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22:27:38

베르뇌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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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뇌유 전투
영어: Battle of Verneuil
프랑스어: Bataille de Verneuil
파일:베르뇌유 전투.jpg
시기
1424년 8월 17일
장소
프랑스 왕국 베르뇌유 평원
원인
도팽 샤를헨리 6세의 프랑스 왕위 경쟁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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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베드퍼드 공작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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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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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
병력
8,000~9,000명 14,000~16,000명
피해
2,000명 7,262명
결과
잉글랜드군의 승리.
영향
도팽 샤를의 입지 약화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롬바르드 기병대의 배치 문제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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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4년 8월 17일,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 왕국은 제2의 아쟁쿠르 전투로도 일컬어지는 이 전투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2. 배경

1422년 8월 31일, 7년간 프랑스를 침략해 수많은 영토를 공략하고 정신병에 걸린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를 공인받았던 헨리 5세모 공방전 도중에 걸린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형제인 베드퍼드 공작 존을 프랑스의 섭정으로 지명하고, 샤를 7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정했다.

그 후 샤를 6세가 1422년 10월 21일에 사망하면서,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샤를 6세의 아들이며 아르마냑파의 수장인 도팽 샤를은 이에 불복하여 서부 도시 부르주를 중심지로 삼고 프랑스 남부 일대에 지지 세력을 확보한 뒤 프랑스와 전통적인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에 대적하던 스코틀랜드인들을 끌여들어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했다. 이후 두 세력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 승패를 주고받았다. 1423년 7월 31일 프랑스 국왕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올리는 장소인 랭스로 북상하려던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크라방 전투에서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에게 궤멸되었으며, 1423년 9월 26일 앙주와 메인을 약탈한 뒤 노르망디로 귀환하던 잉글랜드군이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습격을 받고 섬멸되기도 했다.

1424년, 헨리 6세의 섭정으로서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등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는 프랑스 북부 지역을 통치하던 베드퍼드 공작 존은 프랑스 중부의 앙주와 메인을 공략하고 부르주를 압박하기로 마음먹고, 8,000~9,000 가량의 병력을 모집했다. 여기에 부르고뉴에서 파견된 3,000명도 가세했다. 이와 동시에, 아르마냑파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세력이 보유한 도시와 성을 가능한 한 많이 공략하기 위해 프랑스 장정들을 대거 징발했고, 해외에서 용병대를 대거 모집했다. 특히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1424년 3월 7일 6,500명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이끌고 라 로셸에 상륙한 뒤 샤를 7세로부터 "프랑스 왕국 전역에서 전역을 수행하는" 중장 직위를 수여받고 투렌 공작에 선임되었다. 이렇게 해서 끌어모은 프랑스군의 전력은 14,000~16,000명에 달했다.

당시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이브리 성은 도팽 샤를을 지지하다가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될 기미를 보이자 1424년 8월 14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브리 성으로 전군을 집결시킨 뒤 이곳을 구하러 오는 적군을 섬멸한 후 앙주와 메인으로 진격하려 했다. 실제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이브리를 구하기 위해 이브리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노낭쿠르에 이르렀다. 하지만 베드퍼드의 군대가 이브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심각한 논쟁에 휩싸였다.

프랑스 장성들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 대규모 야전에서 참패를 겪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지형상 절대 우세하는 등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 그들은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이브리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의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반 잉글랜드 정서가 매우 극렬했고,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자신들이 맹활약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기 때문에 잉글랜드군과 대규모 야전을 벌일 때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크라방 전투 때 프랑스인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최선을 다해 싸우던 동족들이 몰살당했다고 여겼기에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도팽 샤를로부터 지휘권을 부여받은 장 8세 다르쿠르의 뜻대로 이브리를 구원하지 않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대신, 베르뇌유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있는 잉글랜드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잉글랜드 본대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뇌유를 무력으로 공략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기발한 꾀를 고안했다. 그들은 동포의 목에 갈고리를 씌운 뒤 피를 잔뜩 묻힌 후 베르뇌유 성채로 데려가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으며 이들은 겨우 살아남은 포로라고 소개했다. '잉글랜드 포로'로 가장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목놓아 통곡하며 "이제 잉글랜드는 끝났다. 우리는 패망했다."라고 소리지르자, 베르뇌유 수비대와 시민들은 정말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다고 착각하고 프랑스군에 귀순했다.

한편, 8월 14일 이브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베드퍼드 공작은 다음날 베르뇌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능한 한 빨리 그곳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3,000명의 부르고뉴 파견대를 피카르디에 별도로 보내 별도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눈앞에 두고 부르고뉴 부대를 다른 곳에 보낸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8월 16일 잉글랜드군이 베르뇌유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많은 노르만인들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잉글랜드군에서 이탈해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한편,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잉글랜드군이 근처에 이르자 이들과 맞붙어야 하는지를 놓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 우위이며 저들은 멀리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승리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프랑스 장군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이에 설득되었다. 그럼에도 장 8세 다르쿠르는 교전을 섣불리 벌였다가 일을 망칠까봐 망설였지만, 이번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프랑스를 떠나겠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8월 17일 베르뇌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3. 전투 경과

8월 17일 아침,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베르뇌유 성채에서 1.6km 떨어진 평지에 전투 대형을 형성했다. 장 8세 다르쿠르가 이끄는 프랑스 맨앳암즈는 좌측에 편성되었고, 스코틀랜드군은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롬바르드와 카스티야 중기병 2,000명이 각각 좌측면과 우측면에 배치되었고, 프랑스 기병대는 말을 후방에 묶어둔 채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 장궁병의 화살비에 무참히 낙마하곤 했던 프랑스인들은 말에서 내린 뒤 전투에 임했지만, 그런 경험이 없고 걸어서 싸우는 것을 굴욕으로 여긴 롬바르드인과 카스티야인 용병들은 말을 탄 채 전투에 임했다.[1]

이에 맞서는 잉글랜드군은 적군으로부터 약 1,000야드 떨어진 베르뇌유 북동쪽 숲을 등진 채 전투 대형을 편성했다.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좌측에 편성되었고, 베드퍼드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우측에 배치되었다. 하마기병들이 각 사단의 본체를 구성했고, 양측면에는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편성되었다. 수하물을 실은 수송 마차들은 사각 대형으로 형성된 채 후방에 있었고, 수많은 말들이 서로 묶인 채 마차 내부에 있었다. 2,000명 가량의 숙영지 경비대 및 궁수들이 수하물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양군은 아침에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늦은 오후까지 대치하면서 상대방이 먼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오후 4시경에 양측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적군과의 거리가 250야드 이내에 이르렀을 때,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멈춰서서 손에 쥐고 있던 날카로운 지팡이를 바닥에 꽂아서 울타리를 형성한 뒤, 나르본 자작 기욤 2세가 이끄는 하마 기사를 선두로 내세워 전진하는 적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프랑스 궁수들이 이에 맞서 화살을 쐈고, 뒤이어 양측 보병대가 맞붙었다. 이때 프랑스 보병대와 스코틀랜드 보병대 간의 호흡이 맞지 않아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과 맞붙었을 때 스코틀랜드군은 여전히 전진 중이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 보병대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한편, 롬바르드 기병과 카스티야 기병들은 잉글랜드군의 측면으로 돌진했다. 롬바르드 기병들은 화살 세례에 굴하지 않고 탁월한 승마술을 발휘해 적이 세운 울타리를 가볍게 돌파한 뒤 장궁병들을 덮쳤다. 장궁병들은 초기에는 도끼를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적 기병대의 연이은 돌격에 결국 패퇴했다. 잉글랜드 우측 보병대 역시 롬바르드 기병대의 습격을 연이어 받은 끝에 패주했다. 이제 롬바르드 기병대가 잉글랜드 후방으로 돌아가서 돌격했다면, 잉글랜드군은 궤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롬바르드 기병대 일부는 도망치는 적을 쫓느라 전장을 이탈했고, 다른 일부는 잉글랜드군 수하물을 약탈하기 위해 수송 마차로 접근했다가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경비대와 격전을 치렀다. 한편, 카스티야 기병들은 처음부터 전장을 우회하여 잉글랜드 수하물을 약탈하려 했다가 장궁병들의 측면 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얼마 후, 적의 집중 공격을 받은 프랑스 보병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베드퍼드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추격을 받으며 베르뇌유 성채로 달아났지만, 주민들이 성문을 열어주길 거부하는 바람에 성 앞 해자에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적의 공격을 받고 살해되거나 해자에 몸을 던져 익사했다. 한편 스코틀랜드군은 솔즈베리 백작의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롬바르드 기병대에게 패퇴한 뒤 다시 전장에 돌아온 장궁병들이 측면을 공격해오자 점차 밀렸다. 여기에 프랑스군을 추격 섬멸한 뒤 귀환한 베드퍼드 공작의 잉글랜드군이 후방을 공격해오자, 스코틀랜드군은 완전히 포위되어 섬멸되었다. 롬바르드-카스티야 기병들은 경비대를 몰아내고 수하물을 약탈한 뒤 전장으로 돌아왔지만 적 궁수대의 화살 세례에 고전하다가 아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전장을 떠났다. 이리하여 베르뇌유 전투는 잉글랜드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3.1. 롬바르드 기병대의 배치 문제

리지외 주교 토마스 바쟁(1412–1491)은 롬바르드 기병대가 측면이 아니라 중군의 전방에 배치되었다고 기록한다. 이 배치는 전투 참전자인 장 드 뷔에이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그들은 앞에 많은 기병을 배치했다(et mirent ung bon nombre de gens à cheval devant eulx)." 그렇다면 이탈리아군이 측면에 배치되었다고 주장하는 다른 기록들은 패배에 대한 책임을 이탈리아인들에게 돌리고 싶어했고, 동포들의 영웅적인 노력을 이탈리아인들의 무능함과 대비하기 위해 물리적인 분리를 유지하고 싶어했을 수 있다.

롬바르드 기병대가 중앙을 돌파했다면, 뒤이은 보병대의 공격에 잉글랜드군은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롬바르드 기병대가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짐마차를 약탈하러 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기병대의 일부, 아마도 갑옷이 덜 갖춰진 보조 기병대가 궁수들의 화살 공격에 격퇴당하고 아군 보병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잉글랜드군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다.

4. 결과

베드퍼드 공작이 전투 후 브르타뉴 원정을 이끌던 토머스 램프스턴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7,262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 6,000명 중 단 40명 만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프랑스 지휘관 장 8세 다르쿠르,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등 여러 프랑스 장교들이 사살되었고,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 등 스코틀랜드 장성들도 살해되었다. 나르본 자작은 지난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을 살해한 전력이 있었기에 시신이 4등분되고 머리는 교수대에 매달리는 수모를 겪었다.

대승을 거둔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로 돌아와서 시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남부로 곧장 진격했다가 형 헨리 5세가 겪어야 했던 것처럼 적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기 보다는 메인과 앙주의 복속을 완료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후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잔존했던 도팽 샤를의 요새들이 모조리 잉글랜드군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라 이르가 이끄는 현지 프랑스군은 루아르 강 너머로 철수했다. 이후 메인과 앙주의 복속을 어느정도 완료한 잉글랜드군은 1428년 부르고뉴군과 연합한 뒤 오를레앙 공방전을 감행했다.
[1] 다수의 역사가들은 좌측면에 배치된 롬바르드인들은 마갑을 착용한 말을 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로부터 버틸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