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01:49:41

산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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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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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4대 국왕
산슈 2세
Sancho II
파일:Sancho_II_of_Portugal_–_Juan_Caramuel's_'Philippus_Prudens'.jpg
출생 1209년 9월 8일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사망 1248년 1월 4일 (향년 38세)
카스티야 왕국 톨레도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1223년 3월 26일 ~ 1247년 12월 4일
배우자 멘시아 로페스 데 아로 (1240년 결혼)
아버지 아폰수 2세
어머니 카스티야의 우라카
형제 아폰수 3세, 레오노르, 페르난두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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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4대 국왕.

2. 생애

1209년 9월 8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의 딸 우라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아폰수 3세, 레오노르, 페르난두가 있었다. 1223년 3월 26일 아버지 아폰수 2세가 사망한 뒤 포르투갈 왕국의 새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당시 산슈 2세가 처한 왕국의 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아폰수 2세의 누이 테레사, 산샤, 마팔다는 부친 산슈 1세가 자신들에게 물려준 몽테모로벨호, 세이아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심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가로채고 보상으로 주기로 했던 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아폰수 2세의 행위에 불만을 품었다. 특히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수 9세의 왕비였던 테레사는 남편의 후원에 힘입어 상당수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삼아 포르투갈 왕실을 압박했다.

2.1. 재위

갓 왕위에 오른 산슈 2세는 이모들과의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로 하고, 산슈 1세가 그녀들에게 물려줬지만 아폰수 2세가 가로챘던 모든 영지를 돌려줬다. 여기에 산슈 1세가 유언장에서 영지를 물려주라고 언급하지 않았던 또다른 왕녀 브랑카 역시 몽테모어와 에스게이라 일대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또한 이들은 연간 4,000모라비타에 달하는 연금을 받을 수 있었고, 토레스 베드라스 일대에 대한 지분을 일정 부분 소유했다.

산슈 2세는 아버지 아폰수 2세가 교회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후유증 역시 수습해야 했다. 아폰수 2세는 생전에 너무 많은 특권이 교회에 넘어가서 나라를 운영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성직자들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교회 수입 일부를 국가 공익 목적에 사용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성직자들이 교황청에 직소했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아폰수 2세에게 조부가 교황청에 맹세한 대로 따르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아폰수 2세는 교황에게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다가 파문당한 채 사망하여 한동안 가매장되었다.

산슈 2세는 아버지의 교회 규제 정책을 중단하고 다시는 성직자들에게 제약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포르투갈 사제들은 왕의 요청에 따라 아폰수 2세를 알코비사 수도원에 안장하기로 했다. 그 후 산슈 2세는 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등한시했던 레콩키스타를 직접 이끌었다. 그 결과 그의 치세에 베자, 알가르베, 알렌테호 등 남부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무슬림으로부터 공략했다. 그는 이 영토를 산티아고 기사단 등 여러 기사단에게 맡겨서 무슬림과의 전쟁을 자발적으로 치르게 했다.

그러나 산슈 2세가 1226 ~ 1228년 엘바스 공략전에서 실패한 뒤 내륙 진출을 포기하고 해안 도시 포르투로 관심을 돌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포르투는 테레사 데 레온으로부터 자유시로 인정받은 이래 포르투갈 왕국에서 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도시로서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수행했다. 하지만 잦은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고 싶었던 산슈 2세는 관례를 무시하고 포르투를 국왕의 직할도시로 삼고 세금 징수원들을 잇따라 파견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 대상인들의 왕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었다.

또한 산슈 2세는 재위 첫해에 성직자들과 맺었던 약속과는 달리 특권을 보장하지 않고 십일조 역시 납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폰수 2세의 교회 규제 정책을 재개해 교회 수입 일부를 국고로 돌리고 상당수의 특권을 회수했다. 성직자들이 이에 반발해 교황청에 잇따라 직소하자,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협상해 1232년 교황으로부터 무슬림과의 전쟁을 지속한다면 성좌를 모욕하지 않는 한 파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그는 성직자들과 노골적으로 대립했다. 급기야 1232년 6월 산슈 2세가 성직자들을 "손과 몽둥이"로 폭행했다는 보고가 교황청에 전해지자, 교황청은 교황 특사를 포르투갈로 파견했다. 1234년 8월 16일, 교황 특사가 주관한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의 종교 재판에서. 산슈 2세는 파문당했고 포르투갈에서의 성무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산슈 2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책을 이어갔다.

1140년, 산슈 2세는 아로의 로페 디아즈 2세와 알폰수 9세사생아인 우라카의 딸인 멘시아 로페스 데 아로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성직자들은 멘시아의 외할아버지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 왕비 우라카의 아들인 점을 근거로 근친 관계이니 교회법에 위반된다고 비판했고, 포르투갈 귀족들은 카스티야 귀족의 미망인인 그녀가 왕비가 되는 것은 격에 맞지 않고 그녀의 친족들이 요직을 차지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불만을 품었다.

1245년 7월 24일과 8월 1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 공의회에서 2개의 교령을 발표했다. 하나는 포르투갈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교황은 이 교령에서 성직자들과 교회를 부당하게 대하고 그릇된 결혼을 감행한 산슈 2세는 기독교 군주로 인정할 수 없으니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이에 다수의 포르투갈 귀족과 성직자들은 당시 볼로뉴 백작을 맡고 있던 산슈 2세의 동생 아폰수 3세를 새 국왕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아폰수 3세는 파리에서 포르투갈 귀족,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그들의 특권과 관습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 왕국에 반납하고 포르투갈로 진격해 1245년 연말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산타렘, 알렌케르, 토레스 노바스, 토마르, 알코바사, 레이리아 등지가 아폰수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산슈 2세는 오직 코임브라와 코빌량, 구아르다 등지에서만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산슈 2세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의 장남 알폰소가 1246년 초 포르투갈 왕국으로 진군해 레이리아 일대를 파괴하고 1247년 1월 13일 아폰수 3세와 레이리아 인근에서 맞붙어 승리했다.

그러나 알폰소 왕자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산슈 2세의 입지는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급기야 멘시아 왕비가 라이문도 비에가스 데 포르토카레이루라는 귀족에게 납치되어 오랭으로 이송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산슈 2세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오랭으로 달려가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지만, 수비대는 그를 조롱하며 화살 몇 발을 날렸다. 그는 며칠간 오랭을 포위했지만 공략할 가망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멘시아가 오랭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치안판사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납치'는 산슈 2세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멘시아가 산슈 2세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벌인 자작극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아내마저 빼앗겨버리자 절망에 빠진 산슈 2세는 1247년 12월 4일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의 호위를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으로 망명했고, 1248년 1월 4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사후 톨레도 대성당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