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앙투안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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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프랑스 부르봉 왕조 왕위계승권자(도팽) 루이 앙투안 (루이 19세) Louis Antoine (Louis XI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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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5년 8월 6일 |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
사망 | 1844년 6월 3일 (향년 68세) | ||
오스트리아 제국 괴르츠 | |||
재위기간 | 프랑스 국왕 (논란) | ||
1830년 8월 2일 (약 20분)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 부르봉 가문 | |
이름 | 루이 앙투안 드 프랑스 (Louis Antoine de France) | ||
아버지 | 샤를 10세 |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 | ||
형제자매 | 소피, 샤를 페르디낭 | ||
배우자 |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799년 결혼)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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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국왕 호소인(claimant). 루이 19세로 불리우나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아버지 샤를 10세와 함께 망명 생활을 했고, 혁명이 끝나자 귀국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였다.2. 생애
2.1. 출생
1775년 8월 6일, 후일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과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루이 16세 밑 항렬의 첫 왕자로서 사촌 동생 루이 조제프가 태어나기 전까지 둘째 큰아버지와 아버지 다음으로 계승 서열 3위였다. 덕분에 아들이 없던 첫째 큰아버지 루이 16세의 입지가 잠시 좁아지는 원인이기도 했다. 이후에 남동생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이 태어나서 더더욱 그랬다. 그러다 루이 16세에게도 루이 조제프와 루이 17세가 태어났지만 그 직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앙굴렘 공작으로 불렸으며 아버지를 따라서 망명해 유럽 곳곳을 떠돌다가 부르봉 왕실의 부흥을 명분으로 외가를 떠난 사촌 여동생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아내와 금슬은 매우 좋았는데 루이 앙투안이 마리 테레즈의 아버지 루이 16세처럼 우유부단하고 무능하고 여러모로 닮아서였다고 거기다 둘 다 혁명세력에 악감정이 큰 초왕당파여서 더더욱 그랬다. 허나 1799년 결혼 후 1813년 아이를 유산하면서 자녀는 남기지 못했다.
2.2. 7월 혁명 이후
아버지 샤를 10세가 7월 혁명으로 퇴위하자 1830년 8월 2일, 20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형식적으로 재위한 후 퇴위했다. 그리고 그의 재위 자체를 오늘날까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이후 조카 앙리 샤를 페르디낭 마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1] 여생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망명생활로 보내다가 1844년 6월 3일 오스트리아 제국 괴르츠에서 사망해 코스타네비차 수도원[2]에 안장되었다.
3.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루이 앙투안 (Louis Antoine) | <colbgcolor=#fff3e4,#331c00> 샤를 10세 (Charles X) | <colbgcolor=#ffffe4,#323300> 도팽 루이 페르디낭 (Louis Ferdinand, dauphin de France) | |
루이 15세 (Louis XV) | |||
마리 레슈친스카[3] (Marie Leszczyńska) |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von Sachsen) | |||
아우구스트 3세 (Augustus II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4] (Maria Josepha von Österreich) | |||
사보이의 마리 테레즈 (Maria Theresia di Savoia) | |||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 (Vittorio Amedeo III) |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Carlo Emanuele III) | |||
헤센로텐부르크의 폴리세나 (Polyxena von Hesse-Rotenburg) | |||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 (Maria Antonia Fernanda) | |||
펠리페 5세 (Felipe V) | |||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Elisabetta di Parma) |
[1] 루이 앙투안 역시 보수적 성향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혁명적 분위기를 고려하여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그 시점에서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이미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던 앙리를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형식적으로 즉위하였다가 20분 만에 양위하였다. 그러나 앙리 5세가 된 샹보르 백작 앙리 역시 프랑스 의회에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일주일 만에 퇴위했다.[2] 현재 슬로베니아 노바고리차.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탈리아의 고리치아와 슬로베니아(당시에는 유고슬라비아)의 노바고리차로 분단되었다.[3]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딸.[4] 요제프 1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