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AD3F9><colcolor=#000000> 하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2세 폰 바이에른 Wilhelm II. von Bayern | ||
이름 | 빌헬름 2세 폰 바이에른 Wilhelm II. von Bayern | |
출생 | 1365년 4월 5일 | |
에노 백국 헤이그 | ||
사망 | 1417년 5월 31일 (향년 52세) | |
에노 백국 부상 | ||
배우자 |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1] (1385년 결혼) | |
자녀 | 자클린, 에두아르트(사생아), 베아트릭스(사생아), 요한(사생아) | |
아버지 | 알브레히트 1세 | |
어머니 | 마르가레테 폰 브리크 | |
형제 | 카타리나, 요하나, 알브레히트 2세, 요한 3세, 요하나 조피 | |
직위 |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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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2. 생애
1365년 5월 5일 에노 백국 헤이그에서 니더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인 알브레히트 1세와 슐레지엔의 브리크 공작 루트비히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 폰 브리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카타리나[2], 마르가레테[3], 알브레히트 2세[4], 요한나 소피[5], 요한 3세가 있었다.1373년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딸 마리와 약혼했지만, 마리가 1377년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1385년 4월 12일 캉브레에서 여동생 마르가레테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장남 용맹공 장과 결혼했을 때, 그는 호담공 필리프의 딸인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이후 아버지에 의해 에노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던 1392년 9월 22일, 아버지의 정부 알레이드 반 포엘게스트가 헤이그에서 갈고리파(Hoeken)의 일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알브레히트는 갈고리파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공세를 개시해 성을 하나씩 공략하고 갈고리파 인사들을 박해했다. 이때 빌헬름 2세는 갈고리파와 친분이 있었기에, 갈고리파와 연계해 아버지에게 대항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잉글랜드 왕국으로 망명했다가 1394년 초 아버지와 화해한 뒤 에노 총독 직위를 되찾았다.
알브레히트 1세와 빌헬름 2세는 상당한 재정 비용을 들여 두 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직접 복종하기를 원하는 프리지아인에 맞서 일련의 원정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404년 12월 13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그는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1406년 외동딸 자클린과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아들인 장 드 투렌과 결혼을 성사시켰다. 한편,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사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큰 빚을 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재산, 토지, 영주권 중 일부를 기사단의 여러 구성원에게 팔거나 담보로 삼아야 했다. 그러다가 1406년 그의 재무관이자 청지기인 암스테르담 상인 빌럼 에거트 반 겐트가 짧은 시간에 빚을 탕감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백작이 팔고 담보로 잡은 모든 토지와 물건을 다시 사거나 회수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그는 심지어 고용주를 위해 큰 수익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덕분에 빌헬름은 신성 로마 제국의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영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406년, 아르켈 영주 장 5세 다르켈은 빌헬름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상황이 갈수록 여의치 않자 헬러 공작 레이날트 4세에게 영지를 넘기고 개입을 요청했다. 레이날트 4세는 이를 수락하고 아르켈을 헬러 공국의 영지로 선포했다. 이에 빌헬름 2세는 레이날트 4세에게 전쟁을 선포해 아르켈 등지에서 아르켈-헬러 연합군과 2년간 전쟁을 벌였다. 1411년, 빌헬름 2세는 많은 돈을 헬러 공국에 넘기는 대가로 아르켈 영지를 돌려받았다. 장 5센 다르켈은 레이날트로부터 아우엔 영지를 수여받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소규모 군대를 일으켜 빌헬름 2세의 영지를 공격했지만 즉각 역공을 받고 부랭에서 체포된 뒤 고우다 감옥에 갇혀 그곳에서 옥사했다.
1408년, 빌헬름 2세는 동생이자 리에주 주교 요한 3세가 리에주 반란군에 의해 축출되자 처남인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과 함께 리에주 반란군을 공격해 오테어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격파하고 요한 3세가 리에주 주교로 복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발발한 내전에 개입해 용맹공 장과 손잡고 아르마냑파와 대적했다. 1409년 2월 28일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로부터 400명의 맨앳암즈와 100명의 궁수를 이끌고 샤르트르에 소집된 대표단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를 치르기 위해 몰려든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에 의해 에노 일대가 크게 약탈당했다.
1417년 5월 31일, 빌헬름 2세는 개에게 물린 여파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발랑시엔의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 후 외동딸 자클린이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으나, 리에주 주교를 맡고 있던 삼촌 요한 3세가 그녀의 영지를 집어삼키려는 야망을 품고 도전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3. 가족
-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1374 ~ 1441):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딸.
- 에노의 자클린(1401 ~ 1436):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아들 장 드 투렌과 결혼했고, 장이 도팽이 되면서 장차 프랑스 왕비가 되는 듯 했지만, 장이 조기에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아버지 사후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삼촌인 요한 3세,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전쟁을 치른 끝에 끝내 패배했다.
- 사생아
- 에두아르트 반 후그우드(1400 ~ 1458): 후그우드의 영주, 홀란트 집행관.
- 바이에른의 베아트릭스(1390/1400 ~ 1455): 블리엣의 여성 영주.
- 에노의 요한: 와르니르그랑의 여인 마리와 결혼. 1423년 또는 1424년에 사망. 와르니르그랑 교회에 안장되었다.
[1]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의 딸.[2] 1361 ~ 1401, 율리히 공작이자 헬러 공작 빌헬름 7세 폰 율리히의 부인.[3] 1363 ~ 1423,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부인.[4] 1369 ~ 1397, 바이에른슈트라우빙 공동 공작[5] 1373 ~ 1410,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