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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보 드 바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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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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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레앙 왕조
루이 필리프 1세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
프랑스 왕국 · 7월 왕정 }}}}}}}}}}}}
<colbgcolor=#4169E1><colcolor=#ffffff> 프랑스 왕국 샤를 6세의 왕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von Bayern
파일:Christine_de_Pisan_and_Queen_Isabeau_detail.jpg
이름 독일어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Elisabeth von Bayern)
프랑스어 이자보 드 바비에르
(Isabeau de Bavière)
출생 1370년 (추정)
뮌헨
사망 1435년 9월 24일 (향년 64~65세)
프랑스 왕국 파리
장례식 1435년 10월
생 드니 대성당
배우자 샤를 6세 (1385년 결혼 / 1422년 사망)
자녀 이자벨, 잔, 샤를, 마리, 미셸, 루이, , 카트린, 샤를 7세
아버지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
어머니 타데아 비스콘티
형제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7세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행복한 시절(1385 ~ 1392)2.3. 남편의 광기와 정치 개입(1392 ~ 1402)2.4. 내전에 휘말리다(1403 ~ 1420)2.5. 말년
3. 평가4. 가족관계
4.1. 자녀
5. 대중매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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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샤를 6세왕비이자 샤를 7세의 모후이다. 또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왕비 카트린 드 발루아의 어머니이기도 하기에 헨리 5세의 장모이자 헨리 6세의 외조모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년기

아버지는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슈테판 3세이고, 어머니는 밀라노 공국의 통치자인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인 타데아 비스콘티였다. 형제로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7세가 있었다. 출생지는 뮌헨일 것으로 추정되며, 뮌헨 성모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정확한 출생년도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그녀가 결혼했을 당시 약 16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1370년에 출생했을 것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라틴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남편에게 봉사하고 자식들을 양육하며, 궁정 예법을 숙지하는 등 귀부인으로서 갖춰야 할 지식을 함양했을 것이다.

1383년, 이자보의 삼촌인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 프리드리히가 프랑스 왕실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신부로 이자보를 고려할 것을 제안했다. 1385년 4월 캉브레에서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장남인 느베르 백작 용맹공 장과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가 결혼하고, 마르가레테의 형제인 바이에른-슈트라우빙 공작 빌헬름 2세가 용맹공 장의 여동생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을 때, 이자보와 샤를 6세의 결혼이 다시 제안되었다. 당시 샤를 6세를 대신해 프랑스 국정을 총괄했던 호담공 필리프는 이 결혼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동맹을 성사시킴으로써 왕실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자보의 아버지 슈테판 3세는 딸을 프랑스 국왕보다는 독일 통치가문과 결혼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샤를 6세가 스코틀랜드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게서도 결혼 계약을 제안받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딸이 채택될 수 있을 지 미지수였고, 프랑스 궁정의 지나치게 자유로운 관습을 껄끄러워했다. 특히 결혼하기 전에 궁녀들 앞에서 신부의 옷을 전부 벗겨서 몸을 조사하게 하는 관습을 혐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호담공 필리프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비텔스바흐 가문 구성원들도 적극적으로 권하자, 슈테판 3세는 마지못해 딸을 프랑스 왕실에 시집보내기로 했다. 슈테판은 딸이 나중에 결혼을 거절당하고 이에 따른 불명예를 입을 것을 우려해 딸이 세례 요한의 유물을 순례한다는 구실을 대고 프랑스의 아미앵으로 보냈다. 이때 그는 남동생인 바이에른-란츠후트 공작 프리드리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국왕이 내 딸을 버린다면, 그녀는 평생 수치심에 시달릴 것이오. 그러니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하시오. 그녀가 끝내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게 된다면, 나는 영원히 당신의 원수가 될 것이오!"

이자보는 프랑스로 가던 중 젠네가우에서 니더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홀란트, 제일트 백작 알브레히트 1세의 영접을 받았다. 그녀에게 진심으로 애착을 갖고 있던 알브레히트 1세의 아내 마르가레테는 그녀가 프랑스 왕의 눈에 가난하게 보일 수 있다며 최고급 의복을 갖추도록 했으며, 몇 가지 주의할 점을 알려줬다. 7월 14일, 아미앵에 도착한 이자보는 샤를 6세와 접견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그녀가 당황한 채 그에게 다가가서 절했을 때, 왕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의 눈을 부드럽게 바라봤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매우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으며, 그의 마음은 이 젊고 아름다운 소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다. 그는 단 한 가지 꿈을 꾸었다.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다."

1385년 7월 17일, 아미앵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혼 부부는 아미앵 주교 장 드 롤랑디의 축복을 받았다. 결혼식이 있은 지 몇주 후, 이를 기념하여 두 배우자 사이의 사랑의 불을 상징하는 손에 횃불을 든 에로스를 묘사한 메달을 제작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자보는 키가 작고 이마가 높았으며, 눈이 크고 얼굴은 넓었고, 날카롭고 큰 코를 가쳤다. 또한 콧구멍이 열려 있었고 입이 크고 감각적이고 표정이 풍부했으며, 턱은 둥글었고 꽉 찼으며, 머리카락은 매우 어두웠고 피부색도 어두웠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당나귀 우유로 목욕했고 맷돼지 뇌와 악어 사향샘 분비물, 새의 피로 만든 크림으로 화장했다고 한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리는 거대한 모자를 패션에 처음으로 도입했는데, 이 패션은 곧 네덜란드, 독일 및 영국에 뿌리를 내렸다. 또한 그녀가 왕비가 된 이래 프랑스 궁정에 눈썹과 이마털을 면도해 이마가 더 커 보이도록 하는 관습이 생겼다.

2.2. 행복한 시절(1385 ~ 1392)

샤를 6세는 이자보를 무척 사랑했다. 1386년 첫 새해를 맞이했을 때, 구리로 장식하고 'K(카를의 약자)'와 'E(엘리자베트의 약자)'가 적힌 빨간 벨벳 팔프리[1] 안장을 선물했으며, 이후에도 반지, 식기, 옷 등 각종 물건을 지속적으로 선물했다. 이자보는 프랑스에 도착한 뒤 초기엔 벵센 성에 거주했는데, 이곳은 곧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집이 되었다.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던 그녀는 프랑스어와 프랑스 역사를 공부하는 데 전념했다. 1386년 9월 26일 첫 아이 샤를을 낳았지만, 같은 해 12월에 사망했다. 샤를 6세는 아들의 사망으로 우울해진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1387년 1월 1일 파리의 생폴 호텔에서 무도회를 개최했고, 동생인 루이 1세 도를레앙과 삼촌인 호담공 필리프와 함께 "보석이 흩어져 있는 황금 탁자"를 이자보에게 선물했다.

1388년 초, 이자보가 두번째로 임신했다. 이에 샤를 6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부양하기 위해 와인 판매에 특별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임신한 왕비가 별 기사단에 속했던 파리의 생투앙 성에 머무는 동안, 샤를 6세는 지조르 인근에서 사냥을 즐기면서도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았다. 1388년 6월 14일 오전 10시에 딸 잔이 태어났지만, 그녀는 2세에 사망했다.

1389년 5월 1일, 샤를 6세와 이자보는 앙주 공작 루이 2세의 기사 작위식에 참석했다. 행사를 기념하는 축하 행사는 6일 동안 계속되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사인 미셸 펜투앵은 그의 연대기에 이 행사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확실히 알려졌듯이, 이러한 오락은 간음의 수치를 가져왔고, 이는 나중에 많은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미셸 펜투앵이 이자보와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간통했다고 기술했다고 본다. 실제로 루이 1세 도를레앙은 무척 잘생겼고 바람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용맹공 장의 아내인 바이에른의 마르그리트가 루이 1세 도를레앙의 유혹을 받은 걸 암시할 거라고 추정한다. 당시 이자보는 이 축제 기간 때 임신 4개월째였고, 임신 생활을 힘들게 견뎌내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기에, 실제로 간통했을 가능성은 의심된다.

1389년 8월 22일, 샤를 6세는 왕비가 프랑스 수도 파리에 입성하는 의식을 거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자벨은 이미 파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곳에서 4년간 겨울을 변함없이 보냈지만, 성대한 축제와 의식을 좋아했던 왕은 엄숙하고 연극적인 행렬을 조직할 것을 고집했다.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왕비는 루이 1세 도를레앙의 아내인 발렌티나 비스콘티와 함께 마차를 타고 들것에 실려 옮겨졌다. 장 주브넬 데 우르생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역사>에 따르면, 당시 파리는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광장에 와인 분수가 흘렀으며, 술잔을 맡은 소녀들이 컵을 채워 원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또한 음유시인들은 트리테 호텔 건물 인근에서 십자군과 무슬림의 전투를 선보였다. 기독교 군대의 수장에는 사자왕 리처드 1세가 있었는데, 그는 샤를 6세를 초대해 이교도들과 싸우도록 했다.

아기 예수를 팔에 안은 성모 마리아를 대표한 어린 소녀는 왕비에게 인사하고 축복했으며, 천사들을 대표하는 소년들은 아치에서 줄에 매달린 채 내려와서 이자보의 머리에 황금 왕관을 씌웠다. 대관식 행렬에 참가한 귀족 여성들은 금실로 수놓은 호화로운 의상을 입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가마를 탔다. 대관식 행렬은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으며, 거리에는 '살아있는 그림'[2]이 늘어섰다. 천 명 이상의 시민이 길을 따라 서 있었는데, 한쪽에 있는 사람들은 녹색 옷을 입었고, 반대 쪽에 있는 사람들은 빨간 색 옷을 입었다. 행렬은 생 드니 문에서 시작되어 천사 복장을 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캐노피 아치 아래를 지나 생 드니 거리를 거쳐 노트르담 대성당에 도착했다. 다음날, 그녀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미사를 들은 뒤 '천사'가 자신에게 선물한 왕관을 성모 마리아에게 기증했고, 왕실 예법관 드 라 리비에르와 장 르메르시에는 즉시 그녀의 머리에 훨씬 더 비싼 왕관을 씌웠다. 이후 화려한 축제가 5일간 지속되었으며, 나중에 이때 들인 비용을 메우기 위해 특별 세금이 파리에 부과되었다.

이자보는 호화로운 행사를 통해 파리에 입성한 지 몇 달 후인 1389년 11월에 딸 이자벨을 낳았다. 이후 남편과 함께 프랑스 남부를 시찰하고 모뷔송의 시토회 수도원과 멜룬을 순례했으며, 1391년 1월 24일 멜룬에서 넷째 아이인 잔 공주를 낳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자보의 결혼 생활은 자녀들이 자꾸 일찍 죽는 걸 빼면 지극히 행복했다. 그러나 얼마 후, 연이은 불행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2.3. 남편의 광기와 정치 개입(1392 ~ 1402)

1392년 8월 5일, 샤를 6세는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암살을 시도했던 피에르 드 크라옹을 숨겨준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하던 중 르망 숲 인근에서 발작을 일으켜 4명의 시종을 살해한 뒤 쓰러졌다. 그 후 샤를 6세는 서서히 회복된 것처럼 보였지만, 국정에 대한 '게으름'이 커지고 과민 반응이 심해졌다. 1393년 1월, 이자보는 시녀인 카트린 드 파스토브린의 세번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이때 왕의 측근들은 우울증에 걸린 왕을 위로하기 위해 짐승으로 분장하고 부인들의 무도회장에 뛰어드는 여흥을 준비했다. 샤를 6세는 이에 동참하기로 하고, 다섯 명의 젊은 귀족과 함께 튜닉 위에 송진을 바른 후 솜과 삼베 뭉치 등을 덮어 짐승 흉내를 내었다. 무도회장은 어두컴컴했기에 이들의 계획은 훌륭하게 실행되어 귀부인들을 공황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이때 루이 1세 도를레앙이 이들을 자세히 보려고 횃불을 들이댔고, 이 때문에 화재가 발생해 네 명이 타 죽고 샤를 6세는 베리 공작부인 잔이 망토로 덮어준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일명 '발 데 아르당(Bal des Ardents)'이라 일컬어지는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일각에서는 루이가 샤를 6세를 암살하려고 일부러 횃불을 들이댔을 거라고 추정한다.

발 데 아르당 사건 후, 샤를 6세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악화했다. 초기에는 광기가 규칙적으로 발생했으며, 샤를 6세는 정상적인 상태일 때는 명석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상적인 상태일 때는 점점 더 짧아졌고, 광기의 정도는 더욱 심각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급기야 샤를 6세는 아내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베네딕토 수도사 미셸 펜투앵에 따르면, 샤를 6세는 "나를 뻔뻔스럽게 쳐다보는 이 여자를 쫓아내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며, 이자보에게 괴성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으며, 자신에겐 자녀가 없고 결혼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이자보는 광기에 휘말린 남편에게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이자보는 남편과 같이 살지 못하겠다고 여기고 호텔 바르베트(Hôtel Barbette)에서 따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보는 남편을 여전히 사랑했던 것 같다. 남편이 광기에 걸린 1392년에 아들 샤를을 낳았고, 1393년에 마리를 낳았다. 이때 그녀는 딸 마리를 낳기도 전에 이 아이가 신에게 평생 봉사하도록 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실제로 마리는 푸아시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샤를 6세와의 사이에서 총 12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왕이 제정신이 아닌데 성관계를 정상적으로 했을 리 없다"고 의심한 사람들은 샤를 6세가 광기에 걸린 시기 이후로 태어난 아이들의 친자 관계를 의심했다. 이자보는 어떻게든 남편을 고쳐보려고 애썼다. 의사들이 치료할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자, 그녀는 점술사와 종교인에게 의존했으며, 수많은 종교 행렬을 조직해 하느님께 남편이 건강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도록 했다.

한편, 샤를 6세의 삼촌과 형제들은 왕이 샤를 6세가 정신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 샤를 6세의 측근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권력을 손에 쥐었다. 이후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 권한을 놓고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왕은 광기에 시달리는 가운데 둘 중 한 쪽의 압력을 받으면 그 의견에 따랐다가, 정신을 잠시 차리면 명령을 취소하고 또다른 쪽의 뜻을 따르는 식으로 일관했다. 프랑스에 시집온 이래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자보는 이 시기부터는 두 정파 사이를 오가면서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려 애쓰는 한편, 형제인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루트비히 7세의 도움을 받으려 노력했다.

장 주브넬 데 우르생에 따르면, 이자보는 남편과 따로 떨어져 살게 된 뒤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오데트 드 샹디베르라는 여인을 남편의 간병인으로 붙여줬다가 나중에는 정부가 되도록 해 남편의 관심을 그녀에게 쏠리게 만든 뒤, 자신은 뱅센 성으로 이전한 후 여러 애인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또한 왕비의 시녀들은 낭비적이고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비난받았다. 그들의 과도한 의상은 엔넨을 입은 여인이 문으로 들어갈 수 없고 입구에 웅크리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샤를 6세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오를레앙 공작의 아내인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궁정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기록은 이자보에 대한 근거없는 가쉽 모음에 불과하다면서, 발렌티나는 추문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떠났을 뿐이라고 본다.

1386년에 태어난 샤를 왕자는 출생 직후 도팽이 되었지만, 1399년 중병에 걸렸다. 파리에서는 도팽이 느리게 작용하는 독으로 인해 쇠약해지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이자보는 도팽 샤를을 치료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군중은 여러 차례 왕궁에 달려와서 이자보에게 도팽 샤를을 발코니에 데려와서 자신들에게 보여서 아직 살아있는지 확인해달라고 강요했다. 결국 1401년 1월 13일 샤를 왕자가 사망했고, 그의 남동생인 루이 드 기옌이 도팽이 되었다. 같은 해, 이자보의 아버지 슈테판 3세가 파리를 방문해 로렌 여공작 이자벨과 재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401년 12월, 호담공 필리프가 수도 주변에 소규모 군대를 집결시킨 뒤 루이 1세를 위협하자, 이자보는 베리 공작 장,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함께 필리프와 루이 1세를 중재해 내전이 벌어지는 걸 겨우 막았다.

1402년 1월 6일, 이자보는 호담공 필리프와 루이 1세를 궁정에 불러들어서 완전한 화해를 촉구했다. 며칠 후, 두 사람 모두 이자보 왕비가 주재한 삼부회의 결정에 복종하겠다고 성경에 맹세했고, "이제부터 선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친구가 될 것이며 왕 의 인격과 국사에 관해 왕에게 좋은 조언을 해줄 것"을 맹세했다. 이자보는 1월 15일에 두 사람의 화해를 기념하기 위해 호텔 넬레에서 연회를 거행했다. 그러나 1402년 4월, 루이 1세는 샤를 6세가 또다시 광기에 시달리는 틈을 타 랑그독의 통제권과 새로운 세금을 도입할 권리를 자신에게 양도하는 서류를 왕으로부터 받아냈다. 그해 6월, 샤를 6세가 겨우 회복되자, 필리프는 샤를 6세를 부추겨서 이전의 결정을 뒤엎고 랑그독에 대한 권력을 자신에게 넘기게 했으며, 루이 1세가 이미 도입한 세금을 폐지했다. 7월 1일, 이자보는 샤를 6세로부터 왕이 제정신이 아닐 때 국정을 대행할 권한을 인정받았다. 이후 그녀는 오빠 루트비히 7세를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하고 12,000프랑의 연금을 지급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1403년 2월 6일, 루이 1세는 샤를 6세를 부추겨서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샤를 1세 달브레를 프랑스 무관장으로 세웠다.

2.4. 내전에 휘말리다(1403 ~ 1420)

1403년 4월, 이자보와 루이 1세 도를레앙은 샤를 6세가 광기에 시달려서 국정을 다스릴 수 없을 때 국정을 공동으로 이끌기로 합의했으며, 이자보는 삼부회의 수장이 되었다. 1404년 4월 27일 호담공 필리프가 사망한 후, 그녀는 오를레앙파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과도한 사치 및 왕실 재정을 낭비한 혐의로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녀는 샤를 5세의 왕비였던 부르봉의 잔이 궁정을 이끌 때는 왕비의 개인 궁정 지출액이 3만 리브르였지만, 이자보가 왕비가 된 뒤에는 6만 리브르로 늘어났다고 한다. 당시 왕실 금고는 바닥나서 잔 공주는 1405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와 결혼했을 때 지참금 5만 프랑을 당장 가져오지 못해 분할 지불해야 했고, 이자보는 이에 대해 잔에게 편지를 보내 용서를 구했다.

이렇듯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와 정치적 동맹을 맺으면서도, 이자보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1405년 8월 15일, 용맹공 장은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사치와 부패,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인 데다 무익한 전쟁을 벌여 백성을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간 오를레앙 공작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60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루이 1세는 이에 크게 놀라 도팽 루이와 이자보를 데리고 급히 수도를 떠났다. 장은 곧바로 이들을 추격했고, 쥐비시 인근에서 왕세자를 가로챘고,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이후 이자보는 9월 말까지 멜룬에 머물렀고, 나중에 코르베유에손느로 이주했다가 1405년 10월 21일 파리로 귀환했다. 그녀가 파리에 없는 동안, 그녀와 루이 1세가 파리에서 왕실 금고를 가져갔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

장은 행정, 사법, 재정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이나 동맹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파리고등법원은 장의 개혁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루이는 자기 영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고, 장 역시 이에 대항하고자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베리 공작이며 프랑스 전임 국왕 샤를 5세의 형제인 장 드 베리의 협상을 벌였고, 1405년 10월 16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공작이 영원한 형제가 될 것을 맹세했다.

그 후 장은 칼레를 잉글랜드로부터 탈환해 플란데런 영지의 입지를 강화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위한 군자금을 준비했다. 그런데 1406년 하반기에 가스코뉴 원정을 단행했다가 부르 공방전에서 고전하고 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부족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장이 모으고 있던 자금을 자기 쪽으로 빼돌렸다. 이로 인해 칼레 원정은 취소되었고, 장은 이에 깊은 반감을 품었다. 1406년 12월, 프랑스 함대가 생쥘리앵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에게 참패하면서 부르를 포위한 프랑스군에게 해상을 통해 보급할 길이 막혀 버렸다. 결국 프랑스군은 1407년 1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부르 원정이 실패하면서 위신이 떨어지자, 루이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경책을 내놓았다. 1407년 4월 28일, 그는 왕실 의회에 종사하던 부르고뉴 인사 26명 중 2명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축출했다. 이에 분노한 장은 루이 1세의 무능과 독단을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할 조짐이 일자, 이자보 왕비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루이와 장 1세에게 화해할 것을 거듭 호소했다.

파일:Assassinat_louis_orleans.jpg
오를레앙 공작 암살.

1407년 11월 20일, 두 사람은 프랑스 궁정에서 엄숙한 화해 서약을 교환했다. 그러나 불과 사흘 후인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은 막 출산한 이자보 왕비를 방문하기 위해 왕궁으로 향하던 중 마레 지구에서 장의 부하였던 라울 당크통빌이 이끄는 복면을 쓴 암살자 15명의 습격으로 암살당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심복들과 파리의 프레보는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장과와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파리 프레보가 추밀원 회의에서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의 자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장은 베리 공작 장 드 베리와 앙주 공작 루이 2세에게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한 뒤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1407년 12월 13일, 오를레앙 공작의 미망인인 발렌티나 비스콘티가 검은 말이 끄는 검은색 천으로 장식된 마차를 탄 채 상복을 입은 대규모 수행단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샤를 6세 앞에 엎드리며 복수를 간청했다. 이에 파리 시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은 모두 동정심을 보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면서 가스코뉴 원정 실패 등 온갖 실책을 저지르던 오를레앙 공작을 경멸했던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과 파리 시민들은 장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민심으로 인해 장을 섣불리 공격할 엄두를 못낸 오를레앙파 지도부는 1408년 1월 아미앵에서 장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초기에는 보복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장은 뜻밖에도 정적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기세가 살아났다. 그는 수많은 귀족과 무장한 호위대를 이끈 채 아미앵에 입성한 뒤 왕족들 앞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악인이었으니 그를 죽인 건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파리 대학 총장이자 신학자 장 프티를 비롯한 파리대학 신학 교수들은 오를레앙 공작이 폭군이었으며, 폭군을 살해하는 건 정당하다며 장을 옹호했다. 이후 협상이 결렬된 뒤, 장은 기병 1,500명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2월 28일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비롯한 오를레앙 지지자들은 사전에 빠져나갔고,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는 왕궁에 틀어박혔다. 그 대신, 도팽 루이가 호텔 생폴의 그레이트홀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장은 파리 대학 총장과 교수들, 파리 시민 대표 400인, 몰래 들어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공개 변론을 했고, 모두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후 그는 샤를 6세를 찾아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장이 찬탈하려 들 것을 두려워한 이자보 왕비는 3월 11일에 도팽 루이를 데리고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그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를 탈출했다.

1408년 6월,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리에주 주교 요한 3세는 장의 주요 동맹자였기에, 장은 그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친 오를레앙 세력은 이 때를 틈타 파리로 쳐들어가서 곧바로 장악한 뒤 장에게 내려졌던 사면령을 취소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장은 오테여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궤멸시켰다.[3]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이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정당화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저항 의지를 상실한 오를레앙 세력은 11월 16일 투르로 후퇴했고, 장은 11월 28일 파리에 입성했다. 그 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1409년 3월 장은 정식으로 국왕의 사면을 받고 오를레앙 공작의 유족들과 공개적으로 화해했다.

이후 장은 추밀원과 재무부를 비롯한 주요 요직에 자리잡고 있던 오를레앙 파벌을 대거 숙청했다. 특히 샤를 6세의 총신이었던 장 드 몽테규를 체포해 약식 재판을 거쳐 참수했다. 또한 1409년 11월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국왕 대리인의 권한을 도팽 루이에게 양도하게 했다. 1409년 12월 31일, 도팽 루이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왕실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2살에 불과했기에, 장이 추밀원을 진두지휘했다. 이자보는 용맹공 장이 나중에는 찬탈을 꾀할 것을 우려했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들 도팽 루이와 용맹공 장의 딸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주선했다.

1410년, 살해된 오를레앙 공작의 아들인 샤를 1세 도를레앙은 장인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에게 자신 대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나르 7세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 클레르몽 백작 장 1세 드 부르봉 등을 끌어들여 부르고뉴에 맞섰다. 그가 부르고뉴파에 대항하는 정파의 리더를 자처했기에, 이들 파벌은 그의 가문 이름을 따서 '아르마냑파'라고 일컬어졌다. 하지만 부르고뉴군이 파리를 강력한 군세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파리로 진군하지 못했다.

이후 이자보는 벵센 성에 틀어박혀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전쟁을 관망하다가 1413년 7월에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이끄는 아르마냑파가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해 용맹공 장을 추종했던 카보시앵들을 모조리 학살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아르마냑파로 돌아섰다. 이후 그녀는 당시 10살이었던 막내아들 샤를과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아라곤의 욜란다의 딸인 앙주의 마리와 결혼시킨 뒤 샤를 왕자를 앙주로 데려가도록 했다. 이자보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공유한 당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자보는 이런 식으로 사랑하지 않은 아들을 제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파리의 상황이 갈수록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막내 아들을 보호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으리라 추정한다.

1414년 9월 4일,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파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두 세력은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맞섰지만,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참패했다. 아쟁쿠르 전투로 인해 아르마냑파가 큰 피해를 입자, 용맹공 장은 이 기회를 노려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샤를 6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도팽 루이는 잉글랜드군과 싸우려면 칼레로 진군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무시당했다. 이에 아르마냑파의 수장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된 뒤 부르고뉴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장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드는 파리 시민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1415년 12월 초, 도팽 루이는 어머니를 방문하던 중 심한 감기에 걸렸고, 이것이 합병증으로 악화되는 바람에 12월 18일에 급사했다.

이후 이자보는 젠네가우 궁정에 사절을 보내 당시 니더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작 빌헬름 2세의 외동딸 자클린과 결혼한 뒤 에노에서 지내던 장 왕자를 도팽으로 삼고자 하니 파리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장 왕자는 1417년 1월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보호를 받으며 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해 4월 4일 콩피에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아르마냑파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머리와 목에 난 종양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자보는 막내 아들 샤를이 살던 앙주 궁정으로 사절을 보내 샤를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아라곤의 욜란다는 이에 대해 다음의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연인과 함께 사는 여성에게는 아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소. 나는 그 아이가 그의 형제들처럼 당신의 보살핌 아래 죽도록 키우지 않았고, 당신이 그를 당신처럼 잉글랜드인으로 만들거나 그의 아버지처럼 그를 미치게 만들지 않았소. 그는 나와 함께 남을 것이며, 감히 그를 빼앗아 가려고 노력하지 마시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자보가 이후에도 욜란다와 서신을 주고받았음이 확인되는데, 이렇듯 통렬한 질책성 서신을 받은 뒤 그럴 수 있을 리 없다며 서신의 진위를 의심한다.

얼마 후, 이자보는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귀족 루이 드 부아부르동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 샤를 6세가 빙센 성 주변을 걷고 있던 중 이자보의 신하 중 한 명인 루이 드 부아부르동과 마주쳤다. 이때 루이 드 부아부르동은 말에서 내려 왕에게 절하는 대신 말을 타고 지나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에 격분한 샤를 6세가 명을 내리자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이 지휘하는 종자들이 부르동을 말에서 강제로 끌어내 바스티유로 데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고문당한 뒤 이자보와 친밀한 관계임을 자백한 후, 다음날 아침 목이 졸려 죽었다. 이후 그의 몸은 "왕의 정의를 위해 길을 가십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가죽 가방에 꿰매어 센 강에 던져졌다고 한다. 공식 평결에는 부르동이 "많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며,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권력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 이자보를 축출하기로 했다고 추정한다. 당시 파리에서 이자보가 애인을 끝없이 사귀고 있으며 남편을 독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아르마냑파는 용맹공 장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그녀를 불신했다. 베르나르 7세는 이런 점을 이용해 그녀를 가신과 간통한 부정한 여자로 몰아가서 추방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파리에서 축출된 이자보는 격분했고, 트루아에서 용맹공 장과 합세했다. 장은 그녀를 앞세워 트루아 정부를 세우고 아르마냑파에 대적했다.[4]

파일:Massacre of the Armagnacs by the Bourguignons, Paris, 1418.jpg
부르고뉴파의 파리 학살.

1418년 5월 29일 새벽, 부르고뉴군이 파리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들은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해 하루 동안 4,000명을 살해했다. 며칠 후, 군중이 살아남은 아르마냑파가 갇혀 있던 감옥을 공격해 수감자 1,600명을 추가로 살해했다. 아르마냑파 수장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는 특별 감옥에 갇힌 뒤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다가 6월 12일에 처형되었다. 당시 생폴 호텔에 있던 도팽 샤를은 타네기 3세 뒤 샤스텔을 비롯한 몇몇 아르마냑파 장교들에 의해 구출되어 베리 공국의 수도인 부르주로 피신했다.

그 후 파리에 입성한 장은 부르주로 피신한 도팽 샤를에게 사절을 보내 저항을 포기하고 수도로 돌아와서 샤를 6세와 이자보 부부의 보호를 받을 것을 제안했다. 이때 왕비는 아들에게 적극적으로 서신을 보내 부르고뉴 파와 화해하라고 설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보낸 편지는 현존하지 않지만, 도팽 샤를의 답신의 발췌된 내용은 전해진다. 그는 이 서신에서 어머니를 "매우 존경하는 여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녀의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결국 아르마냑파의 조언에 따라 파리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이에 장은 1418년 9월 16일 생모르데포세에서 이자보 드 바비에르와 만나 아르마냑파가 도팽 샤를의 두 형(루이 드 기옌, 장 드 투렌)을 살해했고 도팽 샤를을 납치했다고 성토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반포했다.

파일:Assassinat_de_Jean_sans_Peur.jpg
용맹공 장의 최후.

1419년 9월 10일, 샤를 왕세자와 아르마냑파는 정부의 통합과 군사적 협력을 논의하자며 몽뜨흐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용맹공 장은 이를 받아들였고, 몽뜨흐 다리에서 샤를 왕세자와 대면했지만, 아르마냑파 기사들에게 피살당했다. 이후 용맹공 장의 아들로 부르고뉴 신임 공작이 된 선량공 필리프는 샤를 왕자와 아르마냑파를 공개적으로 성토했고, 이자보 역시 이 사건에 크게 놀라 도팽 샤를을 비난하는 대열에 참여했다. 1422년 선량공 필리프의 아내이며 도팽 샤를의 누이였던 미셸이 갑자기 사망했다. 이자보를 비난하는 연대기 작가들은 미셸이 남편에게 도팽 샤를을 용서하고 휴전을 맺어달라고 호소하자, 이자보가 미셸의 궁녀 한 명에게 독을 먹여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1420년 5월, 선량공 필리프와 이자보는 샤를 6세를 부르고뉴의 도시인 트루아로 데려왔다. 왕은 그곳에서 문서에 서명했지만, 그 의미를 거의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른바 트루아 조약으로 명명된 이 조약에 따르면,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샤를 6세와 이자보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국왕이 되며, 헨리 5세와 카트린의 아들이 뒤이어 프랑스 국왕이 된다. 반면 도팽 샤를은 용맹공 장을 부당하게 살해하여 프랑스를 혼란에 빠뜨린 반역죄를 저질렀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당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자보가 아들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도팽 샤를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고 사생아라고 선언했다고 주장했지만, 트루아 조약에는 도팽 샤를이 사생아라고 규정되었다는 언급은 없었다. 아무튼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독립을 잃고 잉글랜드-프랑스 연합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다만 조약에 따르면, 샤를 6세와 이자보는 생애가 끝날 때까지 프랑스 왕과 왕비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었다.

2.5. 말년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사망하고 그해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한 후, 이자보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파리의 부르주아 조르주 슈파르는 자신의 일기에 왕비가 "잉글랜드인들에게 멸시받고 거부당했으며, 남편을 애도하면서 미망인으로서 궁전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그녀는 말년에 과체중 상태였으며,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또한 그녀에게 지급되는 자금은 하루에 몇 데니에만 할당되어 매우 궁핌했기에 소지품을 팔아서 겨우 연명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가 활약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의 반응에 대해, 일부 연대기는 "적대감을 표출했다"고 하고 다른 연대기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1429년 9월 잔 다르크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파리를 공략하기 위해 1차 파리 공방전을 벌였을 때, 그녀는 파리에 그대로 머물렀지만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431년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파리에 찾아온 헨리 6세는 외할머니인 이자보 왕비가 행렬이 지나가는 걸 창밖으로 바라보는 걸 목격하고 샤프롱[5]을 벗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자보는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435년 9월 24일 자정 직전에 생폴 호텔에서 사망했고, 생 드니 대성당에 조용히 안장되었다. 조르주 슈파르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고 샤를 6세의 아내인 프랑스의 이자보 왕비는 1003년 9월 18일 생폴 호텔에서 사망했으며, 누구든지 그녀를 볼 수 있도록 3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 그녀의 유해는 그런 귀족 부인에 걸맞게 장례 준비와 장식을 하여 10월 13일까지 보존했으며, 오후 3시에 생드니에 들것으로 옮겨졌다. 트럼펫 연주자, 100명의 성화봉송 주자들, 그리고 시녀들 중에서 오직 바이에른에서 온 여인과 검은 옷을 입은 16명의 남자의 어깨에 짊어진 40명 정도의 소녀들만이 상복을 입었다. 그녀는 자고 있는 것 같았고, 오른손에 왕의 홀을 들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80리브르를 수중에 두고 있었는데, 이것만으로는 장례식을 관례에 따라 준비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드니 대성당 측이 장례 비용을 대줬으며, 그녀의 신분에 맞는 왕관, 홀 및 기타 예복도 가져왔다. 장례식에는 프랑스 총리 루이 드 뤽상부르, 파리 주교 자크 샤틀리에 및 여러 귀족이 참석했다. 그녀가 죽은 지 5개월 후, 파리는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공세에 굴복했고, 트루아 조약으로 인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박탈당했던 샤를 7세가 파리에 입성했다.

3. 평가

이자보는 수 세기 동안 수많은 프랑스 역사가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들은 이자보가 남편인 샤를 6세를 저버리고 숱한 애인과 간통을 일삼았으며, 심한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고, 주술을 써서 샤를 6세가 회복되지 못하게 했으며,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에 한 몫 했고, 아들 샤를 7세를 저버리고 프랑스 왕국을 잉글랜드에 넘겨버렸다고 주장했다. 당대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방탕한 여자에 의해 멸망된 프랑스는 처녀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소위 멀린의 예언을 자주 언급했다. 여기서 방탕한 여자는 이자보 왕비를 의미하고, 처녀는 잔 다르크를 의미했다. 한편, 한 전승은 이자보가 루이 1세 도를레앙으로부터 사생아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이 바로 잔 다르크였다고 밝혔다. 이 전승은 후에 가설로 구체화되었고, 잔 다르크의 프랑스 왕실 출신설을 지지하는 역사가들은 "사생아주의자"로 일컬어졌다.

이렇듯 이자보는 프랑스 역사상 최악의 왕비라는 오명을 받았지만, 현대 학계는 그녀의 오명은 대부분 소문과 선전이 혼합되어 만들어졌을 뿐 실상과 거리가 멀다고 본다. 이자보의 연인이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라는 소문은 부르고뉴파의 시적 팜플렛인 <목회자(Pastoralet)>와 1437년 이후 프랑스 왕실 역사학자인 장 샤르티에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었다. 목회자의 익명의 저자는 이 시대의 군주들을 가상의 이름을 지닌 목자들로 묘사했으며, 이름의 상관관계와 함께 용어집을 마지막에 첨부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살해로 이어진 사건에 대한 실제 기록이라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그를 찬양하는 데 열중했다. 이 시에서는 용맹공 장이 샤를 6세의 명령에 따라 '폭군' 루이 도를레앙을 살해한 것이며, 샤를 6세는 아내와 동생 사이의 불륜을 알게 되자 복수를 다짐해 장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장 샤르티에는 1435년 여왕이 사망한 날을 노트에 기록하면서, 잉글랜드인들이 왕비의 아들이 사생아라고 선언함으로써 왕비가 상심해서 빨리 죽게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점을 근거로 삼아 이자보가 당시 프랑스에서 내전을 벌였던 당사자들을 연인으로 삼은 '창부'였다는 악명은 주로 그녀의 아들인 샤를 7세에 대한 명성을 실추되게 만들려는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선전일 뿐이라고 결론내렸다. 또한 간통 혐의, 서로 이간질하는 행위, 독약을 사용하여 라이벌을 제거하려는 시도 등은 적대 세력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왕비에 대해 제기한 표준적인 비난이라는 점도 지적된다. 이런 비난은 성자로 추앙받은 루이 9세의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블랑카와 루이 9세의 아내인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 조차 적용되었다. 그리고 트루아 조약 체결에 관여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는 데 일조한 어머니에게 악감정을 품은 샤를 7세는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자보는 오랜 세월 프랑스 최악의 악녀로 각인되었다.

현대의 여러 학자는 이자보를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노력했지만 수많은 악재가 연이어 터진 데다 능력이 따라주지 않아 끝내 실패한 비극적인 여인으로 재평가한다. 그들은 그녀가 어렸을 때 자식을 많이 낳아서 잘 키우고 왕을 반려자로서 보필하는 훈련만 받았을 것이며, 실제로도 프랑스에 시집온 이래 1392년 이전까지 정치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남편의 뜻에 순종하기만 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다가 1392년부터 남편이 정신병에 걸리면서 국왕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가 심각한 정쟁을 벌이면서 왕실이 위험에 빠지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정치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들은 그녀가 두 정파 모두를 기쁘게 해줌으로써 왕실을 지키려 했지만, 오히려 두 정파 모두 그녀를 믿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고, 이로 인해 숱한 누명을 떠안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1392년 샤를 6세의 광기 이후 이자보가 정치에 의도적으로 뛰어들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그녀가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사이에서 상당히 교활하고 지능적으로 움직여서 이득을 최대한 챙기려 했지만, 상황이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아 결국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본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잉글랜드의 왕비 이사벨라
(Isabella, Queen of England)
1389년 11월 9일 1409년 9월 13일 리처드 2세
오를레앙 공작 샤를
2녀 브르타뉴 공작부인 잔
(Joan, Duchess of Brittany)
1391년 1월 24일 1433년 9월 27일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슬하 4남 3녀
3녀 푸아시 수녀원 부원장 마리
(Marie, Prioress of Poissy)
1393년 8월 24일 1438년 8월 19일
4녀 부르고뉴 공작부인 미셸
(Michelle, Duchess of Burgundy)
1395년 1월 11일 1422년 7월 8일 선량공 필리프
슬하 1녀
1남 프랑스의 도팽 루이
(Louis, Dauphin of France)
1397년 1월 22일 1415년 12월 18일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2남 프랑스의 도팽 장
(John, Dauphin of France)
1398년 8월 31일 1417년 4월 5일 에노의 자클린
5녀 잉글랜드의 왕비 캐서린
(Catherine, Queen of England)
1401년 10월 27일 1437년 1월 3일 헨리 5세
슬하 1남[6]
오웬 튜더
슬하 3남 1녀
3남 샤를 7세
(Charles VII)
1403년 2월 22일 1461년 7월 22일 앙주의 마리
슬하 5남 2녀[7]

5. 대중매체

  • 프리드리히 실러의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희곡에서는 잔 다르크와 샤를 7세를 적대시하는 역할로 나온다.
  •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에서는 타루토를 제거하려 든다. 큐베의 모든 능력을 가진 마법소녀로 최종보스로 나온다.[8]최후에는 직접 타루토와 맞서 싸우는데,타루토가 각성하며 결국 죽게된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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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6b6><colcolor=#FFFFFF> 소속 <colbgcolor=#fff,#1f2023>발루아 왕조 · 프랑스군
가족 다르크 가문
관련 인물 미카엘 · 성녀 마르가리타 · 성녀 카타리나
프랑스 원정군 동료 (질 드 레 · 라 이르 · 리슈몽)
적대적 인물 (헨리 6세 · 선량공 필리프 · 이자보 드 바비에르 · 피에르 코숑)
주군 (샤를 7세)
관련 장소 잔의 생가 동레미라퓌셀
오를레앙 공방전이 벌어진 곳 오를레앙 · 파테 전투가 벌어진 곳 파테
루아르 원정이 벌어진 곳 루아르 · 랭스 행진을 통해 주군 샤를이 즉위한 곳 랭스
파리 공방전이 벌어진 곳 파리 · 잔이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투가 벌어진 곳 생피에르르무티에
잔이 생포된 곳 콩피에뉴 · 잔이 화형당한 곳 루앙 · 잔의 묘소 윈체스터
관련 사건 백년전쟁
관련 물건 잔 다르크의 깃발 · 생트 카트린의 검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유명 어록 및 편지 · 특징 · 생애 · 창작물
평가 및 여담 평가 · 의문점
창작물 잔 다르크 별도 문서 (그랑블루 판타지 · 드리프터즈 · 데스티니 차일드 · 벽람항로 · 신격의 바하무트 GENESIS · 이나즈마 일레븐 GO · 인피니티 · 전함소녀 · 크루세이더 퀘스트 · Fate 시리즈 · 컴파스)
그 외 동음이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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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lfrey, 중세에 귀족, 귀부인, 고위 기사들에게 승마용으로 사용된 가벼운 무게를 가진 말.[2] tableau vivant, 배우나 모델이 무대 의상을 입고 소품과 풍경이 갖춰진 자리에 고정된 채 포즈를 취한 채 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는 시각 예술.[3] 이때 그는 반란군을 향해 앞장서서 돌격해 용맹을 떨쳤고, 이 때문에 지지자들로부터 '용맹공(sans Peur)'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4] 일설에 따르면, 이자보는 이때 용맹공 장과 성관계를 갖고 그의 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그녀를 비방하기 위해 지어진 근거없는 이야기로 치부한다.[5] Chaperon, 중세의 머리 장식[6] 헨리 6세[7] 루이 11세[8] 큐베의 말로는 마법소녀이면서,마녀이면서,동시에 그 자신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