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제2백국 백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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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여백작 테레사 데 레온 Teresa de Leão | |
출생 | 1080년경 |
사망 | 1130년 11월 11일 갈리시아 |
재위 | 포르투갈 백국의 여백작 |
1096년 ~ 1128년 6월 24일 | |
포르투갈의 여왕 (논란) | |
1116년 ~ 1128년 6월 24일 | |
배우자 | 엔히크 드 보르고냐 |
자녀 | 우라카, 산차, 테레사, 앙리, 아폰수 1세, 테레사 페르난데스 (사생아), 산차 페르난데스 (사생아) |
아버지 | 알폰소 6세 |
어머니 | 히메나 무뇨스 |
형제 | 엘비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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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백국의 여백작. 포르투갈이 아직 레온 왕국의 속령이던 시절에 독립 여왕을 자칭하며 우라카 여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포르투갈이 완전한 독립 왕국이 되기 이전이었지만 그녀가 독립 여왕을 자칭했었기 때문에 일부는 테레사를 포르투갈의 첫 국왕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2. 생애
1180년경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소 6세와 정부 히메나 무뇨스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언니 엘비라[1]가 있었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히메나 무뇨스는 매우 고귀한 신분이었다고 한다. 17세기 역사가 루이스 알폰소 데 카르발로는 갈리시아 백작 무니오 로드리게스와 레온 국왕 베르무두 2세의 손녀인 히메라 오르도녜스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카날 산체스 파긴은 아스투리아스 백작 로드리고 무뇨스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사볼치 데 바예이 등도 이 주장에 동의하며, 로드리고 무뇨스의 아내는 무니오 로드리게스의 딸일 거라고 추정했다.히메나 무뇨스는 1079년 알폰소 6세가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한 뒤 궁정에서 물러나 프리아란자 델 비에조 마을의 여성 영주로 활동했지만, 테레사는 궁정에 계속 지냈다. 1093년, 알폰소 6세는 무라비트 왕조와의 전쟁을 도와달라는 호소에 응해 레온 왕국에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온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엔히크 드 보르고냐와의 결속을 강화하기로 마음먹고, 정처 콩스탕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우라카를 레이몽과 결혼시켰고, 테레사를 엔히크와 결혼시켰다. 1096년 레이몽과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레온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합의가 맺어졌으며, 엔히크는 아내 테레사와 함께 포르투갈 백작이 되었다. 여기에 갈리시아가 둘로 나뉘어져서 하나는 우라카가 그대로 가지고 두에로 강과 미뇨 강 사이의 갈리시아 서부는 지참금으로서 엔히크와 테레사에게 전달되었다.
1093년 알폰소 6세의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산초 알폰세스를 낳고 1107년 알폰소 6세가 산초 알폰세스를 합법적인 자식으로 삼고 후계자로 정하면서 입지가 약해진 레이몽은 엔히크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양자는 서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상호 협조하기로 했으며, 알폰소 6세가 사망한 후 레이몽이 레온 왕국을 물려받고 엔히크는 톨레도 일대와 레온 왕실 국고의 1/3을 물려받기로 했다. 만약 톨레도 일대를 무슬림의 공세로 잃어버린다면, 엔히크는 갈리시아를 보상으로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9월 레이몽이 죽으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알폰소 6세가 이 비밀계약을 사전에 눈치채고 레이몽 가족과 엔히크 가족이 서로를 견제하도록 조치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108년 5월 30일, 레온 왕국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산초 알폰세스가 무라비트 왕조와 맞붙은 우클레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후 우라카의 재혼 상대를 놓고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아라곤 왕국의 국왕 알폰소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엔히크와 테레사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알폰소 1세와 우라카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109년 7월 1일, 알폰소 6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한 뒤 알폰소 1세와 우라카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두 부부가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내전을 벌이자, 엔히크와 테레사 부부는 이참에 더 많은 영지와 이권을 챙기기로 마음먹고 내전에 개입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인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이에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해 페냐피엘로 밀어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엔히크의 유해는 브라가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테레사가 막내아들 아폰수 1세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옹립하고 어린 아폰수 1세의 공동 백작 지위까지 섭정해 백국을 실질적으로 단독 통치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웠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녀를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우라카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우라카의 수중에 넘어갔다.
1121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하지만 우라카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헬미레스를 숙청하려 했다가 디에고의 추종자들의 거센 반발을 산 덕분에, 테레사는 패망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여기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와 알폰소 7세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테레사는 레온 왕국의 가신으로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백작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124년 여름, 테레사는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1126년 3월 8일에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우라카의 뒤를 이어 레온 왕위에 오른 알폰소 7세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포르투갈 백국 각지를 파괴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테레사는 알폰소 7세에게 항복했고, 이후로는 레온 국왕의 충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테레사는 갈리시아 귀족이자 트라스타마라 백작인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를 애인으로 삼고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자신이 성년으로 인정받는 18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아들 아폰수 1세는 브라가의 파이오 멘데스 대주교와 손잡고 대 야고보의 유물이 브라가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신께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원하는 징표라고 주장해 귀족들을 끌여들었다.
1128년 6월 24일, 테레사는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레온 왕국 장성들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가 상 마메데 전투에서 아들에게 참패했다. 이후 그녀는 두 딸 우라카, 산차와 함께 페드로 페르난데스를 따라 갈리시아로 망명했고, 1130년 11월 11일 몬테데라모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그녀의 유해는 아폰수 1세에 의해 브라가 대성당으로 옮겨져 남편인 엔히크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 엔히크 드 보르고냐(1066 ~ 1112):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손자, 포르투갈 백작.
- 우라카(1095 ~ 1169 이후): 트라스타마라의 영주 베르무두 페레스 데 트라바의 아내.
- 산차(1097 ~ 1163): 포르투갈 귀족 산초 누녜스 데 첼라노바와 초혼, 페르난도 멘데스 데 브라간사와 재혼.
- 테레사(1098): 요절
- 엔히크(1106 ~ 1110): 요절
- 아폰수 1세(1109 ~ 1185): 포르투갈 백작, 포르투갈 왕국 초대 국왕.
-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1100 ~ 1155): 트라스타마라 백작, 갈리시아 귀족. 테레사의 정부.
- 우라카 페르난데스(? ~ ?): 알바로 로드리게스 데 사리아 백작과 결혼.
- 테레사 페르난데스(? ~ 1180): 누누 페레스 데 라라 백작과 초혼, 레온 국왕 페르난두 2세와 재혼.
[1] 1079년 ~ 1157년 4월 이후,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와 초혼, 카리온 백작 페르난도 페르난데스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