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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86년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이 주둔한 브레스트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공방전.2. 상세
브르타뉴 반도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인 브레스트는 1342년 브르타뉴 내전에 뛰어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친 잉글랜드 파벌인 몽포르파로부터 양도받은 이래로 잉글랜드군의 해군 기지로 자리잡았다. 이 곳은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사이의 통신 및 물자 수송을 보호하는 데 적절한 위치에 있었기에, 잉글랜드로서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1364년 오레 전투에서 잉글랜드 용병대의 지원에 힘입어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브르타뉴 공작에 등극한 장 4세 드 브르타뉴는 브레스트를 돌려받기를 희망했지만, 잉글랜드가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점차 프랑스 쪽으로 기울었다.1381년, 장 4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겠다고 맹세하는 대가로 브르타뉴 공작위를 보장받고 공작령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후 1386년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브레스트 공략에 착수했지만, 잉글랜드 제독 존 로체스의 분전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하다가 때마침 카스티야 왕이 되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대서양을 항해하던 곤트의 존이 도중에 브레스트를 구하러 오자 철수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던 브레스트는 1397년 3월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가 국내의 정치 불안을 만회하기 위해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려는 목적으로 2만 파운드를 배상으로 받고 장 4세에게 양도하면서 프랑스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다음에는 칼레를 양도하려 할 거라는 뜬소문이 돌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브레스트 주둔군은 런던 거리에서 자국의 영토를 프랑스에게 넘겨버린 국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반 프랑스파 귀족들 역시 시위대를 지지하며 국왕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이에 분노한 리처드 2세가 숙청을 벌이면서, 잉글랜드의 정치 혼란은 가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