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빌헬름 7세 폰 율리히 Wilhelm VII von Jülich |
출생 | 1364년 3월 5일 |
율리히 공국 | |
사망 | 1402년 2월 16일(향년 37세) |
헬러 공국 아른험 | |
아버지 | 빌헬름 6세 폰 율리히 |
어머니 | 마리아 판 헬러 |
형제 | 레이날트 4세, 요한나 |
아내 | 바이에른의 카타리나 |
직위 | 헬러와 율리히 공작, 가터 기사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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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러와 율리히 공작. 저지대 국가에 대한 입지 강화에 힘쓰다가 프랑스 왕국의 침공에 굴복했다.2. 생애
1364년 3월 5일 율리히 공작 빌헬름 6세 폰 율리히와 마리아 판 헬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레이날트 4세, 요한나[1]가 있었다. 1371년 헬러 공작 레이누드 3세 판 헬러가 사망한 뒤,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메흐텔트 판 헬러가 헬러 공작위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메흐텔트는 자신이 레이누드 2세 판 헬러의 살아남은 자식들 중 장녀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고, 마리아는 당시 7살이었던 빌헬름 7세가 헬러 공작 가문 혈통의 유일한 낭성 대표자인 점을 근거로 내세웠다.137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빌헬름 7세에게 헬러와 주트펜 공작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메흐텔트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후크파의 지원을 받으며 항전을 이어갔다. 1378년, 빌헬름 7세는 회네펠 전투에서 메흐텔트가 이끄는 군대를 기습 공격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메흐텔트는 더 이상의 항전은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1379년 3월 24일 헬러 여공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여공작 칭호를 계속 쓰는 것도 허락받았다.
이리하여 진정한 헬러 공작이 된 빌헬름 7세는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질란트, 홀란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장녀인 카타리나와 1379년 가을에 결혼해 저지대 국가에서의 입지를 강화했다. 이후 그는 많은 토너먼트와 마상 스포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기사로서 용맹을 선보였다. 또한 1383년 튜튼 기사단에 가담해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대항한 십자군에 참여했다.
1386 ~ 1388년, 빌헬름 7세는 브라반트 공국을 상대로 공세를 퍼부어 여러 차례 승리하고 북브라반트의 그레이브 일대까지 진출했다. 브라반트 여공작 잔 드 브라반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바츨라프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조카 마르그리트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호담공 필리프는 이 기회에 저지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설득했다. 샤를 6세는 우선 중재에 나섰지만, 빌헬름 7세는 라틴어로 된 모욕적인 도전장을 보내는 것으로 응수했다.
프랑스 왕실은 이에 분개해 응징하기로 결의했고,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지휘 아래 즉시 군대를 이끌고 헬러 공국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프랑스군은 필리프의 제안에 따라 브라반트-에노로 이어지는 길 대신에 아르덴-에노를 거치는 행군을 택했다. 이는 자기 영지가 약탈당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필리프의 계산이었다. 1388년 10월 13일, 빌헬름 7세 폰 율리히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코렌지히에서 프랑스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잔 드 브라반트는 자신을 도와준 호담공 필리프에게 감사를 표했고, 부르고뉴의 보호 아래 놓였다. 1390년 9월 28일, 그녀는 필리프에게 자신의 영지를 양도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원정을 수행한 프랑스군은 험난한 지형을 갖춘 아르덴을 왕복하면서 큰 손실을 입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샹파뉴에 돌아온 프랑스군의 몰골이 거지떼나 다름없었다고 기술했다.
1388년 말, 빌헬름 7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고대 프로이센에서의 튜튼 기사단의 십자군에 재차 가담했다. 그는 이 십자군에서 상당한 군공을 세웠지만, 포메라니아 공작 바르티스와프 7세의 영지인 스톨페 인근에서 프로이센인들에게 생포되어 팔켄부르크 성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7개월간 억류되었다가 겨우 풀려났다. 이후 빌헬름 7세는 헬러 공국으로 돌아오다가 중간에 보헤미아에 방문해 바츨라프 4세를 예방했다. 1390년 봄 잉글랜드로 가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를 알현한 뒤 가터 기사단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듬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냤고, 1391년 여름 프랑스 함대에 합류해 튀니스의 무어인 해적을 상대로 십자군을 단행한 제노바 공화국의 편에서 싸웠다.
1392년과 1393년 겨울에 다시 고대 프로이센에 가서 십자군에 가담해 활동했다. 139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율리히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1397년 클레버함 전투에서 사촌인 베르크 공작 빌헬름 2세와 함께 마크 백작 디트리히 2세, 클레페 백작 아돌프와 대결했다. 그 결과 클레페와 마츠 연합이 승리했고, 빌헬름 7세는 생포된 뒤 몇 달간 옥고를 치르다가 큰 몸값을 약속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는 필요한 금액을 모으기 위해 헬러 공국에 속한 에머리히 암 라인을 두 백국에 전당포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몸값 마련은 잘 이뤄지지 않았고, 클레페 측은 이를 빌미삼아 1402년 에머리히 암 라인을 공략했다.
1399년 브라반트 공국과 소규모 전쟁을 치른 끝에 그레이브를 양도받았으며, 고대 프로이센에서의 십자군에 재차 참여했다. 한편, 그는 프랑크푸르트와 아헨 사이의 대관식 도로를 통제했다. 1400년 팔츠의 루프레히트는 이 길을 통해 아헨으로 가서 로마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르려 했으나, 빌헬름 7세가 저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1402년 2월 16일 아른험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카타리나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고, 형제 레이날트 4세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1] ? ~ 1394, 아르켈 영주 요한 5세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