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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앙투안 드 브라반트 Antoine de Brabant | |
생몰년도 | 1384년 8월 ~ 1415년 10월 25일 | |
출생지 | 부르고뉴 공국 디종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아쟁쿠르 | |
아버지 | 호담공 필리프 | |
어머니 | 플란데런의 마르그리트 | |
형제 | 마르그리트, 카트린, 장, 마리, 필리프 | |
배우자 | 잔 드 뤽상부르생폴 | |
엘리자베트 폰 괴를리츠 | ||
자녀 | 장 4세, 필리프, 기욤, 잔(사생아), 안(사생아) | |
직위 | 브라반트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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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반트 공국의 공작. 아쟁쿠르 전투에서 형제 필리프와 함께 전사했다.2. 생애
1384년 8월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에서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의 딸 마르그리트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장, 마르그리트[1], 카트린[2], 본[3], 마리[4], 필리프가 있었다. 1393년 아버지로부터 레텔 백국을 영지로 받았다.1399년 9월 28일, 브라반트 여공작 잔 드 브라반트는 호담공 필리프의 아내이자 자기 여조카인 마르그리트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1403년, 용담공 필리프의 아들인 앙투안 드 부르고뉴가 브라반트 공국의 계승권자로 인정되었다. 이후 앙투안은 브라반트로 가서 잔을 알현했다. 1404년 봄, 필리프는 잔으로부터 브라반트 공국을 양도받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브뤼셀로 향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린 그는 플란데런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1404년 4월 27일 에노 백국의 할 시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그는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며칠 후인 1404년 5월 7일, 잔은 퇴위를 선언했고 5월 19일에 브라반트를 앙투안에게 넘겼다. 앙투안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레텔 백국을 동생 필리프에게 넘겼다.
1405년 7월 21일, 앙투안은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은 형 용맹공 장과 동맹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그는 용맹공 장의 정치적 조력자로서 두각을 나타냈고,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과 용맹공 장간의 분쟁을 여러 차례 중재했다. 또한 브라반트 공작의 권한이 의회에게 제약받는 것에 불만을 품고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1406년 7월 부르고뉴 공국을 모델로 삼아 회계 회의소의 역할을 증대해 공작의 예산 집행을 원활하게 수행하게 했으며, 추밀원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408년 8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바츨라프 4세와 동맹을 맺고 1409년 7월 16일 생폴과 리니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의 딸이자 바츨라프 4세의 조카인 잔 드 뤽상부르생폴과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룩셈부르크 공국의 서약권을 획득했다. 이후 용맹공 장이 아르마냑파와 전쟁을 벌일 때 참여해 오를레앙 공국의 지배하에 있던 몽메디, 담프빌레, 오르키몽, 이부아 시를 정복하고 발레랑 3세를 총독으로 삼았다. 그러나 바츨라프 4세가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당장 철수하라고 위협했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고,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이 브라반트로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1409년, 괴를리츠 공작 요한 폰 괴를리츠의 딸인 엘리자베트 폰 괴를리츠와 결혼했다. 1411년 1월 18일 룩셈부르크 공작인 욤스크 폰 모라비아가 자녀를 두지 못하고 사망한 뒤 룩셈부르크 공국에 대한 서약을 받았다. 이에 바츨라프 4세의 이복 동생으로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국왕이자 신임 독일왕으로 선출된 지기스문트는 서부 제국 영토와 룩셈부르크 가문의 재산이 부르고뉴 공국에 들어갈 위험을 인식하고, 앙투안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브라반트와 림뷔르흐를 지배하고 있다며 이 영토를 제국 영지로 회복할 것이라는 뜻을 드러냈다. 그는 1412년 4월 8일 룩셈부르크 가문이 앙투안과 엘리자베트에게 경의를 표하는 걸 금지했고, 1413년 9월에는 앙투안에 대한 공개 저항을 촉구했다. 이에 룩셈부르크 집행관 후아르 도텔(Huart d' Autel)이 아르마냑파 지도자인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와 동맹을 맺고 앙투안에 대한 대중 봉기를 일으켰고, 앙투안은 이로 인해 룩셈부르크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1414년 아르마냑파의 공세로 용맹공 장이 수세에 몰린 끝에 아라스에서 포위되자, 앙투안은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중재를 시도했다. 그 결과 1414년 9월 4일 아라스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의 부르고뉴 공국의 패권은 상실되었지만 부르고뉴국의 주권이 확인되었다. 이후 앙투안은 아르마냐크파와 친밀해졌고, 브라반트, 림부르크, 룩셈부르크에서의 통치를 강화할 수 있었다. 1415년 8월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는 남동생이자 느베르 백작인 필리프 드 느베르와 함께 이에 맞서 싸우기로 하고 프랑스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고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가 헨리 5세가 전투 막판에 포로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살해되었다. 사후 브뤼셀 인근 테르뷰젠의 성 요한 복음사가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잔 드 뤽상부르생폴(? ~ 1407):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와 모드 홀랜드[5]의 딸.
- 장 4세 드 브라반트(1403 ~ 1427): 브라반트 공작.
- 필리프 드 생폴(1404 ~ 1430): 장 4세 사후 브라반트 공작.
- 엘리자베트 폰 괴를리츠(1390 ~ 1451): 괴를리츠 공작 요한 폰 괴를리츠의 딸. 앙투안 드 브라반트 사후 니더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작 요한 3세와 재혼.
- 기욤(1410): 요절.
- 사생아
- 잔: 필리프 드 라 비엔의 아내.
- 안(? ~ 1455): 산티스테반 백작 페드로 데 페랄타 이 에스페랄타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