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23:03:06

잔 드 브라반트

파일:잔 드 브라반트.jpg
성명 잔 드 브라반트
Jeanne de Brabant
생몰년도 1322년 6월 24일 ~ 1406년 12월 1일
출생지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사망지 브라반트 공국 브뤼셀
아버지 장 3세 드 브라반트
어머니 에브뢰의 마리
형제 마르그리트, 마리, 장, 앙리, 고드프루아
남편 기욤 2세 드 에노, 벤첼 1세 폰 룩셈부르크
자녀 기욤
직위 브라반트 여공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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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반트 공국의 여공작. 호담공 필리프가 이끄는 부르고뉴 공국에 브라반트 공국을 양도했다.

2. 생애

1322년 6월 24일 브라반트 공국의 수도 브뤼셀에서 브라반트 공작 장 3세 드 브라반트와 에브뢰 백작 루이의 딸인 마리의 장녀로 태어났다. 형제로 마르그리트[1], 마리[2], 장[3], 앙리[4], 고드프루아[5]가 있었다.

1334년, 아버지 장 3세가 메헬렌의 지배권을 놓고 플란데런 백작 루이 1세 드 플란데런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2년간 지속되다가 1336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중재로 아미앵에서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이때 잔은 양자간의 화해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플란데런 백국과 동맹을 맺었던 에노 백작 기욤 1세의 아들인 기욤 2세와 결혼했다.

1345년, 남편 기욤 2세가 프리슬란트 반란을 진압하던 중 전사했다. 여기에 기욤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 기욤 마저 유아기에 사망했다. 이에 따라 에노 백국은 기욤 2세의 누이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의 황후인 마르그리트에게 넘어갔다. 1347년 6월, 필리프 6세의 중재 하에 보헤미아 국왕이자 룩셈부르크 백작 얀 루쳄부르스키의 아들인 벤첼 1세 폰 룩셈부르크와 결혼 계약을 맺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인가를 받은 뒤 1352년 결혼식이 거행되면서 성립되었다.

1355년 12월 5일, 아버지 장 3세가 사망했다. 장 3세의 세 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장녀인 잔이 뒤이어 브라반트 여공작이 되었다. 1356년 1월 3일, 남편 벤첼 1세는 브라반트 공국 신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아내의 두 누이인 마르그리트, 마리와의 분쟁을 회피하기 위해 <즐거운 입성(Joyeuse Entrée)> 헌장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브라반트 공작은 동맹, 전쟁 선포, 영토 양도 및 조약 등 외교 정책을 위해 브라반트 주교, 대수도원장 11인, 브라반트 각지의 영주, 남작, 뢰번, 브뤼셀, 안트베르펜 시민 대표 등으로 구성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브라반트인들 전원이 법 앞에서 평등함을 보장하고,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법 명령 없이는 체포하지 않아야 하며, 각 도시의 특권을 보장했다. 만약 공작이 이 헌장을 존중하지 않을 경우, 신민들은 공작에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잔과 벤첼 1세의 집권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았다. 루이 2세는 잔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와 결혼한 뒤 받기로 한 지참금 지불을 요구했지만 벤첼 1세가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브라반트와 플란데런간의 분쟁지인 메헬렌이 브라반트에게 넘어가는 대가로 지불하기로 했던 돈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은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었다. 1356년 군대를 일으킨 루이 2세는 메헬렌을 접수한 뒤 브뤼셀로 진군했고, 1356년 8월 17일 슈트 전투에서 브라반트군을 격파하고 브뤼셀을 점령했다. 브라반트인들은 이에 맞서 1356년 10월 24일부터 29일까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잔은 남편 벤첼의 이복 형제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의 궁정이 있는 마스트리히트로 피신했다. 이후 니더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백작인 빌헬름 1세의 중재하에 아트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이에 따르면, 루이 2세는 브라반트 공국을 잔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메헬렌을 되찾고 안트베르펀을 플란데런 백국에 편입했다. 1357년 3월 29일, 잔은 신성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카를 4세 또는 그의 남성 계통에서 가장 가까운 후계자를 브라반트와 림뷔르흐 공국의 후계자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1371년, 남편 벤첼 1세가 율리히 공국과 전쟁을 치르다가 바이스와일러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11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지만 옥살이를 한 여파로 중병에 시달리다가[6] 1383년 룩셈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잔은 벤첼 1세와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미망인이 되었다.

1386년, 헬러 공작 빌헬름 7세 폰 율리히의 침략을 받아 영지를 지키기 곤란해지자 카를 4세의 아들이자 보헤미아 국왕 겸 독일왕 바츨라프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자, 여동생 마르그리트의 딸 마르그리트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호담공 필리프는 이 기회에 저지대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로 마음먹고, 조카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설득해 빌헬름 7세에 대항한 원정군을 조직한 뒤 헬러로 진격했다. 이때 프랑스군은 필리프의 제안에 따라 브라반트-에노로 이어지는 길 대신에 아르덴-에노를 거치는 행군을 택했다. 이는 자기 영지가 약탈당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한 필리프의 계산이었다. 1388년 10월 13일, 빌헬름 7세 폰 율리히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코렌지히에서 프랑스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잔은 자신을 도와준 호담공 필리프에게 감사를 표했고, 부르고뉴의 보호 아래에 놓였다. 1399년 9월 28일, 그녀는 필리프의 아내이자 자기 여조카인 마르그리트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브뤼셀, 메헬렌, 안트베르펜 등 브라반트의 주요 도시들은 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호담공 필리프가 그들에게 금전을 분배해주자 호의를 얻어냈다. 1403년, 용담공 필리프의 아들인 앙투안 드 브라반트가 브라반트 공국의 계승권자로 인정되었다.

1404년 봄, 필리프는 잔으로부터 브라반트 공국을 양도받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브뤼셀로 향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린 그는 플란데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1404년 4월 27일 에노 백국의 할 시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그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며칠 후인 1404년 5월 7일, 잔은 퇴위를 선언했고 5월 19일에 브라반트를 앙투안에게 넘겼다. 그 후 2년간 브뤼셀에서 조용히 지내다 1406년 12월 1일에 사망했다. 사후 브뤼셀의 카르멜회 교회에 안장되었는데 이 교회는 프랑스 혁명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1] 1323 ~ 1368,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의 부인[2] 1325 ~ 1399, 투르하우트의 여성 영주. 헬러 백작 레지날트 3세의 부인[3] 1327 ~ 1335/1336, 브라반트 공작 후계자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딸인 프랑스의 마리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4] ? ~ 1349, 림뷔르흐 공작이자 메헬렌 영주[5] ? ~ 1352, 아르쇼트 영주[6] 일부 기록에 따르면 나병에 걸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