

프랑스 푸아투 출신으로, 뤼지냥 가문은 푸아투 지역의 영주이면서 동시에 아키텐 공작에게 종속된 위치에 있었다. 1168년, 기와 그 형제들이 당시 근처를 약탈하고 귀환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대귀족이자 최강의 세력을 가졌던 솔즈베리 백작 패트릭을 살해하고 그 일행을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포로로 잡혀간 인물 중에는 훗날 잉글랜드의 대귀족이 되는 윌리엄 마셜도 있었다. 게다가 패트릭은 다름아닌 아키텐의 엘레오노르[1]를 호위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형사고. 간단히 설명하면, 아키텐에 종속된 사람이 아키텐을 소유한 사람[2]의 친구이자 호위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의 물건을 털어갔다. 명백한 반역인 셈. 쉬운 말로 명색이 귀족이지 그냥 동네 깡패나 다를 바 없었다.[3]

당시 아키텐 공작을 대행하고 있던 사자심왕 리처드 1세는 이 보고를 듣고는 진노하였으며, 당장 기와 그 형제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프랑스에서 쫓겨난 기는 그의 형 아모리가 있던 예루살렘 왕국으로 건너갔다. 이를 계기로 기는 예루살렘 왕가의 가신 자격으로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2.2. 예루살렘 왕국에서의 행적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은 보두앵 4세였는데 나병 환자였던 까닭에 후계자를 놓고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가 망명한 시점에는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4]에데사 백작 보에몽이 연대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보두앵 4세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1180년 기를 누이 시빌라와 혼인시켜 야파와 아스칼론의 백작으로 서임하였다. 그리고 1182년에는 섭정으로 임명하여 왕국의 전권을 맡겼다.[5]

하지만 1183년, 당시 케락의 성주였던 르노 드 샤티용이 이슬람 상단을 공격하여 살라흐 앗 딘과 맺은 휴전조약을 파기했으며, 이에 살라딘이 케락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6] 이는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을 봐서는 매우 중대한 위기였으며, 보두앵 4세가 직접 아픈 몸을 이끌고, 케락까지 원정을 가서 포위를 풀어야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정작 섭정으로써 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기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7], 보두앵 4세는 분노와 동시에 기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보두앵은 시빌라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보두앵 5세를 공동왕으로 세우고, 기의 섭정직을 박탈하였다. 더 나아가 시빌라와 기의 혼인도 파기하려 하였으나 1185년 나병으로 숨을 거두면서 파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게다가 보두앵 5세가 이듬해 사망하면서 그 뒤를 이어 시빌라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발리앙의 양녀인 이사벨[8]과 시빌라의 다툼으로 왕위 계승 문제가 심각했다. 이사벨의 남편 옹프루아가 기 드 뤼지냥을 지지하자 발리앙-레몽 세력은 시빌라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대신 기와의 파혼을 조건으로 내걸며 타협을 시도했다. 시빌라는 이를 받아들여 순조롭게 여왕에 즉위하였으나, 여왕에 오르자마자 기를 다시 남편으로 사목하면서[9] 기 드 뤼지냥은 예루살렘의 왕이 될 수 있었다.

2.3.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1187)

하지만 왕위에 오른 기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살라흐 앗 딘과의 전쟁이었다. 1186년 말에서 1187년 초, 르노 드 샤티용은 또 다시 협정을 어기고, 이슬람 상인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10] 대노한 살라딘이 협정 위반이라며 기에게 항의했고, 기는 샤티옹에게 상인들과 물품을 반환하라 명령했지만, 샤티옹은 '내 땅에선 내가 주인이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맺은 것은 내가 아니다'며 거부했다. 이로 인해 르노와 살라딘은 서로 전쟁상태로 돌입했고, 1187년 봄 지하드를 선포한 살라딘은 르노의 영지를 향해 진군했다.

당시 살라흐 앗 딘과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는 아직 전쟁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살라딘은 기존에 맺어진 협정에 따라 자신의 부대가 그의 영토를 통과하게 허가할 것을 요청했다. 양자간의 전쟁을 막고 싶었던 레몽이 일단 살라딘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통행하게 해주는 동시에, 기독교 영주들에게는 살라딘의 군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렸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성요한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이 크레송에서 살라딘의 대군을 습격하다 오히려 학살당했다. 이제 전면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을 깨달은 레몽은 결국 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7월에 접어들자 살라딘은 레몽의 영토인 티베리아스를 포위하지만, 레몽은 여전히 신중하게 전투할 것을 건의했고, 크레송에서 기사단장을 잃은 요한 기사단도 동의했다. 하지만 샤티옹과 크레송에서 혼자 도망쳐(...) 살아온 성전 기사단장 리드포트는 레몽이 적과 내통한다며 비난하고, 즉시 살라딘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사실 기는 영화[11]와 달리 상당히 고민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전에 벌어진 케락 포위전에서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권력을 잃을 뻔 했기 때문인지, 이번엔 샤티용과 리드포드의 주장에 동의하여 살라흐 앗 딘에 맞섰다.

그러나 하틴 전투에서 무리하게 진군하다 전 병력을 대차게 말아먹고 포로로 잡혔으며 다마스쿠스로 압송되었다. 르노는 살라딘이 친히 참수했으나,[12] 기는 목숨만은 건지고 투옥되었고 이듬해 이슬람에 적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풀려났다. 한편 레몽은 잔여병력을 이끌고 결사적으로 전장을 탈출했으나,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 사이 이벨린의 발리앙, 몬페라토의 코라도 등 남은 기사들이 X 빠지게 고생해서 왕국 전체가 공중분해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예루살렘은 어쩔 수 없이 넘겨주었지만.

하틴 전투에서의 참패로 예루살렘 왕국의 영지는 사실상 티레 한 곳 밖에 남지 않게 되어 버린다. 하틴 전투의 소식을 들은 교황 우르바노 3세가 뒷골 잡고 쓰러진 뒤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2.4. 포로 석방 후

1188년, 석방된 기는 시빌라와 함께 티레로 향하였으나, 티레의 영주이던 코라도"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는거냐!"면서 길길이 날뛰며 입성을 거부하였다. 그 때문에 티레 성 밖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제3차 십자군 원정대가 오자 그들과 함께 합류하여 아크레 공성전에 참여하였다. 물론 살라딘에게 다시는 적대하지 않기를 맹세했지만, 이교도에 대한 맹세를 깨는 건 교황께서 친히 면죄부를 내려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로 이 아크레 공격이 그의 최대(?)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때마침 하틴 전투의 참극을 전해들은 유럽의 동지들이 속속 십자군 수하의 몇 안 남은 항구 도시들로 들어오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이 멋모르는 유럽 친구들이 부하에게 무시당하며 아크레 앞에서 얼쩡이는 기의 군대를 보고 "예루살렘의 왕이 적은 병력으로 대적과 맞서 싸우는데 부하란 놈은 성에서 벌벌 떨고 있다."고 생각해서 모두 거기로 가 합류하는 바람에 정작 티레를 지켜낸 코라도는 개털이 되고, 기는 명성을 드높일 수 있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 그런 것도 있지만, 당시 아크레를 점령했던 살라흐 앗 딘은 아크레의 요새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해버렸기 때문에 기 드 뤼지냥이 아크레를 접수하자 제3차 십자군에게는 그야말로 최적의 집결지가 굴러들어온 셈이 되었다. [13]

하지만 1190년 아크레 공성전 와중에 시빌라와 그의 두 딸 알리스, 마리가 모두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상속법상으로 기에게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져버렸다. 그동안 기의 무능에 치를 떨던 예루살렘 왕국의 제후들은 기는 더 이상 예루살렘의 왕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이사벨을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이사벨의 남편은 토론의 옹프루아였는데, 그는 샤티옹의 양자였으며, 예전부터 부인과 함께 왕위에 오르려 하기보다는 시빌라와 기를 지지하는 야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이것이 불만이었던 제후들은 이사벨과 옹프루아를 이혼시키고는 그녀를 몬페라토의 코라도와 결혼시켰다. 코라도는 마침 십자군의 일원으로 아크레에 도착한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하필 같이 도착한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와 결혼문제로 싸우면서 사이가 틀어지자, 이쪽에선 반대로 기를 지지하면서 대립 구도를 형성해주었기에 한동안 왕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다. 분쟁의 결과 코라도가 이사벨과 공동으로 예루살렘 국왕에 오르게 되었으나, 코라도는 즉위하자마자 어쌔신 암살자들에게 암살당하여 기는 다시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3차 십자군 원정이 마무리되고 리처드 1세가 본국으로 귀국하자, 기는 지지 기반을 잃었고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이사벨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처드 1세가 원정과정에서 점령한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지배하던 키프로스를 기에게 선물해주었기 때문에 기는 키프로스의 영주가 되었으며, 덕분에 1192년 키프로스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기록되었고 그 후 열심히 성전을 명분으로 한 해적질을 하면서 지내다가 1194년에 사망한다.

그가 죽을 당시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던 까닭에 형인 애므리 드 뤼지냥이 그 뒤를 이었다. 이후 키프로스의 왕좌는 1474년 자크 3세 때까지 애므리의 후손이 계승했다.[14]

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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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헝가리계 뉴질랜드 배우인 마르톤 초카시가 연기했다.[15] 매우 호전적이고 광신적이고 계급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이벨린의 발리앙의 안티 테제라 하겠다.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르노 드 샤티용과 공모하고 이슬람과의 전쟁에 미쳐 있는 인물로 나온다.[16]

    실제로도 기 드 뤼지냥은 현실 감각과 외교 능력이 부재한 나머지 왕국을 말아먹었으니 영화에서 이렇게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 뒤로 살라딘에게 받는 대접이 무척 박하다. 하긴 그놈의 샤티용과 한 패이고 간접적으로 자기 여동생까지 죽게 한 놈이니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비를 베푼 셈이다.[17] 이후 예루살렘 공성전 직전에 (휘하 장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속옷에 바보모자만 입히고는 당나귀에 거꾸로 태워서 이를 예루살렘 방어군이 볼 수 있게 전시되는 굴욕을 당한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예루살렘 공성전을 끝내는 협상에서 살라딘이 “기독교 백성, 병사 그리고 왕비도 모두 기독교 영역으로 갈 수 있게 해주겠네. 아, 댁들 왕도 데려가고 싶다면 데려가게나.”라고 기 드 뤼지냥을 무슨 반쯤 잊어버린 짐짝 취급하는 것이다. 하긴 작중에서나 현실에서나 예루살렘 왕국 귀족들이 기에게 이를 가는 것을 보면 딱히 예루살렘 측에서 되돌려받고 싶어하는 인물은 아니다. 아내 시빌라마저 당나귀에 매달려 온갖 모욕을 당하는 기를 차가운 눈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살라딘이 그를 포로로 잡은 뒤 비교하면서 말한 말대로 선왕이자 처남인 보두앵 4세와 극중 행적이 아주 비교된다.[18] 아무튼 왕이 된 후 보두앵 4세와 똑같은 대사를 두 번 말하는데, 그 느낌이 다소 다른 게 포인트다. 군을 소집하라(Assemble the army.)와 내가 예루살렘이다(I am Jerusalem.)라는 두 대사인데, 같은 키워드의 대사임에도 상황과 인물이 다르기에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특히 똑같이 적의 왕이지만[19] 살아 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살라딘의 존중을 받는 보두앵 4세와는 달리[20] 포로로 잡혔을 때 그가 받은 상기의 대우를 보아도 충분히 비교된다. 이런 상기의 차이를 본다면 보두앵 4세 사후 예루살렘의 운명이 이렇게 극도의 차이를 가진 일이 되어버린 일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인물이다.

[1] 헨리 2세의 부인이자 리처드 1세, 존 왕의 어머니.[2] 아키텐은 엘레오노르의 소유였고, 그녀와 결혼한 헨리 2세 및 둘 사이의 아들이 공작위를 세습받았다.[3] 지금이나 서양 귀족들이 고상한 척 거들먹거리고 있지 이 시절에는 그냥 개싸움 잘하는 놈이 왕의 눈에 들면 작위 받던 시절이다.[4] 티베리아스(Tiberias) 또한 그의 영지였기 때문에(정확히는 그의 아내인 갈릴리 공작부인 에시바의 영지였다) '티베리아스의 레몽'이라고도 한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티베리아스는 영어 발음인 '타이베리어스'로 불린다. 레몽 3세의 배역은 제러미 아이언스.[5] 여기서 르노 드 샤티용이 기를 지지하며 한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가이 기록됐는데, 바로 보두앵 4세가 유언으로 남긴 “기는 왕이 되면 않된다”를 어이없게도 왕이 사투리를 썼다, 고로 기 드 뤼지냥은 왕이 맞다!라는 말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근거로 왕이 됬다. 지못미.[6]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발리앙이 포로로 잡힌 그 전투이다.[7]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차피 살라딘이 원정군을 이끌고 오랜 포위전을 진행할 수는 없었을 것으므로, 기의 소극적 반응이 적절했다고 두둔하는 학자들도 있다.[8] 시빌라의 이복동생인데, 이자벨의 어머니가 발리앙과 재혼을 했다.[9] 시오노 나나미조차 십자군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시빌라는 기 드 뤼지냥의 얼굴에 반해 있었지만 기 드 뤼지냥에게 잘생긴 얼굴 빼고는 아무런 장점이라고는 없었다"고 깠다.[10]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이때 샤티옹이 살라딘의 누이동생을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당시에도 그런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무사히 돌아왔다고 한다.[11]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작중 하틴 전투 직전에 열린 회의에서 당장 이교도들을 치러 나서자는 기와 다른 기사들에게 발리앙이 지금 전쟁하면 안 된다고 반대하며 말린다. 이때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 즉 티베리아스는 내 기사단은 이번 전투에서 빠지겠다고 하며 막사를 나가 버린다. 기 드 뤼지냥은 "그럼 전공은 모두 내 차지로군"이라면서 비웃지만...[12] 르노는 이슬람 세력에게 붙잡혀 17년 동안 포로로 붙잡혀 있었던 일 때문에 무슬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다녔다. 관대함으로 유명한 살라딘이라도 안 죽이는게 이상할 정도이다.[13] 그 뒤로도 아크레는 맘루크에 의해 함락되는 1291년까지 100여년간 십자군 세력의 주요 거점으로 남아있었던 걸 생각하면 기의 아크레 원정은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된 샘.[14] 여담으로 1489년 자크 3세의 모친이자 키프로스의 마지막 군주인 카테리나 코르나로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으로 왕국을 해체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가 된 키프로스는 1571년에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다.[15] 반지의 제왕에서는 켈레보른 역으로 주인공 벨리앙 역을 맡은 올란도 브룸과 함께 출연한 바가 있다.[16] 딱히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으나 사실 결단력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뭔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르노 드 샤티용 등 강경파 세력에 휩쓸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에 가깝다. 르노 드 샤티용이 캐러밴을 습격할 때도 기는 상단이 무장하고 있다며 공격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지만, 르노가 어차피 싸우러 온 건데 그럼 더 잘되지 않았냐고 하며 공격을 개시하자 그대로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준다.[17] 하틴 전투 이후 기가 르노 드 샤티용과 함께 포로로 잡혀오자, 살라딘은 그에게 얼음물을 내준다. 이는 접대의 관습에 의거, 기를 자신의 손님으로 대접하겠다 =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의미. 그러나 기는 이 얼음물을 곧바로 르노에게 넘기는데, 이는 자신이 받은 손님으로서의 권리를 르노에게 양도하겠다 = 나는 죽여도 좋으니 르노는 살려달라는 간청이다. 르노가 이를 받아 마시자 살라딘은 "네놈에게 준 것이 아니다"라고 일갈하는데, 즉 네놈에겐 자비를 베풀어 줄 마음이 없다는 뜻. 르노는 이에 "나는 그저 물로 알고 마실 뿐", 즉 자기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차피 살라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는 처지임은 알고 있고 그냥 목이 마르니까 마셨을 뿐이라고 대꾸한다. 직후 살라딘은 짐승 도축에 쓰는 단검을 꺼내 르노의 목을 그어버리고(= 사람 대접도 과분하니 짐승과 같이 취급하겠다), 부하들을 시켜 그를 끌어내 장검으로 참수하여 처형한다. 그리고는 헛된 기대를 품었다가 눈앞에서 그 기대가 모조리 사라져 참담한 표정을 짓고있는 기에게 돌아서서, 왕은 같은 왕을 죽이지 않는 법이라며 당신들의 훌륭했던 선대 왕에게 배운 게 없냐고 어이없다는 듯 타박하고는 풀어준다.[18] 역사적으로 적어도 이 위키의 평가는 보두앵 4세를 성군으로, 기 드 뤼지냥을 암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마디로 극중 인물의 바탕이 된 실제 군주의 평가에서도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는 것이다.[19] 다만 보두앵 4세는 본인이 극중에서 언급하기도 한 살라딘의 안위를 위협한 몽기사르 전투의 지도자였으나, 기는 하틴 전투의 패배로 결과적으로는 살라딘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편이므로 같은 적의 왕이라고 해도 다소 격이 다르다.[20] 케락에서 군사를 데리고 한 회담 시 살라딘은 보두앵 4세에게 자기 의사를 보내주려 했고, 예루살렘을 얻은 뒤에도 그가 묻힌 십자가가 그려진 무덤자리를 밟지 않고 지나간다. 하틴 전투의 대패 후에도 포로로 잡힌 기는 살라딘에게 자신을 죽이라는 무언의 의사를 전하자,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며, 훌륭한 선왕에게 대체 무엇을 배웠냐고 일침을 놓는 살라딘의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