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01:51:06

주앙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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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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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포르투갈의 공영방송국(RTP)이 포르투갈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 100명'을 선정. 단, 중복 투표가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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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쿠 사 카르네이루 조르제 누누 핀투 다 코스타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 주앙 페레이라 드 알메이다 주제 무리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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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루 카에타누 페드루 누네스 안토니우 비에이라 플로르벨라 이스팡카 페르디난드 마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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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지 루르드 핀타실구 주앙 1세 소피아 드 멜로 브레이네르 안드레센 안토니아 페레이라 파더 아메리쿠
41위42위43위44위45위
안토니우 다마지우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마누엘 1세 주제 사라마구 아라곤의 이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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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테스 지 알메이다 알베르투 주앙 자르딩 알마다 네그레이루스 바스쿠 곤살베스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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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미로 데 아제비로 수사 마르틴스 마리아 두 카르모 세아브라 안토니우 안드라지 카를루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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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자 비제우의 엘레노르 호자 모타 안토니우 테익세이라 레벨로 아폰수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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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2세 카를루스 로페스 아폰수 코스타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 가구 코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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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르두 아라우주 페레이라 마누엘 소브리뉴 시몽이스 마누에우 마리아 바르보자 드 보카주 헬리오 페스타나 조르주 삼파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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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샹팔리모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질 비센트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미겔 토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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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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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초대 국왕
주앙 1세
João I
파일:Anoniem_-_Koning_Johan_I_van_Portugal_(1450-1500)_-_Lissabon_Museu_Nacional_de_Arte_Antiga_19-10-2010_16-12-61.jpg
출생 1357년 4월 11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 1433년 8월 14일 (향년 76세)[1]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왕
1385년 4월 6일 ~ 1433년 8월 14일
배우자 랭커스터의 필리파 (1387년 결혼 / 1415년 사망)
자녀 아폰수 1세(사생아), 베아트리스(사생아), 두아르트 1세, 페드루, 엔히크, 이자벨, 주앙, 페르난두
아버지 페드루 1세
어머니 테레사 로렌수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주앙 1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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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초대 국왕. 별칭은 '좋게 기억되는 왕(o de Boa Memória)'이다.

2. 생애

1357년 4월 11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왕자 페드루와 테레사 로렌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테레사 로렌수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일부 기록에서는 리스본 상인 로렌코 마르틴스가 그녀의 아버지라고 주장했고, 다른 기록에서는 페드루 왕자의 정부였던 이녜스의 측근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기술했다. 어린 시절 리스본 상인 공동체에서 양육되었고, 1364년 페드루 1세에 의해 아비스 기사단장으로 선임된 뒤[2] 리스본 수비대장인 페르낭 로드리게스 데 세케이라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는 때때로 궁정을 방문해 이복 형제이자 페드루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아들인 주앙 왕자와 우정을 쌓았다.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1세의 외동딸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 텔레스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10월 22일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 그의 미망인인 레오노르는 사전에 맺은 조약에 근거해 딸과 사위의 이름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여기에 레오노르의 연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가 재상으로 선임되었다. 후안 1세는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몬탈반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일전에 페르난두 1세와 레오노르의 결혼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차별 학살을 당했던 리스본 민중은 레오노르를 섭정으로 받들고 싶어하지 않았고, 상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해 백성들을 선동했다.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주앙 1세는 1383년 12월 6일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 알바로 파이스 등을 포함한 공모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했다. 리스본 시민들은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아녜스의 아들인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했다.

레오노르는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격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4월 6일 아톨레이오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장군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와 포르투갈 귀족 페드로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반란군과 처음으로 맞붙었다. 카스티야 기병대는 이 전투에서 정사각형 방진을 세운 적군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1384년 5월, 후안 1세는 군대를 정비한 뒤 리스본으로 진격해 육지와 해상 모두 봉쇄했다. 그러나 리스본 공략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고,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카스티야에 충성하는 도시들을 습격하고 침략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한편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17세의 리처드 2세를 대신해 국정을 주관하던 랭커스터 1대 공작 곤트의 존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지원한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1384년 7월 18일, 루이스 페레이라 제독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테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과 격돌했다. 루이스 페레이라는 이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포르투갈 함대는 적의 해상 봉쇄를 뚫고 리스본에 도착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귀중한 보급품을 전달했다. 후안 1세는 이후에도 리스본을 계속 포위했지만,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가 보급로를 교란하면서 보급품이 부족해지고 진영에 페스트가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9월 3일에 봉쇄를 풀고 카스티야로 철수했다. 그렇지만 리스본 외 다수의 포르투갈 지역은 카스티야군에게 넘어갔다.

1385년 4월 6일,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귀족, 성직자, 시민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를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고 카스티야군에 넘어간 지역을 모조리 탈환하게 했다. 여기에 잉글랜드군 600명이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이들 전원이 백년 전쟁에서 활약한 베테랑으로,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후안 1세는 주앙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비세우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질렀지만, 1385년 5월 29일 트랑코소 전투에서 대패해 지휘관 7명 중 6명이 사망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후안 1세는 6월에 대군을 일으켜 셀로리코 다 베이라에서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이르는 포르투갈 중북부로 진격했다. 원정군 규모는 32,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엔 프랑스 중기병들도 있었다. 주앙 1세와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이에 맞서 6,5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토마르 시에 집결했다. 이후 적을 어찌 맞서 싸울 지 논의한 끝에, 리스본에서 또다시 농성한다면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우니 알주바호타 마을 인근에서 적을 물리치기로 결의했다.

1385년 8월 14일,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매우 느린 속도로 진군하던 카스티야군은 알주바호타 고지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을 발견했다. 후안 1세는 즉각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무더운 날씨에 오래도록 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과 장병들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시원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전면에 마름쇠 등 대기병 방어 구조물을 세우고 장궁병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적 기병대를 물리쳤다. 카스티야군은 축차투입을 반복해봤지만 하루종일 적의 전열을 뚫지 못하다가 제풀에 지쳐 퇴각했다. 이에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카스티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이 천 명 이하의 손실을 입은 것에 비해, 카스티야군은 5천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카스티야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5,000명을 추가로 상실했다.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는 여세를 이어가 1385년 10월 카스티야 영토에 있는 메리다를 공격했고, 발베르데 전투에서 카스티야군 2만 명을 격파하고 적장 페드로 무네스 데 고도이 이 산도발을 주살했다. 그 후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 위해 갈리시아에 상륙한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카스티야 왕국군이 존과 맞서느라 포르투갈 왕국에 원정군을 파견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1396년, 카스티야 왕국이 어린 국왕 엔리케 3세의 등극 이래로 귀족들간의 전횡과 내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바다호스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엔리케 3세는 귀족들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은 뒤 바다호스 요새에 구원군을 파견하는 한편 카스티야 함대에 포르투갈 해안을 공격하고 포르투갈 선박들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바다호스 포위를 중단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한 그는 엔리케 3세가 어리고 병약하지만 절대로 만만한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그 결과 1402년 8월 15일 세고비야에서 10년간의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고, 1411년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받고 양국의 경계를 확정짓는 아일론 협약이 체결되었다.

카스티야 왕국과의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북아프리카로 눈길을 돌렸다. 1415년 7월 25일 아들 인판트 동 엔히크와 함께 19,000명 가량의 포르투갈, 잉글랜드, 갈리시아, 바스크 기사와 군인으로 구성된 병력과 59척의 갤리선, 33척의 전투선, 120척의 소형 선박을 이끌고 세우타 공략에 착수했다. 8월 21일 세우타에 상륙한 원정군은 포르투갈군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비대를 손쉽게 제압하고 8월 22일 아침에 세우타 전역을 장악했다. 세우타에 세워진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하고 아내 필리파의 고해사제인 아이마르 다우릴라크를 세우타의 첫번째 주교로 임명했다.

이후 3천 명의 장병에게 세우타 수비를 맡긴 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전 유럽에 자신의 승리를 널리 알렸다. 마린 왕조 칼리파 우스만 3세는 1418년과 1419년에 세우타 수복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세우타는 시간이 지나면서 포르투갈 사략선들이 살레에서 그라나다와 튀니스까지 무슬림 선박들을 습격하는 주요 기지로 자리잡았으며, 기독교 측 함선들은 이와 반대로 지브롤터 해협에서의 항해를 보다 안전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들 엔히크의 해상 탐험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카나리아 제도, 포르투 산투,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를 발견하고 그 일대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확장 정책은 포르투갈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백성들은 처음엔 승리를 거듭하는 왕에게 열광했지만,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된 막대한 세금에 허덕이자 차츰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적진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세우타를 유지하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상당한 재원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코르테스를 자주 개최해 귀족과 상인들을 압박하여 기부금을 받아냈고, 장남 두아르트에게 법률 집행과 재정 관리를 맡겼다.

당대 작가들은 주앙 1세를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자애롭고 친절한 태도를 지닌 재치있는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특히 지식이 풍부했고 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지식과 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후대의 포르투갈 역사가들에 의해 "저명한 세대"(Ínclita Geração)라고 불리는 그의 아들들에게 이어졌다. 장남 두아르트는 시인이자 작가였고, 코임브라 공작 페드로는 당대 왕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비세우 공작 인판트 동 엔히크는 해상 탐험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고 과학 기술에 과감히 투자했다. 딸 이자벨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한 뒤 포르투갈의 세련된 문화를 남편에게 소개했다.

1433년 8월 14일, 역대 포르투갈 국왕들 중에서 가장 긴 48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리스본에서 사망했다. 사후 장남 두아르트 1세가 포르투갈 국왕에 옹립되었다.

3. 가족 관계

  • 랭커스터의 필리파(1360 ~ 1415):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딸
    • 브랑카(1388 ~ 1389): 요절.
    • 아폰수(1390 ~ 1400): 요절
    • 두아르트 1세(1391 ~ 1436): 포르투갈 국왕.
    • 페드루(1392 ~ 1449): 코임브라 공작. 가터 기사단의 기사. 당대 왕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갖췄다는 평을 받는 인물. 두아르트 1세의 아들 아폰수 5세의 섭정을 맡다가 아폰수 5세의 측근들에 의해 정치에서 배제되자 내전을 벌이다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전사함.
    • 인판트 동 엔히크(1394 ~ 1460): 비세우 공작. 일명 '항해 왕자'(o Navegador)
    • 이자벨(1397 ~ 1471):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부인.
    • 주앙(1400 ~ 1442): 산티아고 기사단장
    • 페르난두(1402 ~ 1443): 1437년 형 엔히크의 북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다가 마린 왕조군에게 사로잡힌 뒤 페즈에서 포로로 지내다 1443년에 옥사함.
  • 사생아
    • 아폰수 1세(1377 ~ 1461): 제1대 브라간사 공작. 훗날의 브라간사 왕조는 그의 후손.
    • 브랑카(1378 ~ 1379): 요절.
    • 베아트리스(1382 ~ 1439): 제12대 아룬델 백작 토머스 피츠앨런과 초혼, 2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와 재혼.

[1] 시대를 감안하면 굉장히 장수한 셈이다.[2] 여기서 왕조명이 유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