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1:32:37

엘레오노르 다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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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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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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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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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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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필리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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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 7월 왕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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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6D1><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루이 7세의 왕비
잉글랜드 왕국 헨리 2세의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
Éléonore d'Aquitaine
파일:Eleanor-Akvitanskaia.jpg
상상화[1]
이름 프랑스어 Éléonore d'Aquitaine
엘레오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영어 Eleanor of Aquitaine
엘리노어 오브 아퀴테인
(아키텐의 엘리노어)
출생 1122년[2]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사망 1204년 4월 1일 (향년 82세)[3]
프랑스 왕국 푸아티에
재위 아키텐 공국의 여공작
1137년 4월 9일 ~ 1204년 4월 1일
배우자 루이 7세 (1137년 결혼 / 1152년 무효화)
헨리 2세 (1152년 결혼 / 1189년 사망)
자녀 마리, 알릭스, 기욤 9세, 청년왕 헨리, 마틸다,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엘리노어, 조앤, 존 왕[4]
아버지 아키텐 공작 기욤 10세[5]
어머니 에노르 드 샤텔로
형제 페트로닐, 기욤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프랑스의 왕비: 루이 7세와의 결혼과 이혼2.3. 잉글랜드의 왕비: 헨리 2세와의 재혼
2.3.1. 결혼 생활2.3.2. 남편과의 전쟁
2.4. 왕국의 섭정
3. 가족
3.1. 자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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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FFD6D1><colcolor=#000> 영어 Eleanor of Aquitaine
엘리노어 오브 아퀴테인
(아키텐의 엘리노어)
프랑스어 Éléonore d'Aquitaine
엘레오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오크어 Alienòr d'Aquitània
알리에노르 다키타니오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중세 프랑스어 Aliénor d'Aquitaine
알리에노르 다키텐
(아키텐의 알리에노르)
라틴어 Alienora
알리에노라

아키텐 공작령의 공작이자 프랑스잉글랜드 양국의 왕비였던 인물.

중세의 대표적인 여걸이자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 중 한 사람.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결혼했으나 아들없이 딸 둘만 낳고 이혼했고, 이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재혼해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존 왕을 낳았다. 12세기 서유럽 역사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동생인 기욤이 사망하여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10세로부터 아키텐 공국과 푸아티에 백작령의 광대한 영지를 15세에 계승했다. 때문에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영토였던 아키텐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목되어 당시 중세 유럽 여성들과 달리 어릴 때부터 왕위 계승자에 준하는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다. 총명한 머리는 물론 아름다운 외모와 주변을 사로잡는 당찬 성격에 아키텐 여공작 지위까지 가진 엘레오노르는 당대 최고 엄친딸이었으며 특히 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있어 음유시인, 즉 트루바두르들을 후원하였다고 한다.[6] 한편 아키텐 지방의 영주들의 엘레오노르에 대한 충성서약에도 불구하고 훗날이 걱정된[7] 기욤 10세는 영지를 지켜줄 유력한 사윗감으로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를 점찍고는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단, 카페 왕조가 영지를 꿀꺽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상속권은 결혼한 루이 7세가 아닌 둘 사이의 아들로 한정하는 조건으로 했다. 이는 훗날 그녀가 루이 7세와 아들 없이 딸 둘만 낳고 이혼한 뒤 헨리 2세와 재혼하여 5남 3녀를 낳자 그 영지가 고스란히 영국 플랜태저넷 왕조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무래도 루이 7세한테 원인이 있었을지도..?

2.2. 프랑스의 왕비: 루이 7세와의 결혼과 이혼

1137년 4월 9일에 기욤 10세는 스페인 쪽으로 성지순례 중에 승하했고, 그해 7월 25일에 엘레오노르는 보르도의 성 앙드레 성당에서 프랑스의 왕자 루이 7세와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파리로 이동하던 중 루이 6세도 승하하면서 루이는 루이 7세로 즉위했고, 엘레오노르는 그렇게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왕비로서 직접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친정했으나, 프랑스 군은 다마스쿠스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부터 쌓여왔던 둘 간의 불화[8]가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엘레오노르는 숙부인 안티오키아의 레몽과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받기도 한다. 엘레오노르가 직접 십자군에 참여한 것도 루이 7세예루살렘의 순례에 더 중점을 둔 데 반해 엘레오노르는 숙부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이유로 인해 원정이 진행될 수록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에게서 아들을 얻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 7세가 이혼에 합의하여 결국 1152년 3월 11일 교황은 10촌의 근친이라는 이유로[9]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결혼을 무효화한다. 결혼 무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딸들은 적녀로 인정받았고 양육권은 루이 7세가 갖게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프랑스 왕비의 자리를 버리고 아키텐 영지의 여공작에 다시 올랐다.

2.3. 잉글랜드의 왕비: 헨리 2세와의 재혼

결혼 무효가 승인되자마자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자신의 친척이었던 9세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넷과 약혼했다. 엘레오노르와 루이 7세의 혼인이 10촌 지간이란 이유로 무효화되었는데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는 그보다 더 가까운 8촌 지간이었다. 사실 당시는 팔촌을 넘어 사촌간 혼인도 일상이던 시대로, 왕족이나 귀족들은 친척과 정략결혼을 할 때는 "기독교 군주들 사이의 결합은 대의명분이 있다."는 구실로 근친혼을 하고 나중에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의 가치가 다하거나 혼인을 종료하고 싶어지면 그제서야 "근친혼이므로 유효한 혼인 관계가 아니다."라는 명분으로 이혼(= 혼인무효)을 했다.

1152년 5월 18일, 둘은 푸아티에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154년 10월 25일에 헨리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되었고 엘레오노르는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비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거기에 결혼으로 아키텐과 푸아티에 등의 방대한 영지를 가진 셈이 되어서 후에 지속적으로 전개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대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10]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의 이런 수법은 200여 년 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어받아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여자들과 결혼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별로 치르지도 않고 영토 확장에 성공한다.

2.3.1. 결혼 생활

첫 결혼에서는 딸 둘만 얻었던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와의 결혼에서는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으면서 왕가의 핏줄을 번창시켰으나, 당시의 권력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그리고 헨리 2세가 상당히 호색가였던 만큼 여러 차례 바람을 피워대자 둘 사이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엘레오노르는 삼남 리처드위대한 사람이라 부르며 우상시했고 이를 보답이라도 하듯 아들은 그녀를 다음으로 신뢰했다. 동시대인인 디케토의 랄프는 "리처드가 모후의 이름에 명예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고 기록했다. 엘레오노르는 을 가리켜 사랑하는 아들이라고만 불렀지만 리처드만은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지칭했다.[11]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남편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채우지 못한 애정을 리처드에게 쏟는 것으로 대신했다고도 지적한다.
지금껏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모두들 궁금해 했던, "깨어진 동맹의 독수리가 세 번째 둥지에서 기쁨을 찾으리라."라는 멀린의 고대 예언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엘레오노르를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왕국 위에 말 그대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었기 때문에 독수리라고 불렀다. 엘레오노르는 일찍이 이혼을 통해 프랑스인 일가와 결연이 깨어졌고, 헨리 왕은 그녀를 옥에 가둠으로써 또다시 결혼의 연이 깨어졌다. 삼남 리처드는 엘레오노르의 세 번째 둥지이며, 또한 모친의 이름을 드높여 크나큰 영광을 돌리게 될 아들이다.
디케토의 랄프

2.3.2. 남편과의 전쟁

1173년 헨리 2세의 부정으로 불화를 겪던 중, 남편과 공동으로 왕위에 올라있던 차남 젊은 헨리 혹은 청년왕 헨리[12]가 남편 헨리 2세의 정적인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꼬드김을 받았고, 여기에 3남 리처드와 4남 제프리까지 동참시켜 아버지 헨리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어머니인 엘레오노르도 이 반란을 지원하였다. 반란의 원인은 장남 기욤이 3살이 안 된 나이에 사망하자 차남 헨리가 사실상 장남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공동 왕위까지 올랐으나 실권은 아버지가 모두 틀어쥐고 있는 허수아비 왕이었던 데에 따른 불만, -오히려 허울 뿐인 공동 왕위보다 각자 자기몫의 영지를 상속받아 통치를 하고 있던 동생들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리처드의 경우 막내 만 지나치게 편애해서 생긴 불만 이 존이 그 유명한 실지왕 존이다. 헨리 2세 콩가루 전설의 시작이었던 이 반란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능함을 아낌없이 보여주던 헨리 2세의 능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고, 이 반란이 실패하자 헨리 2세는 아들들은 용서해주었으나 엘레오노르는 유폐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아들들의 반란은 계속되었고 결국 헨리 2세가 아낌없이 편애를 퍼부었던 존마저 리처드와 함께 반란에 나서자 기력과 의지를 상실한 헨리 2세는 1189년 승하하였다. 이후 아버지의 왕위를 이은 리처드는 바로 어머니의 유폐를 풀었다.

2.4. 왕국의 섭정

이후 리처드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가 리처드 1세로 즉위한 이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고 이후 독일에서 포로로 생포되자 왕이 부재한 왕국을 윌리엄 마샬, 휴버트 월터와 함께 섭정으로서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전쟁터를 누빈 리처드는 인재를 보는 안목이 빼어나 자신이 부재한 사이 내정을 돌볼 사람들을 무척 잘 골랐고 상상 이상의 수완을 발휘한 어머니의 능력까지 더해져 장기간의 부재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1199년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그녀의 막내아들 존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도와 잉글랜드의 영토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다[13] 즉위 후 5년 뒤인 1204년에 사망했다.

3. 가족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루이 7세
(Louis VII of France)
1녀 샹파뉴 백작부인 마리
(Marie, Countess of Champagne)
1145년 1198년 3월 11일 샹파뉴 백작 앙리 1세
슬하 2남 2녀[14]
2녀 블루아 백작부인 알릭스
(Alix, Countess of Blois)
1150년 7월 혹은 8월 1197년 혹은 1198년 블루아 백작 티보 5세
슬하 4남 3녀
헨리 2세
(Henry II of England)
1남 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
(William IX, Count of Poitiers)
1153년 8월 17일 1156년
2남 청년왕 헨리
(Henry the Young King)
1155년 2월 28일 1183년 6월 11일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슬하 1남
3녀 작센 공작부인 마틸데
(Matilda, Duchess of Saxony)
1156년 6월 1189년 6월 또는 7월 하인리히 사자공
슬하 3남 1녀[15]
3남 리처드 1세
(Richard I)
1157년 9월 8일 1199년 4월 6일 나바라의 베렝겔라
4남 브로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
(Geoffrey II, Duke of Brittany)
1158년 9월 23일 1186년 8월 9일 브로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슬하 1남 1녀
4녀 카스티야의 왕비 레오노르
(Eleanor, Queen of Castile)
1161년 1214년 10월 31일 알폰소 8세
슬하 1남 4녀[16]
5녀 시칠리아의 왕비 조반나
(Joan, Queen of Sicily)
1165년 10월 1199년 9월 4일 구기에르무 2세
툴루즈 백작 레이몽 6세
슬하 2남 1녀
5남 존 왕
(John)
1166년 12월 24일 1216년 10월 19일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
앙굴렘 여백작 이자벨
슬하 2남 3녀[17]

4. 여담

  • 엘레오노르의 아들 리처드 1세와 함께 3차 십자군에 참여한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그녀의 전 남편 루이 7세의 아들이지만, 엘레오노르 본인의 아들은 아니다.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와의 혼인이 무효화된 뒤 샹파뉴의 아델(아델라)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애초에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면 이혼(혼인무효)도 없었을 것이고, 그 아들이 아키텐 영지를 상속했을 것이기 때문에 카페 왕조가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 왕과 그렇게 싸워댈 필요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 엘레오노르 본인에게는 딸과 아들이 각각 5명씩 있었는데, 그 중에 딸 둘은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나머지 8명은 모두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아들들 중 첫째 기욤은 3살 무렵에 죽었고, 실질적 장남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결국 반란 중에 병으로 사망한다. 리처드 1세는 정식 아들없이 사망,[18] 4남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자식 없이 할머니보다 일찍 사망[19], 그 많은 아들 중에 오직 존 왕만이 혈족을 남겨 플랜태저넷 왕조가 장수할 수 있도록 했지만, 지지리도 못나서 프랑스 내 영국 영지를 대부분 날려먹는 실지왕이 되어버렸다.
  • 로빈 후드를 다루는 작품 중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헨리 2세 시대로 설정하는 작품에서는 로빈 후드를 사면해주고 아들 리처드 1세와 연결해주는 조력자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리처드 1세 ~ 존 왕 시대로 늦춰 잡는 작품들에서는 잠시 등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20]
  • "십자군에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각종 중세 문학에서 살라흐 앗 딘과의 염문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선 이에 대한 증거는 없고 애초에 살라딘은 당시 10살 꼬맹이에 불과했다. 시대 반영이 엉망인 문학이 상당해서 당대 호사가들이 오네쇼타 장르에 눈뜬 거라고 볼 수도 없다.
  • 엄연한 실존인물이지만 전설 상의 존재인 멜뤼진이 그녀의 정체라는 설을 담은 기사문학도 있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1] 상상화. 후손의 외적 특징에 비추어 실제로는 어두운 계열의 머리색으로 추정된다.[2] 태어난 해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앨리슨 위어의 책에서는 죽을 때 82세라고 했으니 역산해서 1122년인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3] 80세를 넘긴 거니까 현대인 기준으로도 제법 장수했다.[4] 마리와 알릭스는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둔 딸들이며 나머지는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둔 자녀들이다.[5] 족보 상으로 카를 대제의 증손자인 신성 로마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루도비코 2세의 딸인 에르멩가르다의 10대손으로 카를 대제의 14대손이 된다[6] 이들은 주로 궁정 연애를 다룬 서정시를 많이 읊었는데 그 때 쓴 언어가 로망스어였고, 여기에서 연애 혹은 연애물을 의미하는 단어 로맨스가 유래했다고도 한다.[7] 당시엔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해 아내의 영지나 작위 등을 날로 먹으려는 남자 영주들이 산더미같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영주들의 대표격이 후일 시할아버지가 되는 풀크 5세였다...[8] 특히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9] 중세 유럽에선 12촌 이내의 결혼을 근친혼으로 간주했기 때문.[10] 다만 실지왕 의 치세인 13세기 초엽에 프랑스 내의 영지는 필리프 2세에게 강제로 회수당한다. 헨리 3세 시기인 1259년에 파리 조약으로 보르도 일대의 해안은 수복하여 가스코뉴라고 불리며 백년전쟁 시기까지 통치하긴 한다.[11] 여담으로 디즈니의《로빈 훗》에선 엘레오노르가 배경상의 인물로만 지나가듯이 언급되지만 (정확히는 이름도 직접 언급되지 않고 '왕의 모후' 정도로만 언급된다.) 존 왕의 언급에 의하면 형 리처드만 편애했고 이에 존 왕은 항상 뭐가 안 되면 손가락을 빨며(...) 엄마를 찾는데, 생각해보면 작중 존 왕의 유치하고 찌질한 모습만 빼면 의외로 고증으로 반영된 부분(...).[12]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헨리인데,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다면 헨리 3세가 되었겠지만 먼저 죽는 바람에 이러한 호칭으로 남았다. 하지만 기름 부음의 의식까지 거쳤기 때문에 정식 왕의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 참고로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의 경우 최고의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의식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최초의 여왕이 아닌 여군주로 간주된다.[13] 출처: 두산백과[14] 샹파뉴 백작 앙리 2세[15] 오토 4세[16] 베렝겔라, 포르투갈의 왕비 우라카, 프랑스의 왕비 블랑슈, 아라곤의 왕비 레오노르, 엔리케 1세[17] 헨리 3세[18] 정실 부인 소생이 아닌 내연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이 사생아가 리처드 1세의 사후 어떻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19] 리처드 1세 사후 왕위를 주장하며 작은아버지인 존 왕과 싸우다가 심지어 할머니인 엘레오노르를 공격하는 패륜까지 저질렀지만 결국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20] 케빈 코스트너의 의적 로빈후드에서는 리처드 1세로 노년의 숀 코너리가 등장하기 때문에 엘레오노르가 아예 등장하지 않고, 러셀 크로우의 로빈 후드(2010년 영화)에서는 원로 배우 아일린 앳킨스가 역을 맡아 죽은 리처드 1세의 유해를 맞이하는 장면이나 존 왕을 꾸짖는 장면에 잠시 등장한다. 디즈니의《로빈 훗》에선 직접적인 등장은 없어도 언급상으로만 아주 잠시 지나가듯이 나오긴 한다. 정확히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 존 왕 본인이 "엄마는 언제나 리처드 형님만 귀여워하셨지."라는 등의 언급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