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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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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이르
La H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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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에티엔 드 비뇰
(Etienne de Vignolles)
출생 1390년
알브레 프레샤크 레뱅
사망 1443년 1월 11일 (향년 53세)
기옌 몽토방
복무 프랑스 왕국군
1418 ~ 1443년
최종 계급 대장
주요 참전 백년전쟁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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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왕국귀족이자 군인으로, 오를레앙의 성녀 잔 다르크의 전우로 유명하다.

본명은 에티엔 드 비뇰(Etienne de Vignolles), 라 이르(La Hire)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졌다.[1]

성격이 상당히 포악하였다고 한다.[2] 그런 성격을 지닌 탓인지 전장에서는 선봉으로 나서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거친 성격답게 욕설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잔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욕을 하거나 맹세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뒤로는 자신의 지팡이에 대고 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2. 생애

1390년경 가스코뉴의 랑드(현재 프랑스 서남부 알브레 프레샤크 레뱅)에서 출생했다.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며, 그의 초기 생애 역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전쟁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매우 용감했지만 극도로 가난해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진다. 일찍이 용병이 되어 백년전쟁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 참여햇고, 여러 마을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면서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그러다가 1418년 동료 용병인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함께 도팽 샤를의 군대에 참여했다.

1419년 부르고뉴인들로부터 쿠시 성을 공략한 뒤 "나는 왕자, 왕자도, 공작도, 백작도 아니다. 나는 드 쿠시 경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1420년 1월 하녀 한 명이 모종의 이유로 그에게 반감을 품고 성 내에 포로로 잡혀 있던 부르고뉴인들을 풀어줬고, 부르고뉴인들은 그가 부재한 틈을 타 쿠시 성을 탈환했다. 그 후 랑 이르는 로렌 공작 샤를 2세의 후계자인 앙주의 르네를 돕기 위해 로렌으로 가서 부르고뉴군과 맞섰다. 1421년 잉글랜드군과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 사이에 보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 프랑스군에 가담해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여관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파이프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남은 생애 동안 절름발이로 살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전사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1423년 샬롱앙샹파뉴를 공략했으며, 비트리 르 프랑수아에서 출진해 부르고뉴에 협조하던 룩셈부르크 공국에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1424년에는 메인에서 잉글랜드군의 공세에 맞섰지만, 베르뇌유 전투 승전 후 기세가 오른 잉글랜드군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고, 결국 현지 프랑스군을 이끌고 루아르 강 너머로 철수했다. 1426년 잉글랜드군의 포로 신세였던 방동 백작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을 대신해 방돔 시와 그 카운티의 주지사로 선임되었다. 또한 장 드 뒤누아의 군사 작전에 협력했으며, 다른 용병들과 함께 르망을 공략했다. 그러나 1427년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반격으로 르망을 상실했다.

1427년 9월 5일, 라 이르는 몽타르지 공방전에 참여해 몽타르지 요새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급습해 몽타르지를 구원하고 적병 500명을 사살하고 600명 이상을 생포하는 데 기여했다. 1429년 4월 22일, 블루아에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가는 잔 다르크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후 그는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의 독려를 받으며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는 데 일조했다. 뒤이은 루아르 원정에서 선두에서 앞장서서 싸워 연이은 승전에 일조했으며, 잉글랜드군이 파리를 향해 북쪽으로 철수하자 1,500명의 기마병을 이끌고 추격했다.

1429년 6월 18일 정오, 라 이르가 이끄는 기병대가 파테 마을에서 남동쪽으로 2마일 떨어진 블루아-파리 도로와 오를레앙-샤르트르 도로의 교차점에서 잉글랜드군을 거의 따라잡았다. 잉글랜드군 사령관 존 파스톨프는 전투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포와 짐을 블루아-파리 도로 서쪽의 조그마한 언덕인 라가렌에 올려놓게 하고, 존 탈보트에게 500명의 장궁병들을 데리고 울타리가 앞에 쳐져 있는 숲에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프랑스 기병대에게 기습 사격을 가해 상당한 손실을 입힌 뒤 즉시 물러나서 본대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탈보트의 궁수들은 오후 1시 30분까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교차로 바로 남쪽의 블루아-파리 도로 맞은편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장궁병들이 기병들의 돌격을 저지할 말뚝을 충분히 박지 못했다.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숲속에 자리를 잡은 직후, 프랑스 기병대가 탈보트의 장궁병들에게서 반 마일 떨어진 생페라비에 도착했다. 이때 큰 사슴 한 마리가 기병들의 접근에 놀라 숲에서 뛰쳐나와 장궁병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궁수들은 갑작스러운 사슴의 돌진에 당황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피했다. 프랑스 기병들은 그 비명을 듣고 적이 숨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즉시 라 이르에게 잉글랜드군을 발견했고 적이 전투 대형을 결성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라 이르는 적이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즉시 돌격하라고 명령했다. 오후 2시, 프랑스 기병들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적 궁수병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엉성하게나마 전방에 서 있는 말뚝을 회피해 장궁병의 측면을 강타했고, 뒤이어 장궁병들을 에워싸서 섬멸했다. 얼마 안남은 장궁병들이 가까스로 그들을 피해 본대로 도주했다.

장궁병들이 형편없이 깨져서 달아나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패닉에 빠졌다. 특히 잉글랜드군이 최근에 노르망디와 프랑스 점령지에서 징집한 민병대가 도주하기 시작했다. 파스톨프가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애쓰고 있을 때, 라 이르의 프랑스 기병대가 적 본대를 향해 돌진해 적 대열을 돌파하고 적병들을 마구 베었다. 한 시간 남짓 지속된 전투 끝에, 잉글랜드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도주했고, 프랑스 기병들은 그런 적을 추격해 무참히 학살했다. 해가 저물 무렵 전투 현장에 도착한 프랑스 본대는 프랑스 기병대를 피해 사방으로 달아나는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잔 다르크는 치명상을 입은 잉글랜드 병사를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은 뒤 위로를 건네고 죽기 전에 자신이 생전에 지은 죄를 고백하고 평온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전해진다. 도팽 샤를을 따르는 아르마냑파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부대의 절반인 2,500여 명을 잃었고, 존 탈보트, 토머스 스케일스 등 고위급 장성들이 생포되는 참패를 입었다. 이리하여 루아르 강의 주도권은 아르마냑파 프랑스에 넘어갔고, 잉글랜드군은 파리로 패퇴했다.

파테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키는 큰 공을 세운 라 이르는 뒤이은 랭스 행진에서도 선두에서 진군해 도팽 샤를이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서 대관식을 치르는 데 일조했다. 1430년 5월 잔 다르크가 콩피에뉴 공방전 도중 부르고뉴군에 생포된 뒤 루앙에 수감되자, 라 이르는 잔 다르크를 구출하기 위해 1431년 루앙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지만 부르고뉴군에게 요격되어 사로잡힌 뒤 도르당 지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432년에 자유를 얻는 대가로 황금 주화 14,000개, 포도주 20톤, 말 한 필을 지불했다고 한다.

이후 아르투아, 일드프랑스, 피카르디 등지에서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군과 여러 전투를 벌였다. 1432년 5월 ~ 8월 20일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 참여해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을 격퇴하는 데 일조했으며, 1435년 5월 초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함께 프랑스군 1,000명을 이끌고 노르망디로 진출할 교두보인 제르베로이에 도착한 뒤 요새 재건에 착수했다. 한편 아룬델 백작 존 피츠앨런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3,000명은 제르베로이에서 12km 떨어진 노르망디 국경 도시인 구르네앙브레이에 집결한 뒤 솜 강 인근의 도시이며 샤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한 루 시를 공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군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아룬델 백작은 제르베로이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5월 8일 밤 구르네에서 출발한 아룬델 백작은 5월 9일 아침에 선봉대와 함께 제르베로이 외곽에 있는 발 다롱델 평원에서 적의 동태를 살폈다. 고원에 자리잡은 제르베로이 시에서 적 선봉대가 온 것을 확인한 라 이르와 생트라유는 저들이 선봉대이고 대규모 적군이 이곳으로 이동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요새를 막 재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의 포위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기에, 행군 중인 적을 급습하기로 결의했다. 라 이르가 이끄는 기병대는 제르베로이 시를 떠나 적 선봉대가 자리잡은 위치를 우회해 적의 감시를 회피한 뒤 라우덴쿠르 마을 인근 도로에서 행진 중이던 적 본대를 기습 공격했다. 이와 동시에, 생트라유가 이끄는 보병대는 아룬델 백작과 함께하는 잉글랜드 선봉대를 공격했다. 잉글랜드 궁수병들은 말뚝을 박아 스스로 보호하려 했지만, 프랑스 병사들이 컬버린(Couleuvrine: 핸드 캐논의 일종)으로 공격을 퍼붓자 점차 움츠러들었다. 이때 아룬델 백작은 컬버린에서 발사된 총탄이 한쪽 다리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얼마 후 라 이르가 적 본대를 모조리 쫓아낸 후 제르베로이로 돌아오면서 완전히 고립된 잉글랜드 선봉대는 항복했다. 아룬델 백작은 생포된 후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며칠 후 감염으로 인해 상처가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잉글랜드군의 손실은 수백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프랑스군은 20명 내지 30명만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제르베로이 전투의 승리를 이끈 라 이르는 뒤이어 장 드 뒤누아와 함께 노르망디 원정을 벌였고, 1436년 1월 몽모리용 영주, 롱그빌 영주, 노르망디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436년 2월 2일 루앙 인근에서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함께 군대를 집결하던 중 존 탈보트의 잉글랜드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패주했다.[3]

1442년 샤를 7세의 타르타 원정에 참여했으며, 뒤이은 가스코뉴 원정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몽토방에서 벌어진 전투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었고, 1443년 1월 11일에 몽토방에서 겨울을 보내던 중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드로이지(Droisy) 출신 여인인 마르그리트 드 드로이지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의 유해는 몽모리용의 생로랑 수도원에 안장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중에 파괴되었고, 현재는 기념 석판만 남아 있다.

3. 기타

플레잉 카드에서 하트 잭이 이 인물을 상징한다.

4. 대중문화에서

성격이 포악했다는 묘사가 있어서인지 상당히 험악하거나 거대하고 힘쎈 인물로 그려진다.
  • 게임 《JEANNE D'ARC》에서는 배경에 판타지 요소가 들어가서 사자 수인으로 나온다.
  • 게임 《Joan of Arc》에서 거구의 둔기를 사용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 캠페인 3번째 미션에서 챔피언 영웅으로 등장하며 시작 나레이션에서 언급할 정도로 무용을 갖췄다고 설명된다. 여담으로 외국어 판으로 하면 3인칭화를 사용한다.[4] 3번째 미션의 진행년도는 라 이르가 죽기 한첨 전인 1429년이기 때문에 잔 다르크와 달리 생사가 미선 패배에 영향을 주지 않고 체력이 다해 쓰러져도 사망이 아니라 부상을 입었다고 나온다. 결정판의 서유럽 DLC 《서쪽의 군주들》에서 부르고뉴의 '서쪽의 대공들' 캠페인 마지막 6번째 미션에서는 잔 다르크를 생포하기 전에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도전과제가 있는데, 과제명이 '라 이르, 입닥쳐'이다.
  • 영화 《잔 다르크(1999)》에서는 거친 욕쟁이로 등장한다. 잔이 공성전 중에 부상을 입고 후방에서 치료를 받을 때 주님에게 기도를 올리는데, 그녀를 살려주신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욕하지 않겠다고 진지하게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이어서 "주님 안 고쳐주시면 그냥 @#$%&*!"하며 쌍욕이 섞인 기도를 하려는 순간 정신을 차린 잔에게 제지당하는 등 약간의 개그씬을 담당했다.링크
  • 문피아 대체역사소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는 리슈몽 휘하에서 전사한 시체가 운반되는 것으로만 언급된다. 잔 다르크의 전우로서 잔 다르크를 구하려고 했던 것과 오를레앙이 포위됐을 때 잉글랜드군을 영격하여 활로를 열었던 걸 감안하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최후.


[1] 영문 위키피디아의 La Hire 항목에 의하면 이 별명의 유래에 대해 2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잉글랜드군이 그에게 라틴어Ira Dei, 즉 신의 분노로 해석할 수 있는 Hire-god이라는 별명을 붙인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화를 잘 내는 사나운 성격의 소유자여서 그 성정을 고슴도치에 비유, 불어로 고슴도치를 뜻하는 hérisson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실제로 라 이르는 성격이 포악했다고 전해진다.[2] 프랑스 왕정이 잔 다르크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았기에 문제아들이나 잉여 병력만 주어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3] 존 탈보트는 1434년 3월 크레유를 공략하면서 라 이르의 형제인 아마독 드 비뇰(Amadoc de Vignoles)을 살해하기도 했다.[4] 예 : "라 이르. 누구든지 걸리면 죽여버리겠다.", "라 이르. 검에 피가 마르고있다.", "오오. 라 이르의 칼은 아직도 피에 굶주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