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3F2><colcolor=#000000> 앙굴렘 공작부인 & 프랑스 왕국의 도핀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Marie Thérèse de Fran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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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리테레즈 샤를로트 드 프랑스 (Marie-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
출생 | 1778년 12월 19일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
사망 | 1851년 10월 19일 (향년 72세) |
오스트리아 제국 란첸키르셴 프로스도르프 궁전 | |
배우자 |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1799년 결혼 / 1844년 사망) |
아버지 | 루이 16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 |
형제 | 루이 조제프, 루이 17세, 소피 |
종교 | 가톨릭 |
1. 개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장녀.프랑스 왕국의 공주이자 마지막 마담 라 도핀이다. 또한 남편 루이 앙투안이 20분 동안 프랑스 국왕 '루이 19세'로 즉위하면서 그녀 역시 20분 동안 프랑스의 왕비였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그녀는 혼란스런 시대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비운의 왕녀였다. 이름은 각각 외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1],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언니인 나폴리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에서[2] 따왔다.
공식 칭호는 마담 루아얄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Madame Royale Marie Thérèse Charlotte) 피유 드 프랑스[3], 마담 루아얄[4], 마담 라 도핀[5], 앙굴렘 공작부인(Fille de France, Madame Royale, Madame la Dauphine, Duchesse de Angouleme).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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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 가족 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Marie Therese Charlotte) | <colbgcolor=#fff3e4,#331c00> 루이 16세 (Louis XVI) | <colbgcolor=#ffffe4,#323300> 프랑스의 도팽 루이 (Louis, Dauphin of France) | |
루이 15세 (Louis XV) | |||
마리아 레슈친스카 (Maria Leszczyńska) |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Saxony) | |||
아우구스트 3세 (Augustus III)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Austria)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of Austria) | |||
프란츠 1세 (Franz I) | |||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 |||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 (Elizabeth Charlotte d'Orleans)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 |||
카를 6세 (Karl VI) | |||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zabeth Christine of Braunschweig) |
4.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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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5.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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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6. 검은 백작 부인(Dunkelgrafen): 마리 테레즈 가짜설
사실 오스트리아로 보내진 것은 '가짜' 마리 테레즈라는 음모론이 있다.음모론의 대상으로, '진짜' 마리 테레즈라는 주장이 있는 검은 백작 부인은 1807년 2월 튀링겐 주(Thuringia) Hildburghausen에 정착해서 아이자우젠(Eishausen)에서 살다가 1837년 11월 28일 사망한 신원불명의 여성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비밀스럽게 살았으며, 백작 부인은 늘 얼굴을 베일로 덮고 있었다고 한다. 백작 부인이 죽은 뒤 그 '백작'은 1845년 4월 8일까지 살다가 죽었다.
그러면 이후로 활동한 마리 테레즈는 누구냐? 음모론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와 바꿔치기 한 것은 에르네스틴 랑브리케(Ernestine Lambriquet)이다. 본명은 마리 필리핀 드 랑브리케로 베르사유 궁전의 시녀였던 마리 필리핀 누아레가 역시 시종인 자크 랑브리케와의 사이에서 낳은 4명의 아이들 중 둘째인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마리 테레즈의 친구로 궁에 출입하며 자랐고 1778년 4월 30일, 어머니가 사망하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입양되었다. 이 때 왕비가 에르네스틴으로 개명시키고 친딸처럼 귀여워했다. 1778년 7월 31일 에르네스틴은 10살이던 마리 테레즈의 놀이 친구가 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두 소녀의 외모가 매우 닮았다고 한다.
에르네스틴의 출생 법률 문서에 어머니 마리 필리핀의 이름은 있지만 필리핀의 남편인 '자크'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출생이 불분명한 데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입양되었고 얼굴도 닮았고, 게다가 루이 16세가 에르네스틴에게 비싼 드레스나 피아노를 사주는 등 매우 잘 대해주거나 왕비도 유독 아껴줬기 때문에 사실 이 소녀는 '루이 16세의 서녀'가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겨나게 된다.
또 1792년 8월 9일,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에르네스틴의 안전을 지키도록 명령받은 드 스시 부인은 튈르리 궁전이 민중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에르네스틴을 데리고 도망쳤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에르네스틴이 자기 딸이고 언제나 사랑할 것이니 어떻게든 지키라며 절규에 가까운 신신당부까지 했다.
아무튼 이 가설에 따르면 마리 테레즈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강간을 당해 임신을 했고 그로 인하여 세상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1795년, 이복누이(?)인 에르네스틴을 대신 '마리 테레즈'로 세상에 내보내고 자신은 평생 은둔하며 살았다.
다만 이 음모론의 결정적인 문제는 에르네스틴은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고, 1810년 12월 7일, 쟝 샤를 제르맹 프렝팡이라는 남자와 결혼하여 1813년 12월 30일 파리 교외에서 사망했다는 서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이 퍼진 탓에 2013년 독일에서 무덤 파서 유전자 검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검사 결과 그녀는 마리 테레즈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마리 테레즈라고 생각했고 소유물 중에서는 부르봉 가의 상징인 백합 무늬가 들어간 고급품들이 많았다고 하니 참으로 미스터리.
2015년 12월 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음모설에 대해 다뤘다. 처음엔 검은 백작부인이 마리 테레즈로 알려졌던 것처럼 나와 음모론과 사실이 매우 뒤섞여 제작진이 자료 조사를 잘못한 지 착각이 들게 했지만, 방송에 따르면 2013년 독일에서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검은 백작부인은 마리 테레즈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마리 테레즈가 진짜 마리 테레즈가 맞다는 말이다. 덧붙여 외국인 배우들이 계속 "마리 테레즈"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막에는 샬럿이라고 나왔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가 풀네임이니 잘못된 건 없지만, 굳이 샬럿이라고 불러야 했다면 프랑스인이니 샤를로트라고 불렀어야 한다.
7. 여담
- 초상화를 보면 알겠지만 키가 매우 작다. 아버지 루이 16세의 키는 193cm로 프랑스의 역대 모든 군주들 중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크고, 왕족의 초상화를 그릴 때 실제보다 키나 외모를 더 미화해서 그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마리 테레즈는 진짜 단신인 것이다. 이는 키가 작았던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154cm)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한창 클 성장기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학대받으며 보낸 영양 부족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 성인이 된 이후 나타난 고압적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은 경계성 성격장애 증상으로 보인다. 해당 성격장애의 주된 발병 요인이 기본적인 인성이 형성되는 시기인 유년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양육자로부터 신체적 및 정신적 학대를 받는 것인데, 마리 테레즈는 어릴 때 부모가 모두 처형당해 사랑을 받지 못했고 이후 감옥 안에서 양육자 역할을 맡은 간수들에게 온갖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두 가지 경우 모두 해당된다.
- 1851년에 사망하며 장시에는 장수한 편이었으나 정작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아서 웰즐리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 달리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1] 외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게 된 이유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식들에게 결혼해서, 첫 딸을 낳으면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마리 테레즈의 외사촌이나 이종사촌들도 마찬가지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서 따온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요제프 2세(마리 앙투아네트의 큰오빠)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카롤리나(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의 장녀 마리아 테레사, 레오폴트 2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작은오빠)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 등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증오했던 마리아 아말리아만이 명령을 무시하고 딸들에게 동생들의 이름을 붙였다.[2] 카롤리나의 프랑스어형이 샤를로트였다.[3] 프랑스의 아이들. 왕자를 포함한 왕녀, 도팽(왕태자)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칭호.[4] 군주의 장녀에게 주어지는 칭호. 결혼하면 소멸되었다. 영국의 프린세스 로열이 이 칭호를 본떠 만들어졌는데 마담 루아얄과 다른 점은 프린세스 로열은 본 칭호를 받은 당사자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된다는 점이다. 프랑스/역사에서 이 칭호를 받은 왕녀는 마리 테레즈 외에도 앙리 4세의 장녀 엘리자베트, 루이 15세의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가 있으나 마리 테레즈의 높은 인지도 탓에 보통 마담 루아얄이라고 하면 마리 테레즈를 일컫는다.[5] 프랑스 왕태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