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주바호타 전투 포르투갈어: Batalha de Aljubarrota 스페인어: Batalla de Aljubarrota | ||
시기 | 1385년 8월 14일 | |
장소 | 포르투갈 왕국 칼바리아 드 시마 지방 알주바호타 | |
원인 | 주앙 1세의 포르투갈 왕위 계승에 대한 후안 1세의 반발. | |
교전국 | 포르투갈 왕국 | 카스티야 연합 왕국 |
지휘관 | 주앙 1세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 | 후안 1세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 |
병력 | 7,500명 | 32,000명 |
피해 | 1,000명 | 5,000명. 철수 도중 5,000명 추가 손실. |
결과 | 포르투갈 왕국의 승리. | |
영향 | 주앙 1세의 포르투갈 왕위 공고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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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85년 8월 14일, 포르투갈 왕국 칼바리아 드 시마 지방 알주바호타에서 발발한 전투.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후안 1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놓고 맞붙은 대규모 야전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도움을 받은 주앙 1세가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은 후안 1세를 격파하고 포르투갈 왕위를 공고히 했다.
2. 배경
1382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는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연합해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벌인 전쟁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접촉해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양국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외동딸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국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1383년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한 뒤, 페르난두 1세의 외동딸인 베아트리스가 포르투갈 여왕이 되었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가 섭정을 맡았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왕이자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후안 1세는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포르투갈 전임 국왕 페드루 1세의 사생아이자 아비스 기사단장인 주앙은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1383년 12월 6일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 알바로 파이스 등을 포함한 공모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했다. 리스본 시민들은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아녜스의 아들인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했다.
그 후 레오노르는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후안 1세는 아내 베아트리스와 함께 친정을 나서 산타렝으로 진군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후안 1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카스티야 전역에서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 장차 반란군의 중심지인 리스본을 공략하려 했다. 주앙은 이에 맞서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에게 국경 수비를 맡기는 한편, 사절 2명을 런던으로 파견해 잉글랜드 실권자인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384년 4월 6일, 포르투갈군 1,400명을 이끌고 진군하던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끄는 카스티야군 5,000명과 마주쳤다. 이후 벌어진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카스티야군은 방어 대형을 결성한 적을 얕보고 무작정 돌진했다가 누누의 지휘를 받은 적 창병대의 결사적인 항전과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누누는 적을 온종일 추격해 많은 적병을 사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후안 1세는 갈리시아 대귀족 페드로 루이즈 사르미엔토에게 갈리시아 방면 카스티야군을 소집해 리스본으로 남하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후 대규모 병력을 확보한 후안 1세가 1384년 5월 리스본으로 진군해 육지와 해상 모두 봉쇄했다.(리스본 공방전) 그러나 리스본 공략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고,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카스티야에 충성하는 도시들을 습격하고 침략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한편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17세의 리처드 2세를 대신해 국정을 주관하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은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지원한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1384년 7월 18일, 루이스 페헤이라 제독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테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과 격돌했다. 루이스 페헤이라는 이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포르투갈 함대는 적의 해상 봉쇄를 뚫고 리스본에 도착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귀중한 보급품을 전달했다. 후안 1세는 이후에도 리스본을 계속 포위했지만,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보급로를 교란하면서 보급품이 부족해지고 진영에 페스트가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9월 3일에 봉쇄를 풀고 카스티야로 철수했다.
카스티야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했지만, 포르투갈 북부의 도시 및 성채에 카스티야군을 배치했다. 하지만 주앙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반격을 준비했다. 우선 곤트의 존이 주앙의 구원 요청에 응해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잉글랜드 병사 600명을 포르투갈에 파견했다. 이들은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1385년 4월 6일, 주앙은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귀족, 성직자, 시민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로 즉위했다. 이후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를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고 카스티야군에 넘어간 지역을 모조리 탈환하게 했다.
반역 수괴로 간주하던 주앙 1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한 후안 1세는 격분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비제우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질렀지만, 1385년 5월 29일 트랑코소 전투에서 대패해 지휘관 7명 중 6명이 사망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후안 1세는 1385년 6월에 대군을 일으켜 셀로리코 다 베이라에서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이르는 포르투갈 중북부로 진격했다. 원정군 규모는 32,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엔 프랑스에서 파견된 중기병 2,000명도 있었다. 후안 1세의 목표는 리스본을 비롯한 포르투갈 중심부를 관통해 포르투갈을 남북으로 절단하여 저항할 여지를 없애는 것이었다.
후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포르투갈 진영은 아브란테스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어찌할 지 논의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번 침략군은 너무 강하니 잉글랜드 지원군이 추가로 도착할 때까지 리스본에서 농성하면서, 별동대를 세비야로 파견해 적군을 유인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총사령관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리스본이 지난해 공방전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또다시 공방전을 치르면 함락을 피할 수 없으므로,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선점한 뒤 야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앙 1세는 누누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여겼지만 즉시 결정하지 않았다. 이에 누누는 호위 부대를 이끌고 토마르로 떠났다. 주앙 1세는 그에게 아브란테스로 돌아오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누누는 거절하고 토마르에 가서 왕을 기다렸다. 이에 주앙 1세는 토마르로 달려가서 그와 합류했고, 두 사람은 정찰병들을 파견해 카스티야군의 행방을 살펴보게 했다.
3. 경과
1385년 8월 중순, 포르투갈 정찰병들이 카스티야군이 레이리아를 향해 느린 속도로 행군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주앙 1세에게 보고했다. 누누는 주앙 1세로부터 전투 장소를 선택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신중히 살펴본 끝에, 알주바호타 마을 인근의 상 조제(São Jorge) 언덕에 군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그곳은 개울로 둘러싸였고, 정상은 평평했으며, 북쪽은 가파르고 남쪽은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8월 14일 오전 10시쯤, 포르투갈군은 카스티야군이 곧 나타날 길을 바라보는 이 언덕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 하마 기병과 보병이 중앙에 배치되었고, 궁수가 측면에 배치되었으며, 후방에는 주앙 1세가 직접 지휘하는 예비대가 배치되었다. 포르투갈군 앞에는 개울과 가파른 경사면이 있었다.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포르투갈군 총병력은 7,500명이었다고 한다.8월 14일 정오 무렵, 카스티야 선봉대가 전장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 포르투갈군이 언덕 위에 진을 친 걸 확인한 뒤 후안 1세에게 보고했다. 후안 1세는 적군이 매우 강력한 방어 진형을 갖춘 걸 보고, 즉각 공격하는 대신 언덕을 돌아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카스티야군은 포르투갈군이 정상에 자리잡은 언덕을 따라 천천히 이동해, 경사가 좀더 완만한 언덕 남쪽으로 향했다. 누누는 언덕 정상에서 적군의 행보를 살펴본 후, 군대를 신속히 언덕 남쪽 경사면에 배치했다. 언덕 남쪽은 북쪽에 비해 경사면이 완만해, 카스티야와 프랑스의 강력한 중기병이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누누는 중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마름쇠와 말뚝을 잔뜩 깔도록 했고, 참호도 여러 개 팠다.
오후 6시경, 카스티야군은 언덕 남쪽에 집결을 완료했다. 카스티야 장군들은 후안 1세에게 아군이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오래도록 행군하느라 몹시 지쳤으니,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전투를 개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 기사들은 포르투갈군 대부분이 갑옷조차 제대로 없어서 한 벌을 나눠입는 징집병일 뿐이니 단 한 번의 돌격으로 섬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카스티야 귀족과 프랑스 기사들이 서로를 비방하면서 분란이 벌어졌는데, 후안 1세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췄고 용맹하기로 이름난 프랑스 기사들의 편을 들어 즉시 공격하기로 했다.
프랑스 기병 2,000명은 완만한 언덕 남쪽 경사로를 따라 정상에 포진한 포르투갈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름쇠, 말뚝, 참호 등 온갖 장애물에 가로막힌 데다 경사로가 상당히 좁았고, 측면에서 적 궁수대가 말을 향해 퍼부으면서 수많은 기사가 삽시간에 낙마해 중상을 입었다. 그래도 프랑스 기사들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 계속 돌격해 적군과 맞붙었지만, 포르투갈 창병대의 강력한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 동안 후방에 있던 카스티야군의 지원은 늦어졌다. 장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카스티야 귀족들은 프랑스 기사들의 오만한 태도에 화가 나 "그들이 전투를 시작하고 스스로 지치게 놔두자"라고 결의하고, 후안 1세의 지원 독촉을 무시하고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 기사들은 궤멸되어 대부분이 죽거나 생포되어 후방으로 이송되었다.
프랑스 기사들이 궤멸된 직후, 카스티야군이 곧장 진격했다. 그러나 진군 과정에서 진형이 흐트러지는 걸 제때에 바로잡지 못했고, 측면을 보호하는 두 개울 사이의 공간이 비좁아서 이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한편, 주앙 1세는 처음에는 프랑스 기사들의 몸값을 받아내려 했지만, 카스티야군이 돌격해오자 포로 교섭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미 스스로 몸값을 지불한 일부를 제외한 모든 포로를 처형했다. 그 후 궁수대는 후방으로 물러났고, 누누의 선봉대는 두 부대로 나뉘어 양 측면에 포진했으며, 주앙 1세가 이끄는 예비대가 중앙 대열에 배치되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는 매우 격렬했다. 카스티야군은 길이 무척 좁고 장애물이 잔뜩 깔린 데다 적 궁수대가 화살을 퍼붓는 와중에도 압도적인 병력을 앞세워 꾸역꾸역 밀어붙였고, 포르투갈군은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선점한 걸 살려 사력을 다해 항전했다. 주앙 1세는 최전선에서 폴액스를 휘둘러 적병 서너명을 몸소 쳐죽였다고 전해진다. 카스티야군은 축차투입을 반복했지만 좀처럼 포르투갈군의 전열을 뚫지 못했고, 일부 카스티야 중기병이 포르투갈 전선의 측면을 공격하려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일몰 무렵, 카스티야 국왕의 기수가 쓰러지자,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카스티야 후방 부대는 왕이 죽었다고 여기고 공황 상태에 빠져 패주했다. 이 공황은 곧 카스티야군 전체로 빠르게 확산되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포르투갈군은 그들을 추격해 모조리 살육했다.
4. 결과
알주바호타 전투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재앙이었다. 포르투갈군은 이 전투에서 천 여명의 사상자를 입은 반면, 카스티야군은 5,000명을 상실했으며, 포르투갈 구호 기사단 그랜드 마스터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 카스티야 제독 후안 페르난데스 데 토바르, 카스티야 원수 디에고 고메스 사르미엔토, 히타와 부이트라고 영주 페드로 곤잘레스 데 멘도사, 후안 1세의 사촌인 후안 텔레즈 데 카스티야, 트레비뇨 백작 디에고 고메즈 만리케 데 라라, 바르셀로스 백작이자 포르투갈 제독으로서 후안 1세 편에 섰던 후안 알폰소 테요, 카메로스 영주 후안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 엘 모조, 카스티야 무관장 페드로 데 아라곤 등 주요 인사들이 대거 전사했다. 게다가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5,000명을 추가로 상실했다.주앙 1세는 이 결정적인 승리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으며, 아비스 왕조의 시조로 자리잡았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의 전쟁은 1411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카스티야군이 포르투갈 왕국 영내로 쳐들어가는 일은 주앙 1세의 치세 동안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가호로 자신이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하며, 이를 기리기 위해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전투 현장에 세우도록 했다. 이 수도원이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탈랴[1] 수도원이다.
1385년, 포르투갈, 잉글랜드 양국은 페르난두 1세 시기인 1373년 체결한 잉글랜드-포르투갈 조약[2]을 새롭게 윈저 조약(1386년)으로 갱신해 현존 가장 오래된 잉포 동맹을 재확인했다. 주앙 1세는 리처드 2세의 사촌이자 선대왕 에드워드 3세의 손녀 랭커스터의 필리파를 왕비로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