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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41년 6월 6일 ~ 9월 19일, 프랑스군이 일드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군 최후의 거점이었던 퐁투아즈 요새를 공략한 공방전.2. 상세
1436년 4월 17일, 샤를 7세를 받드는 아르마냑파 프랑스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아르마냑파는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438년 생제르맹을 공략했고, 1439년 9월 모를 함락시켰다. 이후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은 프랑스군은 1441년 5월 초 샤를 7세의 지휘하에 대대적인 공세에 착수했다. 샤를 7세는 프랑스군 5,000명의 명목상 사령관을 맡았고, 실질적인 지휘는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맡았다.5월 8일 크레일 성채를 포위한 프랑스군은 장 뷔로의 중포 부대의 활약에 힘입어 2주 만에 성벽을 뚫었다. 크레일 사령관 윌리엄 페이토가 5월 24일 수비대를 이끌고 출격했으나 속절없이 패배하고 다음날 노르망디로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했다. 이제 프랑스군은 일드프랑스의 유일한 잉글랜드 거점이 된 퐁투아즈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의 경로를 통제했기 때문에, 파리의 물자 수송을 보장하려면 반드시 공략해야 했다.
6월 6일, 프랑스군이 퐁투아즈를 포위했다. 샤를은 모뷔송 수도원에 본부를 세웠고, 도팽 루이는 생마르랭 수도원에 자리잡았다. 장 뷔로의 포병대는 언덕에 자리를 잡은 뒤 퐁투아즈 성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프랑스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의 근거지인 루앙에서 퐁투아즈로의 보급품 수송을 저지하기 위해 센강에 루비에 요새를 세웠다. 그러나 존 드 클린턴이 지휘하는 퐁투아즈 수비대와 시민들이 요새를 철저히 경비하고 무너지려는 성벽을 재빨리 수리하는 터라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6월 중순, 잉글랜드군 사령관 존 탈보트가 이끄는 구원군이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은 야밤을 틈타 루비에 요새 수비대의 감시를 뿌리치고 퐁투아즈에 보급품과 대포를 전달했다. 이후 탈보트는 6월 16일부터 9월 5일까지 다섯 차례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퐁투아즈 시의 상류 수문을 통해 군대와 식량을 전달했다. 그의 군대가 워낙 신속하게 이동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기에, 프랑스군은 이들을 제때에 저지하지 못했다. 이에 샤를 7세는 리슈몽에게 탈보트의 군대를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7월, 요크 공작 리처드 드 플랜태저넷이 이끄는 맨앳암즈 900명과 장궁병 2,700명이 아르플뢰르에 이르렀다. 그는 첩자들을 통해 적진을 살펴본 뒤, 도팽 루이가 맡고 있는 전방의 적 진영을 공격하기보다는 우아즈 강을 도하해 샤를 7세의 진영을 공격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작전을 개시했다. 샤를 7세는 적의 접근에 놀랐지만 즉시 요격하자는 부하들의 진언을 거부하고 푸아시로 물러났다. 탈보트가 철수하는 샤를 7세의 군대를 뒤쫓아가며 여러 차례 전투를 신청했지만, 샤를 7세는 끝까지 무시했다.
이후 요크 공작은 우아즈 강을 여러 번 건너서 파리에서 포위군의 공급을 방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프랑스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들을 무찌르러 출격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일절 대응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8월 중순에 노르망디로 철수했다. 요크 공작이 물러나자, 샤를 7세는 재차 군대를 이끌고 퐁투아즈를 포위한 뒤 포격전을 재개했다. 탈보트는 프랑스군을 도발하고자 주변 농지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 흩어진 적병들을 습격할 뿐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퐁투아즈만 공격했다.
9월 15일, 피카르디 하급 귀족이었던 로베르 드 플로크스가 이끄는 소규모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와 일드프랑스의 국경도시인 에브뢰를 급습해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군의 시선이 분산되었고, 퐁투아즈에 대한 지원은 갈수록 약해졌다. 9월 16일, 프랑스군 분견대가 성벽을 뚫고 진격해 요새화된 성당을 점령하고 잉글랜드 수비병 30명 중 24명을 사살했다. 9월 19일, 프랑스군이 총공격을 가했다. 퐁투아즈 성채는 수많은 중포의 공격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수비대가 사력을 다해 저항했기에, 포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최전선에 서서 부하들을 끊임없이 격려했고, 장병들은 그런 왕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이를 악물고 돌격했다.
결국 성벽이 돌파되었고, 프랑스군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적병 400~500명을 사살하고 수비대 사령관 존 드 클린턴을 포함한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탈보트는 일이 글렀다는 것을 깨닫고 일드프랑스에 잔존한 잉글랜드 병사들을 수습한 뒤 루앙으로 철수했다. 샤를 7세는 항복이 아닌 무력으로 점령된 퐁투아즈 시의 모든 재산을 압수했고, 몸값을 지불한 존 드 클린턴과 장교 대부분을 석방했지만, 돈을 지불하지 못한 이들을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이리하여 일드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 세력이 일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