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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87년 3월 24~25일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카스티야-플란데런 연합 해군을 궤멸시킨 해전.2. 상세
프랑스 왕국은 1369년 샤를 5세가 전쟁을 재개한 이래 십여 년간 승승장구하면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가 빼앗아갔던 영토 대부분을 탈환했다. 그 후 프랑스 궁정에서는 이참에 잉글랜드까지 쳐들어가서 끝장을 내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1385년 5월 장 드 비엔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1]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잉글랜드에 대항하던 스코틀랜드에 상륙했고, 그 해 겨울 스코틀랜드군 4,000명과 연합해 잉글랜드 북부 노섬벌렌드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그러나 뒤이은 잉글랜드군의 반격으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한 로우랜드 지방 대부분이 약탈당하자, 프랑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여긴 스코틀랜드는 장 드 비엔 등 프랑스 장성들을 강제로 억류한 뒤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길 정도로 격분했다. 장 드 비엔은 나중에 프랑스 왕실이 돈을 보내준 덕분에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샤를 6세 궁정이 샤를 5세 시절과는 달리 해군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자 크게 실망하여 오스만 술탄국에 맞서 십자군을 결성한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에 가담했다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1386년 10월,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자국을 공격한 프랑스에 응징하기 위해 프랑스의 속국인 플란데런 백국에 상륙할 병력과 선박을 모으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들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와 수년간 전쟁을 치렀다가 1385년 투르네 협약을 맺고 그에게 귀순한 플란데런인들이 필리프 2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잉글랜드군이 상륙하면 즉시 호응하여 친잉글랜드 정권을 세우리라 기대했다. 함대 사령관으로는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이 선임되었다.
1387년 3월 16일, 아룬델 백작은 센드위치 항에서 60척의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프랑스 함대와 카스티야 함대가 지난 가을부터 슬로이스 항에 3만 명의 군대와 1,200척의 함대를 집결시키고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이들을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사실 그 계획은 부르고뉴 공작이자 샤를 6세 궁정의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필리프 2세가 갑작스런 병환에 걸리는 바람에 취소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선박이 슬로이스에 머물면서 무역 선박을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387년 3월 24일 출항한 아룬델 백작의 잉글랜드 함대는 얼마 후 마게이트 앞바다에서 플란데런 선박과 카스티야 선박 분견대가 포함된 프랑스 함대가 호송하는 와인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잉글랜드 함대가 이들을 향해 달려들자, 수많은 플란데런 선박이 도주했고 다른 선박들은 맞서 싸우려 했으나 이내 압도되어 슬로이스 항으로 패주했다. 아룬델 백작은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한 끝에 3월 25일 슬로이스 항구 인근 카잔트 섬 앞바다에서 적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후 슬로이스 항구 외곽 정박지에 세워진 7척의 배를 추가로 노획하고 슬로이스 항구에 정박한 적선 11척을 불태우거나 침몰시켰다.
그 후 잉글랜드 함대는 슬로이스 항을 2주 이상 봉쇄하면서 항구에 접근하는 선박들의 물품을 탈취하거나 선박 자체를 나포했다. 하지만 아룬델 백작은 항구를 점령하는 대신 해변에 육군을 상륙시킨 후 해안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몸값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이들을 포로로 삼았다. 그러나 플란데런인들이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를 상대로 봉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항구를 봉쇄한 잉글랜드군 내에서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이가 죽어가자 잉글랜드로 귀환하기로 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이 원정에서 수십척의 적선을 침몰시키거나 불태웠고, 무거운 짐을 실은 카스티야 선박 3척을 포함해 68척의 선박을 나포했다. 이렇듯 해군이 많은 손실을 보자, 프랑스 왕실은 잉글랜드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완전히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