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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2대 국왕 산슈 1세 Sancho I | |
출생 | 1154년 11월 11일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
사망 | 1211년 3월 26일 (향년 56세)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
1185년 12월 6일 ~ 1211년 3월 26일 | |
배우자 | 아라곤의 둘세 (1174년 결혼 / 1198년 사망) |
자녀 | 테레사, 산샤, 아폰수 2세, 페드루, 페르난두, 마팔다, 브랑카, 베렝가리아 등 |
아버지 | 아폰수 1세 |
어머니 | 사보이아의 마팔다 |
형제 | 우라카, 테레사, 마팔다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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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2대 국왕. 치세 동안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이주민들을 정착시켰기에 '이민왕(Povoador)'이라는 별명이 붙었다.2. 생애
2.1. 즉위 전
1154년 11월 11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초대 국왕 아폰수 1세와 사보이아 백국의 백작 아메데오 3세의 딸 마팔다[1]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남자 형제 2명(페르난두 아폰수, 엔리케)은 유년기 때 사망했고, 여자 형제로 우라카[2], 테레사[3], 마팔다[4]가 있었다.1166년, 산슈 1세는 아버지 아폰수 1세의 명령에 따라 레온 왕국에 속한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1169년 아버지 아폰수 1세가 레온 국왕 페르난두 2세와의 바다호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혔다가 1년만인 1170년 8월 15일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여파로 건강이 나빠졌기에, 그와 누나 테레사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통치를 대행했다. 1173년, 아폰수는 산슈 1세와 테레사를 공동 상속인으로 삼고, 산슈에게 후손이 없다면 테레사가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는 협약을 맺었다. 1174년, 산슈 1세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의 누이인 둘세와 결혼했다.
1174년 질병이 악화된 아폰수 1세가 시골에서 요양하면서,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섭정을 맡았다. 테레사는 행정 업무를 맡았고, 산슈 1세는 전쟁 수행을 맡았다. 1178년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카스티야 방면으로 진군해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를 공격한 틈을 타 갈리시아를 공격하여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세비야와 과달키바르 강 인근에서 무와히드 왕조를 공격해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1184년 테레사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와 결혼해 포르투갈 왕국을 떠나면서, 그가 단독 섭정이 되었다.
2.2. 즉위
1185년 12월 6일 아폰수 1세가 76세의 나이로 코임브라에서 사망한 뒤 포르투갈의 2번째 국왕이 되었다. 1188년 1월 말 페르난두 2세가 사망하고 알폰수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어수선해진 레온 왕국을 공격해 갈리시아의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당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알폰수 9세는 포르투갈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산슈 1세와 만나 평화 협약을 맺고 산슈 1세의 딸 테레사와 결혼했다.이리하여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끝낸 산슈 1세는 레콩키스타에 몰두했다. 1189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의 함대의 도움을 받아 포르투갈 남부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인 실베스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반격을 가해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습격해 여자, 아이 3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쿱 알 만수르는 1190년 포르투갈 남부를 공격해 토마르를 포위했다가 성전 기사단에게 후미를 격파당한 데다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인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산슈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1191년, 무와히드 왕조의 별동대가 포르투갈 왕국에 침입해 산슈 1세가 확보했던 실베스를 도로 공략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알폰소 8세가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가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이 역효과를 초래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알폰수 9세가 근친상간을 범하여 교회법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이교도와 손잡기까지 했다며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산슈 1세는 레온 왕국과 동맹을 끊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투이와 폰테베드라를 공략했다.
산슈 1세는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새 왕국의 정치 및 행정 조직에 쏟아부었다. 그는 국고를 축적하고 중산층 상인들을 지원해 상업을 키우고자 했으며, 구베이아(1186년), 비세우(1187년), 브라간사(1187년), 상 비센테 데 베이라(1195년), 벨몬테(1199년) 등 여러 신도시를 포르투갈 남부 지역에 짓고 포르투갈 북부의 외딴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과 부르고뉴, 가스코뉴 등 프랑스 이주민들을 모집해 이곳에 정착시켰다. 또한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으며,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포르투갈 학생들에게 국비를 지원해주는 등 포르투갈 유학생들이 유럽 대학에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줬다.
산슈 1세는 1188/1189년경에 둘세 왕비가 알렌케르, 보우가, 산타마리아다페이라, 포르투 일대의 수입을 가질 수 있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후 죽기 2년 전인 1209년 10월에 두 번째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딸 마팔다, 테레사, 산샤는 여왕의 칭호를 받고 몽테모로벨호, 세이아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심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다스릴 수 있었고, 그의 아들 아폰수 2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이후 1211년 3월 26일 코임브라에서 사망하여 코임브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아폰수 2세가 아버지의 유언에 불복하여 누이들의 영지로 지명된 영토를 강제로 빼앗고 형제들을 축출해 중앙 집권화 정책을 펼치려 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혼란에 빠졌다.
3. 가족 관계
- 둘세(1160 ~ 1198): 아라곤 여왕 페이로넬라와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의 딸.
- 테레사(1175/76 ~ 1250):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수 9세의 왕비.
- 산샤(1180 ~ 1229): 평생 수녀로 지냄.
- 콘스탄사(1182 ~ 1186 이전): 요절
- 아폰수 2세(1185 ~ 1223): 포르투갈 왕국 3대 국왕.
- 페드루(1187 ~ 1258): 아폰수 2세와의 권력 분쟁에서 밀려나 레온 왕국으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우르헬 백작, 마요르카 국왕이 됨.
- 페르난두(1188 ~ 1233): 아폰수 2세와의 권력 분쟁에서 밀려나 프랑스로 망명했다가 아폰수 1세의 딸이자 부르고뉴 공작 부인을 칭하고 있던 테레사의 중재하에 플랑드르 백작부인 잔과 결혼하여 플랑드르 백작이 됨.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 불로뉴 백작 르노 1세 등과 손잡고 1214년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와 맞붙었다가 참패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1226년에야 겨우 풀려남.
- 엔히크(1189 ~ 1191): 요절
- 라이문도(1195 ~ ?): 요절
- 마팔다(1195/1196 ~ 1256): 1215년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1세와 약혼했지만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근친 관계를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고받은 뒤 아루카의 시토회의 설립자이자 첫 수녀원장이 됨.
- 브랑카(1196/1198 ~ 1240): 과달라하라 수도원의 수녀.
- 베렝가리아(1196/1198 ~ 1221):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2세의 왕비.
- 사생아
- 마르팀 산체스 드 포르투갈(1175년 이전 ~ 1228): 아폰수 2세의 숙청을 피해 레온 왕국으로 망명하여 레온 장군 중 하나가 되어 무슬림과 포르투갈을 상대하는 원정에 참여함.
- 우라카 산체스(1175년 이전 ~ ?): 포르투갈 귀족 로렌소 소아레스 데 리바두로의 아내.
- 로드리고 산체스 데 포르투갈(? ~ 1245): 아폰수 2세의 숙청을 피해 레온 왕국으로 이동했다가 나중에 포르투갈로 돌아왔고, 아폰수 2세의 아들 산슈 2세의 치세 때 권세를 누림. 그러나 산슈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된 후 상 살바도르 데 그리호 수도원에서 사망함.
- 길 산체스 데 포르투갈(? ~ 1236): 성직자이자 음유시인
- 콘스탄사 산체스(1204 ~ 1269): 상 주앙 다스 두나스 수녀원에서 평생 지내면서 토레스 베드라스, 알파파르, 알렌케르, 산타렝, 리오 마이오르, 상파울루 데 마샹, 코르테가사, 빌라네다 에 살제사스의 수입을 받았음.
- 페드로 모니스(1170 ~ ?): 카브레라 영주.
[1] 이탈리아어 이름은 '마틸드(Matilde)' 또는 '마팔다(Mafalda)', 프랑스어 이름은 '마틸드(Mathilde)', 포르투갈어 이름은 '마팔다(Mafalda)'이다.[2] 1148 ~ 1211, 레온 왕국의 국왕 페르난두 2세의 왕비[3] 1151 ~ 1218, 1184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와 초혼, 1194년 부르고뉴 공작 오도 3세와 재혼했으나 근친 관계를 이유로 교황청에 의해 결혼 무효화되었다.[4] 1153 ~ 1218년 이후, 1160년 아라곤 왕자 알폰소 2세와 약혼했으나 1162년 알폰소 왕자가 레온 공주 산차와 결혼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산타 마리아 데 살자다스 수도원에 수녀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