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8:53:05

루이 드 기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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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도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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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기옌 공작
루이 드 기옌
Louis de Guyenne
파일:루이 드 기옌.jpg
이름 루이 드 기옌
(Louis de Guyenne)
출생 1397년 1월 22일
프랑스 왕국 파리 호텔 생폴
사망 1415년 12월 18일 (18세)
프랑스 왕국 파리
배우자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 (1404년 결혼)
아버지 샤를 6세
어머니 이자보 드 바비에르
형제 이자벨, 잔, 샤를, 마리, 미셸, , 카트린, 샤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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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도팽, 기옌 공작.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간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양쪽에게 휘둘리다가 이른 나이에 급사했다.

2. 생애

1397년 1월 22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 호텔 생폴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이자보 드 바비에르 사이의 8번째 자식이자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번째 형인 샤를은 1386년 9월 25일에 태어난 뒤 그해 12월 28일에 요절했고, 두번째 형인 샤를은 1392년에 태어나 샤를 6세의 첫 도팽이자 기옌 공작이 되었지만 1401년에 요절했다. 따라서 루이는 1401년에 두번째 도팽이자 기옌 공작에 선임되었다. 남자 동생으로 샤를이 있었으며, 누이로 잔[1], 이자벨[2], 잔[3], 마리[4], 미셸[5], 카트린, 필립[6]이 있었다.

도팽 루이는 1404년 8월 31일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장녀인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와 결혼했다. 1405년 7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형 샤를 6세를 설득해 노르망디 공작위를 수여받았다. 노르망디 공작위는 전통적으로 도팽에게 수여되는 지위였는데, 그걸 받은 것은 자신이 도팽 루이를 제치고 왕위 계승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수많은 귀족들이 반발하자, 오를레앙 공작은 결국 노르망디 공작위를 포기했다.

8월 15일,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은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사치와 부패, 과도한 세금을 거둬들인 데다 무익한 전쟁을 벌여 백성을 파탄 지경으로 몰고 간 오를레앙 공작을 타도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600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오를레앙 공작은 이에 크게 놀라 도팽 루이와 이자보 왕비를 데리고 파리에서 도피했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은 8월 19일 쥐비시 인근에서 왕세자를 가로챘고,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했다.

용맹공 장은 행정, 사법, 재정 분야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다.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의 파벌이나 동맹이 다수 포함돼 있었던 파리고등법원은 부르고뉴 공작의 개혁안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자기 영지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파리로 진군했고, 장 역시 이에 대항하고자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베리 공작이며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형제인 장 드 베리의 중재하에 협상을 벌였고, 1405년 10월 16일 평화 조약을 맺고 두 공작이 영원한 형제가 될 것을 맹세했다.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도를레앙이 파리 시의 거리에서 부르고뉴 공작 장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들의 습격으로 피살되었다. 오를레앙 공작의 심복들과 파리의 프레보는 수사 끝에 암살자들이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와 접촉한 정황을 밝혀냈다. 파리 프레보가 추밀원 회의에서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의 자택 수색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자, 부르고뉴 공작은 겁에 질린 채 베리 공작과 앙주 공작을 따로 불러내 자신이 '악마의 꾐에 빠져서' 사촌의 암살을 지시했음을 자백하고는 영지인 플랑데런으로 달아났다.

오를레앙 공작의 미망인 발렌티나 비스콘티는 1407년 12월 13일 검은 말이 끄는 검은 색 천으로 장식된 마차를 타고 상복을 입은 채 파리에 입성한 뒤 아이들과 함께 샤를 6세 앞에 엎드리며 복수를 간청했다. 이에 파리시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은 그녀에게 동정심을 보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의 실정과 무리한 가스코뉴 원정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국고 낭비를 초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파리 시민들은 오히려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다. 결국 오를레앙파 지도부는 1408년 1월 아미앵에서 용맹공 장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용맹공 장은 정적들의 미온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고 수많은 수행원과 호위대를 이끌고 아미앵으로 간 뒤 오를레앙 공작 살해는 정당하고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장 쁘띠를 비롯한 파리 대학의 저명한 신학 교수들은 오를레앙 공작 루이가 폭군이었으며 폭군 살해는 정당하다는 논리로 그를 변호했다.

1408년 2월 28일, 부르고뉴 공작이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발렌티나 비스콘티를 비롯한 오를레앙 지지자들은 사전에 빠져나갔고,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는 왕궁에 틀어박혔다. 그 대신, 도팽 루이가 호텔 생폴의 그레이트홀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 대학 총장과 교수들, 파리 시민 대표 400인, 몰래 들어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공개 변론을 했고, 모두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후 그는 샤를 6세를 찾아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이 찬탈하려 들 것을 두려워한 이자보 왕비는 3월 11일에 도팽 루이를 데리고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그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를 탈출했다.

1408년 6월,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리에주 주교는 부르고뉴 공작의 주요 동맹자였기에, 부르고뉴 공작은 그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친 오를레앙 세력은 이 때를 틈타 파리로 쳐들어가서 곧바로 장악한 뒤 부르고뉴 공작에게 내려졌던 사면령을 취소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오테여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궤멸시켰고,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이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정당화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저항 의지를 상실한 오를레앙 세력은 11월 16일 투르로 후퇴했고, 부르고뉴 공작은 11월 28일 파리에 입성했다. 그 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1409년 3월 부르고뉴 공작은 정식으로 국왕의 사면을 받고 오를레앙 공작의 유족들과 공개적으로 화해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은 추밀원과 재무부를 비롯한 주요 요직에 자리잡고 있던 오를레앙 파벌을 대거 숙청했고, 1409년 11월 이자보 왕비를 압박해 국왕 대리인의 권한을 도팽 루이에게 양도하게 했다. 1409년 12월 31일, 도팽 루이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왕실 추밀원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2살에 불과했기에, 용맹공 장이 추밀원을 진두지휘했다. 도팽 루이는 1412년 모르탱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에 환멸을 느낀 그는 샤를 6세의 고문이었다가 부르고뉴 공작에게 밉보여 피살된 뒤 방치되어 있던 장 드 몽테규의 유해를 부르고뉴 공작과 상의 없이 매장했다. 이는 도팽이자 국왕 대리인으로서 부르고뉴 공작에 맞서는 아르마냑파를 포용하는 동시에 부르고뉴 공작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1413년 1월,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 삼부회를 소집해 정부를 개혁하고 잉글랜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촉구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 세력인 북부 프랑스 도시 대표들로 채워진 삼부회는 부유한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고,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이에 호응하면서 정부의 부패와 귀족들의 재정적 착취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부르고뉴파의 정책과 개혁의 방향성이 명확해지면서 부르고뉴 공작은 상류층 시민들과 대귀족들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도팽 루이는 이 때를 틈타 대귀족들과 면밀히 접촉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413년 3월, 도팽 루이는 아르마냑파와 동맹을 맺은 뒤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인 장 드 베이를 상서직에서 해임했다. 그리고 뱅센에서 열릴 예정인 토너먼트를 구실로 샤를 6세를 파리에서 탈출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부르고뉴파 기사들과 정치 조폭들, 그리고 급진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폭도 수천 명이 4월 27일 그레브 광장에 모여 대재무관 피에르 드 에사르를 비롯한 도팽 루이의 측근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하며 루이가 머물고 있던 별장으로 쳐들어갔다. 도팽 루이는 처음에는 자신의 측근들 중 누구도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군중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반역죄로 처벌받은 50명의 명단을 발표해야 했다.

군중은 이후에도 반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파리 시의 부유한 시민들과 귀족들 사이에 공포를 뿌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은 당파의 상징으로 하얀 색 두건을 맞춰 입으며 세력을 과시했고, 부르고뉴파의 주요 지지 세력인 파리 시 도축업자 조합과 그들의 대장인 시몽 카보슈의 이름을 따서 카보쉬앵이라고도 불렸다. 루이는 이 상황에 강한 불만을 품고 카보쉬앵의 배후에 있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항의하기도 했지만, 별다른 힘이 없었기에 이들의 전횡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해 5월, 일명 카보쉬앵 칙령이라 불리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 개혁을 위한 특별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도팽의 파벌과 부유한 시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숙청을 이어갔다. 이에 격분한 파리 유력자들이 맹비난을 퍼부었는데, 특히 부르고뉴 공작을 그동안 지지했던 파리 대학마저 카보쉬앵의 만행을 비난했다. 7월,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이끄는 아르마냑파가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진격했다. 카보쉬앵의 전횡으로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고 상거래가 마비되면서 생업에 지장을 받는 등의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파리 시민들이 즉시 성문을 열어줬고, 아르마냑파는 파리에 입성한 뒤 카보쉬앵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급히 파리를 탈출해 플란데런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아르마냑파는 부르고뉴 공작을 지지했던 모든 동조자들에 대한 맹렬한 탄압을 실시했고, 도팽 루이는 루브르 궁에 사실상 연금되었다. 이에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기회 삼아 루이가 아르마냑파 반역자들의 인질로 이용당하고 있으니 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일으켰다. 1414년 1월, 부르고뉴 공작은 파리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철수했다. 이후 아르마냑파는 도팽 루이가 부르고뉴파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해 측근 몇 명을 체포했다. 그해 4월, 아르마냑파는 샤를 6세의 이름으로 신민소집령을 선포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피카르디에서 부르고뉴파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부르고뉴 지지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한 뒤, 일부는 부르고뉴로 행군하고 주력군은 아르투아로 향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의 동생인 느베르 백작 필리프가 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아르마냑파에 항복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수세에 몰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414년 7월, 아르마냑파 주력군이 아라스를 포위했지만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때 아르마냑파 원정군에 끌려왔던 도팽 루이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했고,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르마냑파 수뇌부 역시 내전에 지쳐있던 터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9월 4일,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와의 동맹 협상을 그만두는 대가로 사면받았고, 아르마냑파는 철수했다. 이렇게 양자의 화해를 중재하는 데 성공하면서 입지가 강화된 도팽 루이는 1414년 9월 4일 '부르고뉴파(Burgundians)', '아르마냑파(Armagnac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금지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리고 아르마냑파의 일원이었지만 아라스 평화 협상 과정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높이 평가하며, 부르고뉴 공작을 계속 지지했다가 아르마냑파에게 몰수된 장 2세 드 파르테나이의 영지인 보베, 생투엔, 파르테나이를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수여했다.

아르마냑파는 도팽 루이의 입지가 갈수록 강해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끝에 그를 납치해 믈룅 성에 감금하고는 아라스 평화 협약에서 합의된 사면 대상 중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 일부를 제외하는 칙령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이에 격노했지만, 잉글랜드의 침공이 임박한 시점에서 그들과 싸웠다가 매국노라는 비난을 살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칙령을 인정했다. 1415년 4월, 도팽 루이는 타네기 3세 뒤 샤스텔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도움으로 믈룅 성에서 빠져나온 뒤 파리에 돌아왔다. 이후 샤를 6세의 이름으로 바스티유 요새의 통제권을 장악한 뒤 브르타뉴 군대를 입성시켜 파리 시의 요충지들을 점령했다. 아르마냑파는 주요 관직에서 대부분 해임되었고, 도팽 루이의 측근들이 이를 대신했다. 또한 도팽 루이는 아내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를 파리 시 외곽으로 쫓아냄으로써, 부르고뉴파에게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보였다.

1415년 10월 25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아르마냑파는 이 전투에서 완패하면서 위세가 약해졌고, 부르고뉴 공작은 이 기회를 노려 잉글랜드군으로부터 샤를 6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파리로 진군했다. 도팽 루이는 잉글랜드군과 싸우려면 칼레로 진군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무시당했다. 이에 아르마냑파의 수장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된 뒤 부르고뉴군의 공세를 저지했고, 부르고뉴 공작에 동조한다는 의심이 드는 파리 시민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이렇듯 잉글랜드의 침략과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갈등 재개로 정국이 혼란스럽던 1415년 12월 18일,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일각에서는 아르마냑파가 도팽 루이가 부르고뉴 공작과 손잡고 파리를 넘길 거라고 의심해 독살했을 것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이질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고 본다. 이후 남동생 장 드 투렌이 뒤를 이어 도팽이 되었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1417년 4월 4일 콩피에뉴에서 감작스럽게 사망했고, 또다른 동생 샤를이 도팽 칭호를 물려받았다. 그의 아내였던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는 나중에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재혼했다.

[1] 1388 ~ 1390, 요절[2] 1389 ~ 1409,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와 초혼,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과 재혼[3] 1391 ~ 1433,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부인[4] 1393 ~ 1438, 푸아시의 수녀원장[5] 1395 ~ 1422,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부인[6] 1407,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