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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제비우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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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 1967-68 · 1972-73 | |||
| 1966 FIFA 월드컵 골든슈 [1] | | ||
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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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Ballond'or | ||
수상 요제프 마소푸스트 | 2위 에우제비우 | 3위 카를하인츠 슈넬링어 |
1966 Ballond'or | ||
수상 바비 찰튼 | 2위 에우제비우 | 3위 프란츠 베켄바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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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 알바루 쿠냘 | 아리트리데스 드 수사 멘데스 | 아폰수 1세 | 루이스 드 카몽이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주앙 2세 | 인판트 동 엔히크 | 페르난두 페소아 |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 바스쿠 다 가마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살게이우 마이아 | 마리우 소아르스 | 파도바의 안토니오 |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 에우제비우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프란시스쿠 사 카르네이루 | 조르제 누누 핀투 다 코스타 |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 | 주앙 페레이라 드 알메이다 | 주제 무리뉴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아고스티뉴 다 시우바 | 에사 드 케이로스 | 에가스 모니스 | 디니스 1세 | 페르난두 노브레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주제 에르마누 사라이바 | 아니발 카바쿠 실바 | 움베르투 델가도 | 조제 아폰수 | 루이스 피구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마르셀루 카에타누 | 페드루 누네스 | 안토니우 비에이라 | 플로르벨라 이스팡카 | 페르디난드 마젤란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마리아 지 루르드 핀타실구 | 주앙 1세 | 소피아 드 멜로 브레이네르 안드레센 | 안토니아 페레이라 | 파더 아메리쿠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안토니우 다마지우 |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 마누엘 1세 | 주제 사라마구 | 아라곤의 이사벨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카타리나 에우페미아 | 카를루스 파레지스 | 주제 소크라트스 |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 | 루이 드 카발로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브리테스 지 알메이다 | 알베르투 주앙 자르딩 | 알마다 네그레이루스 | 바스쿠 곤살베스 |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벨미로 데 아제비로 | 수사 마르틴스 | 마리아 두 카르모 세아브라 | 안토니우 안드라지 | 카를루스 1세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마리자 | 비제우의 엘레노르 | 호자 모타 | 안토니우 테이셰이라 레벨루 | 아폰수 3세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비토르 바이아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허만 호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마리아 2세 | 카를루스 로페스 | 아폰수 코스타 |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 | 가구 코티뉴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히카르두 아라우주 페레이라 | 마누엘 소브리뉴 시몽이스 | 마누에우 마리아 바르보자 드 보카주 | 헬리오 페스타나 | 조르주 삼파이우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안토니우 샹팔리모 |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 질 비센트 |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 미겔 토르가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나탈리아 코레이아 | 에드가 카르도주 | 페르낭 멘데스 핀투 | 루시아 수녀 | 알프레도 다 실바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요한 21세 | 다미앙 드 고이스 | 주앙 4세 | 조아킹 아고스티뉴 | 아델라이드 카베치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알메이다 가헤트 | 안토니우 젠틸 마르틴스 | 안토니우 바리아슈에스 | 파울라 레고 | 마리아 조앙 피레스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1] 1982년 월드컵부터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를 수여했으므로 비공식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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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제비우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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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에우제비우 Eusébio | ||||||||||
본명 | 에우제비우 다 실바 페헤이라[2] Eusébio da Silva Ferreira | ||||||||||
출생 | 1942년 1월 25일 |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로렌수 마르케스 | |||||||||||
사망 | 2014년 1월 5일 (향년 71세) | ||||||||||
포르투갈 리스본 | |||||||||||
국적 |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 [[모잠비크|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5cm[3] | 체중 76kg | ||||||||||
포지션 | 공격수[4] | ||||||||||
주발 | 오른발 (양발) | ||||||||||
소속팀 | CD 막사케니 (1957~1960) SL 벤피카 (1961~1975) 보스턴 미닛먼 (1975) CF 몬테레이 (1975) 토론토 메트로스-크로아티아 (1975~1976) SC 베이라마르 (1976) 라스베가스 퀵실버스 (1976~1977) 우니앙 드 토마르 (1977~1978) 뉴저지 아메리칸스 (1978~1979) 버팔로 스탤리언스 (1979~1980 / 실내축구) | ||||||||||
국가대표 | 64경기 41골[5] (포르투갈 / 1961~1973) | ||||||||||
통산 득점 | 733골[6] | ||||||||||
역대 등번호 | SL 벤피카 - 8번, 9번, 10번 포르투갈 대표팀 - 8번, 9번, 10번, 13번 | ||||||||||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6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서명 | <colbgcolor=#fff,#191919> | |||||||||
종교 | 가톨릭 | ||||||||||
후원사 | 푸마 (킹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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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前 축구 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별명은 흑표범(O Pantera Negra[7]), 흑진주(The Black Pearl) 또는 황제(O Rei[8]).
선수 경력의 대부분을 벤피카에서 보내며 1966년 발롱도르를 비롯해 유러피언 골든부트를 2회, 프리메이라 디비장 득점왕을 7회, 유러피언컵 득점왕을 3회 수상하고, 프리메이라 디비장을 11회, 유러피언컵을 1회 우승하는 등 전 유럽에 그 명성을 떨쳤다. 또한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총 9골을 넣어 포르투갈을 3위[9]로 이끌고 골든슈를 수상하였다.[10][11]
2. 유년기
에우제비우는 본래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태생으로, 앙골라 출신 백인 철도 노동자인 아버지와 모잠비크 출신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난 혼혈이다.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에우제비우는 학교 수업도 빼먹으며 대충 흙바닥에 그려놓은 즉석 경기장에서 친구들과 즉흥적으로 맨발로 축구를 하던 그저 축구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나마 있던 아버지도 에우제비우가 8살이던 해 파상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어찌나 축구를 좋아하던지 에우제비우는 그와 그의 친구들이 결성한 지역 아마추어 축구팀인 '브라질레이루스'(Os Brasileiros)[12]에서 처음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그들은 1950년대 위대했던 브라질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공은 낡은 신문지들로 양말을 채워넣어 만들었다.
에우제비우는 친구들과 함께 모잠비크에서 자신의 드림 클럽인 SL 벤피카의 재정 지원을 받는 팀, 'GCD 마푸투'에 입단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 당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스포르팅 드 로렌수 마르케스[13]에 입단하기로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당시 15살이었던 에우제비우 영입을 원하였던 팀이 하나 있었는데 그 팀은 바로 유벤투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거절하였다.
CD 막사케니 유소년 선수였던 에우제비우 |
“저는 모잠비크에 있는 스포르팅 위성구단에서 뛰고 있었습니다. 벤피카는 돈을 지불하고 저를 데려가고 싶어하였고 스포링팅은 금전적 보상없이 주니어 선수로 절 데려가려고 하였어요.
벤피카는 저에게 좋은 제안을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제 어머니와 형과 이야기를 하고 나서 3년간 1000유로를 제안하였습니다. 형은 그거에 두 배를 더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그들은 기꺼이 받아들여줬습니다. 계약을 했고 어머니께서 돈을 받으셨죠. 어머니는 만약 아들이 포르투갈에 가서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한다면 본인이 이 돈을 갚아야된다고 말씀하시면서 모잠비크 은행에 계약금을 넣어두셨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좋은 마음씨를 가지신 분이세요.
어머니께서 테이블 위에서 계약금을 두 팔로 감고 계신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저는 살면서 그런 돈을 본 적이 없었어요. 스포르팅은 악의적인 이야기를 퍼트려 저를 비난하고자 하였지만, 그들이 한 이야기는 사실과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벤피카가 저를 데려가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할 동안 스포르팅은 저를 공짜로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죠.”
이 때 한 가지 더 비하인드 스토리가 존재하는데, 사실 에우제비우의 어머니는 아들이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염려했다. ‘아들이 실패해도 계약금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약속해달라’고 벤피카에게 요구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걱정은 그저 기우였다.
에우제비우는 자신의 오랜 드림 클럽인 벤피카의 유니폼을 입고 치른 데뷔전, 아틀레치쿠 클루브 드 포르투갈과의 친선 경기에서 바로 해트트릭을 기록한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3.1.1. SL 벤피카
에우제비우가 벤피카 유니폼을 입고 치른 공식경기에서의 데뷔전은 1961년 6월 1일 펼쳐진 비토리아 드 세투발과의 타사 드 포르투갈 16강 2차전이다. 이 경기는 베른에서 펼쳐지는 바르셀로나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과 동일한 날에 예정되어 있어 논란이 일었지만 포르투갈 축구 연맹은 일정을 변경해주지 않았고 이미 1군 선수들은 베른에 가있는 상황, 어쩔수 없이 B팀에 있던 선수들이 이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당시 벤피카 B팀에 있던 에우제비우도 이 경기에 선발 출전하였으며 64분 득점을 기록한다. 하지만 팀은 1:4로 패배하였고 1·2차전 합계 4:5로 벤피카는 탈락하고 만다. 그러나 같은 날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치른 벤피카는 바르셀로나를 3:2로 꺾고 유러피언컵 우승을 거머쥐었다.1961년 6월 10일, 에우제비우는 벨레넨스스와의 프리메이라 디비장 마지막 경기에 출전하여 자신의 첫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리그 데뷔전 경기에서 바로 데뷔골까지 기록하였으며 팀은 4:0으로 승리.
이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가 먼저 두 골을 집어넣으며 앞서갔으나 벤피카도 그에 뒤지지 않고 2골을 따라넣으며 2대2 긴장이 흐르는 접전이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푸스카스가 한 골을 더 집어넣으며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2, 하지만 마리우 콜루나가 중거리 득점포를 기록하며 3:3 피 말리는 경기가 계속된다. 그리고 이 정적은 바로 에우제비우에 의해 깨지게 되는데, 무려 본인이 폭풍 질주를 통해 얻어낸 PK를 자신이 성공시키며 역전, 그리고 바로 곧이어 오른발 호쾌한 중거리 슛팅을 골로 성공시키며 2분만에 2골을 기록한 에우제비우는 경기스코어를 5-3으로 역전시키며 벤피카의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시킨다. 시즌 동안 그가 보여준 훌륭한 폼으로 인해 프로로서의 첫 완전한 시즌인 61-62 시즌 에우제비우는 1962년 발롱도르 2위를 달성하는 위엄을 보여주었고 1963년에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FA의 '황금 기념일'에 FIFA XI 대표로까지 뽑히게 된다.
이때 에우제비우의 나이는 불과 20살이었다. 이 때부터 당시 벤피카 최고의 스타였던 스트라이커, 아구아스를 밀어내며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또 중원을 책임지던 마리우 콜루나, 공격진에 토레스, 시묘에스, 아우구스투와는 환상의 콤비로 벤피카의 황금기를 이끈다. 허나 이는 벤피카의 마지막 유럽대항전 우승이다. 당시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끈 명장 벨라 구트만은 팀과 연봉인상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며 떠났고 이에 구트만은 "앞으로 100년 동안 벤피카는 유럽 대회 우승을 차지 하지 못할 것이야"라는 저주를 퍼부었고 유럽 최고의 팀이었던 벤피카는 당연히 이를 우습게 여겼다.
구트만이 없는 벤피카는 유럽에서 여전히 강력했고 리그 독주를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유러피언컵 3연패에 도전하며 에우제비우와 아구아스가 공존하는 벤피카는 어마어마한 퍼포먼스로 유러피언컵 결승에 다시 올랐다. 결승전 상대는 바로 잔니 리베라가 에이스로 군림한 AC 밀란. 경기가 시작되고 에우제비오는 보기좋게 선제골을 뽑아내며 기세를 가져오나 알타피니의 두 골로 역전당한다. 아쉽게 준우승.
또 1967-68 시즌에 다시 한 번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랐으나 바비 찰튼 - 데니스 로 - 조지 베스트 삼각편대[18]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연장전에서만 3골을 먹히며 4-1 패배. 비록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하였지만 리그에서 무려 42골을 기록한 에우제비우는 당시 새롭게 제정된 상인 유러피언 골든부트의 초대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벤피카는 에우제비우가 기록한 3번의 유러피언컵 준우승 후에 5번의 준우승을 더 경험한다. 매번 결승에서 좌절하긴 했지만, 60년대의 벤피카는 유러피언컵 결승에만 무려 5번을 오르는 괴력을 보였고 유럽 변방 리그 취급받던 포르투갈 리그는 65년 무려 유럽 리그 랭킹 3위, 벤피카는 UEFA 클럽 랭킹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1972-73 시즌에는 벤피카를 이끌고 리그 40골을 터뜨리며 28승 2무로 무패 우승을 달성하였으며 이번 득점 기록으로 다시 한번 에우제비우는 자신의 두 번째 유러피언 골든부트를 수상하게 된다.
북미 사커 리그에서 뛰던 당시 펠레[19]와 다시 만난 에우제비우[20][21] |
3.2. 국가대표 경력
에우제비우의 첫 월드컵은 1966 잉글랜드 월드컵이었으며, 사실 포르투갈의 첫 월드컵이기도 하다.[23] 이전까지 포르투갈은 유럽의 약체로 분류되었지만 에우제비우의 등장과 동시에 월드컵 유럽 예선을 통과할 전력을 갖춘 것.에우제비우는 전 시즌에 흑인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강호의 체코슬로바키아[24], 루마니아, 터키와의 지역 예선에서 6경기 7골[25]을 기록하며 포르투갈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끄는 등 폼이 최고로 올라온 상태였다.
포르투갈의 조별 리그 상대는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
지금이야 불가리아와 헝가리는 유럽 축구 약체에 속하지만 1960년대의 불가리아는 월드컵 본선에도 여러차례 진출하며, 유럽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CSKA 소피아의 멤버들이 대거 포진한 세계 랭킹 15위권, 헝가리 또한 월드컵 2회 준우승이라는 대단한 이력과 함께 전성기의 매직 마자르에는 못미치지만 세계 랭킹 10위권내에 들었으며 플로리안 알베르트와 페렌츠 베네라는 슈퍼스타들을 앞세운 강팀이었다.
물론 브라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직전 대회 우승팀이자 펠레와 펠레를 받쳐주는 가린샤를 앞세워 이번에도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3연패 달성 가능성이 높은 팀이였다.
포르투갈에도 잘나가던 벤피카의 멤버가 대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에우제비우, 토히스, 콜루나라는 스타 플레이어들이 존재하였지만 이전까지 세계대회에서 족적하나 남긴적없던 포르투갈은 월드컵 3조의 약체국으로 분류되었으며 그렇게 무난하게 포르투갈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포르투갈을 이끄는 에우제비우는 헝가리를 상대로 승리, 불가리아전에는 득점까지 기록하며 2전 전승을 기록하였다. 대망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는 바로 펠레가 버티는 브라질.
하지만 당시 펠레는 조별 리그 1차전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 당한 부상의 여파로 인해 헝가리전에는 출전하지 못하였으며,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도 포르투갈 선수의 태클로 인해 부상을 당해 결국 경기 도중에 경기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리고 펠레가 빠진 이 경기를 에우제비우는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게 된다.
에우제비우는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서 팀의 공격을 이끌었으며 그렇게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펠레의 브라질을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8강에 진출하게 된다.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두 팀이 8강전에서 격돌했다. 바로 포르투갈 vs 조별 리그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격파해내는 놀라운 업셋을 이루어낸 북한.
그리고 1966년 7월 23일 리버풀 구디슨 파크에서 벌어진 북한과의 8강전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팀들답게, 시합 내용 또한 명승부였으며 에우제비우는 다시 한번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시합을 치른다.
포르투갈이 전반 25분 만에 3골을 내주며 이탈리아와 함께 북한의 이변의 희생양이 될 뻔하다가, 에우제비우가 전반전 2골, 후반전 2골 총 4골을 몰아쳐서 4-3까지 역전시켰고 결국 최종적으로 5-3 승리를 거둔다.[26] 말그대로 에우제비우 원맨쇼.
본인의 첫 월드컵이자 포르투갈 역사상 첫 월드컵에서 펠레의 브라질을 3:1로 격파하는 등 대단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바로 월드컵 3위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낸것이다. 게다가 에우제비우의 활약은 그야말로 혼자서 팀을 이끌다시피했고 전세계가 에우제비우의 활약상에 찬사를 보냈다. 에우제비우는 9골을 넣으며 이 대회 득점왕에 등극하였으며 해당년도 발롱도르 2위에 오른다.[27]
그 유명한 발롱도르를 시상하는 프랑스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에서는 1994 미국 월드컵이 개최하기 직전 첫 번째 월드컵인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서부터 1990 이탈리아 월드컵까지 참가했던 선수들의 활약상을 토대로 일명 “월드컵 100명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월드컵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활약상을 펼친 선수들의 순위를 1위부터 100위까지 매겨놓았는데 이 순위에서 에우제비우를 18위에 올려놓았다. 이 순위는 무려 조국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바비 찰튼과 네덜란드 토탈 풋볼의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킨 요한 크루이프보다도 높은 순위이다.[28]
심지어는 선수들의 경기 평점을 매기는 평점 전문 사이트 소파 스코어는 1966년 당시 에우제비우가 보여준 활약상을 평점 8.8점으로 메기며 역대 월드컵 최고의 퍼포먼스 1등으로 선정하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에우제비우의 당시 활약상을 못봤더라도 어느 정도 였을지 짐작은 가는 부분이다.
FIFA - 에우제비우 영상 |
4. 은퇴 이후
은퇴 후, 벤피카의 어시스턴트 코치 그리고 축구 앰버서더로 활동하며 전 세계를 여행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해설자로도 활동했으며, 덧붙여 이로부터 8년 뒤인 2010 FIFA 월드컵 당시 북한과 포르투갈의 조별 리그 G조 경기 중 경기 때 직접 관전하러 온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북한을 7:0으로 대파하는 것을 보며 박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5. 사망
2014년 1월 5일(한국시간 기준),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심장마비.포르투갈 정부는 이날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조기를 내걸고 나흘간을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이날 포르투갈 곳곳에서 조기가 걸리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의 축구 황제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도 본인의 SNS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이자 내 친구인 에우제비우가 어젯밤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가족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라고 올리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당시 포르투갈 아니발 카바쿠 실바 대통령도 "포르투갈은 오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중 한 명인 에우제비우 다 실바 페레이라를 잃었다. 조국은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라고 말하였으며 페드루 파수스 코엘류 총리 또한 성명문을 통해 "축구 천재이자 겸손의 모범, 뛰어난 운동 선수이자 관대한 인물인 에우제비우는 모든 스포츠 팬들과 포르투갈인들에게 프로 의식, 결단력, 그리고 국가대표팀 유니폼과 벤피카 색깔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 본보기였다"라고 밝혔다.
에우제비우가 태어나고 자란 국가인 모잠비크의 조아킹 시사누 전직 대통령도 "나는 친구를 잃었다. 포르투갈 축구는 가장 위대한 우상중 한 명을 잃었다. 축구는 포르투갈과 모잠비크를 하나로 모았고 모잠비크의 모든 사람들은 에우제비우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사실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만큼, 모잠비크 사람들에게 포르투갈은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하지만 에우제비우라는 한 인물이 모잠비크와 포르투갈을 축구에서 만큼은 하나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에우제비우의 위엄을 알 수 있다.
본래 루미아르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었으나 2015년 7월 4일 포르투갈 내셔널 팡테온[29]으로 이장되었다.# 생전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ATÉ SEMPRE, EUSÉBIO |
6. 플레이 스타일
폭발적인 주력과 순발력에 당대 최고의 드리블링 그리고 뛰어난 양발 능력[30]을 통한 반 박자 빠른 슛 능력까지 겸비한 스트라이커로 현역 시절 펠레와 비교되던 기량을 보여주었다. 빠른 스피드를 가졌던 에우제비우는 무려 100m를 11초만에 돌파하는 파괴적인 주력을 가지고 있어[31] 뛰어난 돌파 능력 또 라인 브레이킹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몸도 굉장히 탄탄해서 몸싸움에 밀리는 광경을 보기 힘들정도.[32]
킥 능력이 좋아서 대포알같은 중거리 슛도 아주 잘 찼다. 단순히 잘 찬 것뿐만이 아니라, 슈팅 타이밍도 엄청나게 빨랐으며 다른 선수같으면 슈팅을 못때릴거 같은 순간에도 반 박자 빠르게 슈팅을 처리하며 누구보다 빠르고 강력한 슈팅을 구사하였다. 이렇듯 슈팅에는 도가 트였기에 그에 따라 프리킥, 페널티킥과 같은 세트피스도 당연히 에우제비우의 담당. 무려 40m거리에서 프리킥골을 넣은적도 있으며 슈팅파워 또한 축구 역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알다시피 60년대의 잔디와 축구화 및 축구공 기술력은 지금과 같은 수준이 절대 아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본인에게 수비가 붙어있든 안붙어있든 신경쓰지 않고 엄청난 슈팅을 양발로 자유자재로 때렸으니 진짜 상대하는 수비들은 악몽 그 자체, 게다가 슈팅도 반 박자 빠르게 때렸으니 수비수들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 때의 기술력을 감안한다면 에우제비우가 보여준 이러한 위력의 슈팅은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현대 기준으로도 에우제비우 정도의 위력을 보여준다면 감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데 에우제비우는 60년 전에 그러한 미친 킥력을 보여주었으니 당시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하였다.
1961-62 시즌 레알 마드리드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 경기, 바로 에우제비우가 2분 만에 2골을 넣은 당시 모습에서 그의 플레이를 아주 잘 알수 있다. 첫번째 골은 하프라인부터 질주하며 측면에서 수비를 다 제치고 돌파한뒤 얻어낸 페널티 킥 골이였고, 두 번째 골은 드리블로 수비 몇명을 벗겨낸뒤 대포알같은 슛팅으로 골망을 가른 득점이였다. 그런식으로 득점하는 루트가 잦았으며, 그렇기에 무려 벤피카에서만 400골을 넘게 넣고 축구 역사상 득점 순위 9위에도 올라있는 엄청난 골잡이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에우제비우임에도 단점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난사. 에우제비우 본인부터가 공격을 책임져야하는 에이스 그리고 자신이 뛰어난 슈팅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슈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아끼지 않고 많은 시도를 하였다. 단적인 예로, 에우제비우가 팀 에이스로서 조국을 3위까지 이끈 66년도 월드컵 당시 해당 대회 9골을 넣으면서 득점왕 자리에 올랐지만, 이 대회기간 총 무려 61번의 슈팅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역대 월드컵 최다 슈팅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슈팅을 기록하였음에도 이 대회 그가 기록한 박스 밖 골은 단 1골도 되지 못하였는데, 이렇듯 에우제비우는 무리하게 중거리슛을 시도하는 경향이 큰 선수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공격시 우리 팀 템포가 끊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보면 에우제비우의 뛰어난 킥력이 양날의 검이였던 셈.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전형적인 최전방 스트라이커같지만 에우제비우는 측면에서 볼을 받고 경기를 풀어가는 인사이드 포워드의 성향을 띄기도 하였으며, 소속팀 벤피카에서나 대표팀에서나 타겟맨 역할을 맡아줄 주제 아우구스투 토히스라는 월드클래스의 포워드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뒤에서 그를 받쳐주는 현대 축구로 따지면 세컨드 스트라이커처럼 위치해 하프라인 근처까지 내려오며 팀원들을 이용한 연계나 2:1 패스 그리고 직접 볼을 뿌려 기회창출하는 플레이메이킹 같은 부분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경기장 공격지역 전체를 이용할 정도로 활동 범위가 워낙 넓은것도 한 몫했으며 이렇게 넓은 활동 반경을 가져간 것만 봐도 그가 가진 체력에 대해서는 말하면 입 아픈 수준.
7. 기록
7.1. 대회 기록
- CD 막사케니 (1957~160)
- 캄페오나투 데 모잠비크[35]: 1960
- SL 벤피카 (1961~1975)
- 프리메이라 디비장: 1960-61, 1962-63, 1963-64, 1964-65, 1966-67, 1967-68, 1968-69, 1970-71, 1971-72, 1972-73, 1974-75
- 타사 드 포르투갈: 1961-62, 1963-64, 1968-69, 1969-70, 1971-72
- 타사 드 혼라 드 리스보아: 1962-63, 1964-65, 1966-67, 1967-68, 1968-69, 1971-72, 1972-73, 1973-74, 1974-75
- 타사 리베이루 도르 헤이스: 1963-64, 1965-66, 1970-71
- 유러피언컵: 1961-62
- 토론토 메트로스-크로아티아 (1975~1976)
- NASL: 1976
-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3위: 1966
7.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65; 2위: 1962, 1966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CF 3위)[36]
- FIFA 월드컵 골든슈: 1966[37]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64-65, 1965-66, 1967-68
- 유러피언 골든부트: 1967-68, 1972-73
- 프리메이라 디비장 득점왕: 1963-64, 1964-65, 1965-66, 1966-67, 1967-68, 1969-70, 1972-73
- 타사 드 포르투갈 득점왕: 1961-62, 1963-64, 1964-65, 1968-69, 1971-72
- 모캄볼라 득점왕: 1960
-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 1970, 1973
- 포르투갈 골든볼: 1991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5
- FUWO 유럽 올해의 팀: 1965, 1966, 1967
- FIFA XI: 1963, 1967
- FIFA 공로훈장: 1994
- FIFA 국제 축구 명예의 전당: 1998
- FIFA 100: 2004
- 20세기 유럽팀: 1998
- BBC 올해의 월드 스포츠 스타: 1966
- PFA 메리트 상: 1993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UEFA 회장상: 2009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포르투갈 드림팀: 2022
- 골든풋: 2003
7.3. 수훈
7.4. 클럽 기록
클럽 | 시즌 | 소속리그 | 리그 | 컵대회 | 유럽 대항전[40] | 기타 컵 대회[41]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CD 막사케니 | 1957 | 모캄볼라 | 4 | 9 | - | - | 4 | 9 | ||||
1958 | 7 | 11 | - | - | 7 | 11 | ||||||
1959 | 11 | 21 | - | - | 11 | 20 | ||||||
1960 | 20 | 36 | - | - | 20 | 36 | ||||||
합계 | 42 | 77 | - | - | - | 42 | 77 | |||||
SL 벤피카 | 60-61 | 프리메이라 디비장 | 1 | 1 | 1 | 1 | 0 | 0 | 4 | 9 | ||
61-62 | 17 | 12 | 7 | 11 | 6 | 5 | 1 | 1 | 31 | 29 | ||
62-63 | 24 | 23 | 6 | 8 | 7 | 6 | 2 | 1 | 39 | 38 | ||
63-64 | 19 | 28 | 6 | 14 | 3 | 4 | 28 | 46 | ||||
64-65 | 20 | 28 | 7 | 11 | 9 | 9 | 36 | 48 | ||||
65-66 | 23 | 25 | 2 | 5 | 5 | 7 | 30 | 37 | ||||
66-67 | 26 | 31 | 3 | 7 | 4 | 4 | 33 | 42 | ||||
67-68 | 24 | 42 | 2 | 2 | 9 | 6 | 35 | 50 | ||||
68-69 | 21 | 10 | 9 | 18 | 5 | 1 | 35 | 29 | ||||
69-70 | 22 | 21 | 2 | 1 | 4 | 4 | 28 | 26 | ||||
70-71 | 22 | 19 | 7 | 9 | 3 | 7 | 32 | 35 | ||||
71-72 | 24 | 19 | 5 | 8 | 8 | 1 | 37 | 28 | ||||
72-73 | 28 | 40 | 1 | 0 | 4 | 2 | 33 | 42 | ||||
73-74 | 21 | 16 | 3 | 2 | 4 | 1 | 28 | 19 | ||||
74-75 | 9 | 2 | 0 | 0 | 4 | 0 | 13 | 2 | ||||
합계 | 301 | 317 | 61 | 97 | 75 | 57 | 3 | 2 | 440 | 473 | ||
보스턴 미니먼 | 1975 | NASL | 7 | 2 | - | - | - | 7 | 2 | |||
CF 몬테레이 | 75-76 | 리가 MX | 10 | 1 | - | - | - | 10 | 1 | |||
토론토 메트로스-크로아티아 | 1976 | NASL | 21 | 16 | - | - | - | 21 | 16 | |||
SC 베이라마르 | 76-77 | 프리메이라 리가 | 12 | 3 | - | - | - | 12 | 3 | |||
라스베가스 퀵실버스 | 1977 | NASL | 17 | 2 | - | - | - | 17 | 2 | |||
우니앙 드 토마르 | 77-78 | 세군다 디비종[42] | 17 | 2 | - | - | - | 17 | 2 | |||
뉴저지 아메리칸스 | 1978 | ASL | 9 | 2 | - | - | - | 9 | 2 | |||
1979 | - | - | - | - | - | |||||||
버팔로 스탤리언스 | 1977 | MISL[43] | 5 | 1 | - | - | - | 5 | 1 | |||
커리어 통산 | 436 | 424 | 61 | 97 | 75 | 57 | 3 | 2 | 575 | 580 |
8. 평가
8.1. 선수로서의 위상
센터포워드 포지션 안에서 평가하면 에우제비우의 위대함이 더욱 부각되는데, 2020년 발롱도르 드림팀 선정 중앙 공격수 포지션에서 에우제비우는 게르트 뮐러, 마르코 반 바스텐을 제치고 3위에 올랐다. 또한 90Min에서도 올타임 스트라이커 랭킹에 에우제비우를 4위에 선정하였다. 이뿐만이 아닌, 다수의 언론에서 에우제비우는 센터포워드에서 항상 TOP 5 안에 드는 랭킹을 기록하고 있다.
에우제비우가 전문가들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은 바로 큰 경기에 강한 강심장이었다는 것이다. 에우제비우의 전성기 시기가 63-64 시즌~67-68 시즌으로 여겨지는데 이 시즌 동안 에우제비우는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30경기를 뛰어 30골을 기록한 무려 경기당 1골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1966년 월드컵 당시 에이스로서 포르투갈을 이끌고 엄청난 원맨캐리를 보여주며 팀을 3등으로 이끄는 등 비록 게르트 뮐러와 마르코 반 바스텐이 국가대표로서 우승은 했을지언정 개인 퍼포먼스면에서 에우제비우가 절대 이 둘보다 뒤쳐지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아니 오히려 에우제비우 활약상이 이 둘보다 더 좋았다고 평가하는 전문가들 또한 많다.[45][46] 역대 월드컵 활약으로 따져보아도 1986년의 디에고 마라도나에 견줄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에우제비우는 당시 축구 변방으로 여겨지던 포르투갈 축구를 세계적 수준으로 알리는데 큰 공을 세운 주역이였으며 흑인 최초로 발롱도르를 받는 등[47] 유럽에서 활동하던 흑인들이 극소수인 시대에서 월드클래스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흑인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Voetbal International 선정 포르투갈 선수 유일의 월드스타[48]
Placar 선정 세기의 선수 100인 9위
구에린 스포르티보 선정 세기의 50인 12위
월드 사커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 10위
Venerdì 선정 역대 100인. 포르투갈에서 유일하게 선정
플래닛 풋 선정 세계 최고의 선수 50인
20세기 말 세계 언론들이 뽑은 역대 축구 선수 순위 합산에서 에우제비우는 8위를 기록.
종합하자면 에우제비우는 20세기 선수들 가운데 TOP 10 안에 들어가며 현재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선수 20위권 내에 들어가는 레전드이다. 특히 자신이 뛴 중앙 공격수 포지션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할 아성을 갖고 있다.
8.2. 축구계에 끼친 영향
2010년 아프리카 최초로 월드컵을 개최한 남아공을 기념해서 에우제비우 인터뷰를 진행한 더 가디언[49] |
에우제비우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나온 최초의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Eusebio was the first world-class striker to emerge from the African continent.
- FIFA
Eusebio was the first world-class striker to emerge from the African continent.
- FIFA
아프리카 국가인 모잠비크에서 나고 자란 에우제비우는 세계 무대에 아프리카 축구를 알린 최초의 인물이다. 카메룬의 로저 밀러부터 라이베리아의 조지 웨아, 로저 밀러 이후 카메룬을 책임 진 사무엘 에투, 코트디부아르의 디디에 드록바, 가나의 마이클 에시엔, 이집트의 모하메드 살라 등으로 이루어진 아프리카 축구의 계보는 에우제비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에우제비우는 포르투갈 축구의 전설인 동시에 아프리카 축구의 선구자인 셈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로 축구 선수로서 유럽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에우제비우를 자랑스러워 한다.
모국인 모잠비크 또한 에우제비우가 모잠비크 사람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에우제비우 본인도 모잠비크는 내 고향이며 죽을 때까지 사랑할 나라. 포르투갈은 내가 프로 축구 선수로서 배우고 자란 나라. 내 딸들도 포르투갈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모잠비크에 대해 빠짐없는 애정을 보냈다.
1998년 피파가 100명의 전문가 패널들을 통해 국제 축구 명예의 전당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10인을 뽑았는데, 에우제비우가 10인 중 한 명으로 선택되게 되었다.
이 날 에우제비우는 "한 번 봐보십시요. 이 명단에 흑인은 저와 펠레 두 명밖에 없습니다. 제2의 조국인 아프리카 그리고 포르투갈을 대표하게 되었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에우제비우는 흑인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을 대표하는 선수였으며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진 인물이다.
요약하자면, 펠레가 당시 남아메리카를 대표한 흑인 선수였다면 에우제비우는 바로 아프리카와 유럽을 대표한 흑인 선수였다.
9. 에우제비우에 대한 말, 말, 말
우리는 그가 보여준 재능, 모범, 포르투갈 축구의 특징이자 자신을 축구계의 글로벌 벤치마크로 만든 캐릭터를 기억할 것. 에우제비우의 삶은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유산이며, 벤피카는 그의 고향의 항구였다. 그는 벤피카를 클럽 그 이상으로 만들어주었고 에우제비우가 남긴 기억과 유산은 우리 안에 남을 것이다.
- SL 벤피카
- SL 벤피카
모잠비크가 세계 축구계에 준 가장 큰 선물.
- FIFA
- FIFA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최초의 축구 스타이자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났던 포르투갈 국적의 선수.
- 뉴욕 타임스
- 뉴욕 타임스
치명적인 흑표범.
- 구에린 스포르티보
- 구에린 스포르티보
최고의 선수 에우제비우와 맞붙은 경험은 특권이었다.
- 바비 찰튼
- 바비 찰튼
에우제비우는 나에게 있어 항상 역대 최고의 선수였다.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포르투갈 축구 사상 처음이자 가장 위대한 상징.
- 후이 코스타
- 후이 코스타
에우제비우는 축구 선수로서 예술 작품 그자체. 경기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그는 겸손하고 또 겸손하여 자신을 진실되게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에우제비우가 있으면 우리는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할 수 있다. 하지만 에우제비우가 없으면 리그 우승도 할 수 없다.
- 안토니우 시몽이스[52]
에우제비우가 있으면 우리는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할 수 있다. 하지만 에우제비우가 없으면 리그 우승도 할 수 없다.
- 안토니우 시몽이스[52]
에우제비우와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내게 왕과 같은 사람이다.
- 루이스 피구
- 루이스 피구
에우제비우가 벤치로 가기 위해 경기장을 가로질러 갈 때마다 관중들은 그에게 기립 박수를 보내왔다. 그가 팬들로부터 받는 모든 지지를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 매우 큰일이었다. 그의 경기를 라이브로 본 적은 없지만 비디오로 봤을 때 마치 축구의 신 같았다. 나는 22살에 벤피카에 도착해 에우제비우와 대화하는 어린이가 되어있었다. 마치 조언을 해주는 코치와 그 조언을 받아드리는 어린 선수처럼 말이다.
- 누누 고메스
- 누누 고메스
에우제비우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우리 세대보다 이전 세대에겐 특히 더 그랬다. 피부색과 클럽, 정치적인 면을 떠나 포르투갈에서 그는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다.
- 주제 무리뉴
- 주제 무리뉴
에우제비우는 현역 시절 포르투갈 축구 그 자체일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것은 아직도 안타깝다. 그와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뛰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자주 생각한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에우제비우는 자신의 시대에서 위대했던 선수중 한 명. 오직 소수의 선수만이 그처럼 플레이하고 공을 찰 수 있다.
- 게리 리네커
- 게리 리네커
위대한 에우제비우의 존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 제프 블래터
- 제프 블래터
에우제비우는 우리 스포츠의 거인이며 경기장 안팍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통해 보여준 자기 절제, 페어플레이 그리고 존중과도 같은 가치는 미래 세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 미셸 플라티니
- 미셸 플라티니
위대한 축구 선수가 우리 곁을 떠났고, 에우제비우가 우리에게 준 위대함과 아름다운 축구의 순간에 감사드린다.
- 루드 굴리트
- 루드 굴리트
패널티 박스 밖이든 안이든 슛 찬스가 오면 득점을 성공시킨다. 정말 펠레와 비슷하다. 공을 정말 잘 컨트롤하는 모습 그리고 빠르고 정교하게 다루는 능력을 보면 브라질 선수들보다 더 브라질 선수같다. 정말 특별한 선수.
- 고든 뱅크스
- 고든 뱅크스
위대한 선수중 한 명. 특히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대표로 뛸 때 정말 경이로웠다.
- 조지 그레이엄
- 조지 그레이엄
66년 월드컵 준결승에서 우리에게 졌다는 것 그리고 2년 뒤 우리에게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 졌다는 사실이 잘못된 그림을 만든다. 에우제비우는 위대한 선수들이 있던 시대에서 최고의 선수중 한 명이였다.
- 알렉스 스테프니[53]
- 알렉스 스테프니[53]
나는 항상 포르투갈 축구 역사를 열렬히 추종했다. 에우제비우는 이 일에 크고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개성과 카리스마로 엄청난 찬사를 불러일으킨 선수.
- 미켈 아르테타
- 미켈 아르테타
당시에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에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이 있었지만 에우제비우는 진정으로 위인이 된 최초의 아프리카 축구 선수.
- 지미 암필드
- 지미 암필드
에우제비우 이전에도 콜루나가 있었지만 에우제비우는 그 시대 최고의 선수였다. 그당시 사람들은 오로지 그와 펠레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였다. 훌륭한 벤피카와 함께 에우제비우는 세계 최고 중 한 명이였다.
- 조반니 트라파토니
- 조반니 트라파토니
축구는 오늘날 가장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스포츠이다. 에우제비우와 같은 위대한 선수 덕분에 이와 같은 놀라운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필드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에우제비오는 단순히 훌륭한 선수 그 이상이었다. 그는 롤모델이자 겸손하기로 소문난 훌륭한 인간이다.
- 플로렌티노 페레스
- 플로렌티노 페레스
10. 여담
* 1970년 9월 3일, SL 벤피카 팀이 내한해 친선 시합을 가진 일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도 무척 친숙한 선수이다. 그때 골 지점으로 부터 40m 가까이 되는 거리에서 강력슛을 날려 골을 넣어 당시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여담으로 옛날엔 영어식으로 철자를 읽어서 '유세비오'라 불렀기 때문에, 이 선수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축구 팬 세대 구분을 할 수 있다.[54]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와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최고의 선수 4위, 1960년대 공격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 넥슨이 서비스하는 FC 온라인에서 선수 가치의 기록적인 성장률을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대기록으로 '에우맘'이라는 애호유저들이 생겨날 정도.
- 90Min에서 선정한 스트라이커 올타임 순위에서 4위를 기록했다.
- 피파 19 때 처음 아이콘으로 등장한 이후 계속해서 적폐급 스트라이커로 널리 쓰이고 있다. 양발잡이인데다가 부들부들한 체감과 더불어 빠른 속가, 뛰어난 밸런스까지 갖춘 만능형 스트라이커이기에 유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다. FC 온라인에서도 성능은 본가와 마찬가지로 매우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현역 시절 속해있던 팀이 비주류였기에 팀케미의 문제로 본가와 달리 널리 쓰이지는 않고 있다.
- 2018년 에우제비우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RUTH가 개봉했다.
[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포르투갈어 표기법에 의하면 어두 무강세 'e'는 '이'로 옮기기 때문에 '이우제비우'가 맞지만, 국립국어원은 통상적인 관용 표기를 존중해 '에우제비우'로 공식 표기를 확정지었다.[3] 그러나 프로필 상의 키와 실제 키가 일치하지 않는다. 생전의 사진을 보면 180cm인 요한 크루이프보다 훨씬 크고 173cm인 펠레보다 더 크며 심지어, 174cm라 키가 거의 같은 조지 베스트와 비교해도 더 큰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모종의 이유로 에우제비우 본인의 키를 잘못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키는 182~183정도로 보인다.#[4] 중앙 공격수, 세컨드 스트라이커, 인사이드 포워드[5] 호날두, 파울레타에 이은 대표팀 역대 득점 3위.[6] 출처[7] 발음은 '우 판테라 네그라'. 영어로는 'The Black Panther'. 에우제비우를 대표하는 가장 대중적인 별명이다.[8] 발음은 '우 헤이'. 영어로는 'The King'.[9]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포르투갈 대표팀의 월드컵 최고 성적으로 남아있다.[10]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브론즈볼을 에우제비우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82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FIFA 월드컵/수상 문서 참고.[11] 참고로 지금까지 월드컵 득점왕, 챔피언스리그 득점왕, 유러피언 골든슈를 모두 수상한 사람은 에우제비우와 게르트 뮐러, 해리 케인까지 단 3명 뿐이다.[12] 영어로는 The Brazilians. 즉 브라질 사람들이란 뜻.[13]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기 전 사용한 구단 이름. 현재 구단 이름은 CD 막사케니.[14] 에우제비우가 포르투갈 소속으로 월드컵을 뛰었지만 그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모잠비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프리카 축구계는 에우제비우를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로 유럽에 족적을 남긴 축구선수라고 주장한다.[15] 이 때 벤피카가 에우제비우를 지키기 위해 벌인 행각은 한 편의 첩보전을 연상케 하는데 리스본에 오자마자 에우제비우는 알가르브 주 라구스의 한 호텔로 보내졌고 그 후 2주간 호텔 안에 갇혀 살다시피 하였다. 벤피카는 에우제비우의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해 '루트 말로수'(Ruth Malosso)라는 가명까지 지어주었다. 이 때 에우제비우는 고향인 모잠비크로 돌아갈까도 생각하였지만 어머니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고.[16] 1차전 산투스 3:2 벤피카, 2차전 벤피카 2:5 산투스.[17] 에우제비우는 2차전에 1골 기록.[18] 이 3명은 모두 발롱도르를 수상했으며 후일 '유나이티드 삼총사(The United Trinity)'라 불린다.[19] 왼쪽[20] 오른쪽[21] 가운데에 있는 선수는 브라이언 조이로 잉글랜드 국적의 라이트백이였다.[22] 벤피카 소속으로의 공식 경기 기록은 440경기 473골. 당연하게도 벤피카 역대 최다 득점자이다. 덧붙이자면 프리메이라 리가에서는 301경기 317골, UEFA 클럽 대항전에서는 78경기 59골. 벤피카 유니폼을 입고 치른 모든 경기 기록은 715경기 727골.[23] 에우제비우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이다. 포르투갈은 1966년 이후 1986년 그리고 2002년부터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고 있다.[24] 체코슬로바키아는 직전 대회인 1962년 월드컵 준우승을 기록한 강팀이였기에 이 조에서 본선 진출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팀이였다.[25] 터키와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 체코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 루마니아와의 홈 경기에서 결승골과 쐐기골.[26] 에우제비우의 골에 맞춰 북한 아나운서가 "유세비오의 골입니다, 유세비오가 넣었습니다, 또 유세비오, 아, 또 유세비오..." 이런 식으로 비통하게 탄식했다고 한다.[27] 1위는 월드컵 우승을 이끈 바비 찰튼. 그마저도 찰튼과 고작 1포인트 차이로 2위였으니 에우제비우의 무시무시한 활약을 가늠할 수 있다. 1966년 발롱도르 포인트[28] RSSSF 아카이브[29] 포르투갈의 국립묘지이며 바스코 다 가마 등의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쉽게 말하면 현충원.[30] 양발잡이이긴 하나, 볼을 컨트롤하거나 드리블하는데 있어서는 오른발을 더 자주 사용하긴 했다.[31] 에우제비우가 현역이던 이 시기에는 육상 100m 달리기 종목에서조차 10초의 벽을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32] 하지만 악질적인 태클로 인한 몇번의 무릎부상 이후 선수 후반기에는 적극적인 몸싸움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순간적인 가속도로 수비수들을 제치는데 능한 에우제비우의 플레이 특성상 무릎에 걸리는 과부하는 타 선수들에 비해 더 심했으니까...[33]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실제로는 180cm 이상이었을 것이다.[34] 에우제비우와 크루이프가 선수 시절 바닷가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이 사진을 통해 에우제비우의 피지컬을 아주 잘 알 수 있다. 크루이프는 약간 잔근육이 많은 스타일이라면 에우제비우는 몸통부터가 두껍고 근육질로 되어있는 모습.[35] 모잠비크 프로 축구 1부 리그[36] 센터포워드 부문에서 3위를 했음에도 4위였던 마르코 반 바스텐에 밀려 서드팀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37] 이전 문서와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이때 브론즈볼을 에우제비오가 받았다고 했으나 정작 피파 공홈에는 이 당시 수상자 명단은 나오지도 않았다. 1982년 이후 수상자만 피파 공홈에서 인정받을 뿐이고 후대 평가 중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건 신인상 뿐이다.[38] Grand Cross of the Order of Prince Henry[39] Grand Cross of the Order of Merit[40] RSSSF[41] 인터컨티넨탈컵[42] 포르투갈 3부 리그[43] 미국 실내 축구 리그[44] 1, 2, 3위는 각각 펠레, 디 스테파노, 가린샤.[45] 아무래도 당시 에우제비우의 포르투갈 전력과 반 바스텐, 뮐러가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시기의 네덜란드, 독일과의 전력 차이가 컷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던거 같다. 당시 포르투갈은 월드컵에 처녀출전한 아시아 변방의 이름모를 공산국가에게 전반전에만 3대0으로 밀리는 역사에 길이남을 참사를 겪을 예정이었는데, 이 운명을 에우제비우가 포트트릭 원맨쇼로 뒤집고 총 9골을 혼자 넣으며 3위까지 멱살캐리 했다. 뮐러는 그 유명한 베켄바워의 지휘를 받았고 반 바스텐도 오렌지 삼총사의 일원인지라 에우제비우보다 팀 전력이 강했다.[46] 전문가들이 선수를 평가할때 커리어만큼 중요하게 보는 부분이 바로 고점이다. 마르코 반 바스텐은 30살에 커리어를 마무리해서 골 수가 적지만 전성기의 고점이 워낙 높아서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반열에 항상 들어가며, 디에고 마라도나는 유러피언컵 우승이 없는 등 클럽 커리어가 부족하지만 1986 월드컵에서 보여준 엄청난 원맨쇼 우승으로 메시, 펠레와 함께 GOAT 반열로 평가받는다.[47] 조지 웨아와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조지 웨아는 비 유럽 국가 최초의 수상이고, 에우제비우는 흑인 최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48] 러스트 그리고 리스본의 사랑[49] 아프리카에서 후세까지: 에우제비우가 월드컵을 빛낸 방법.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의 경력은 포르투갈 이발소에서의 우연한 대화로 시작되어 시들지 않는 영광으로 끝났다.#[50] 직역하자면, “이 소년은 금이다!”[51] 에우제비우의 플레이를 처음 보고 자신의 코치에게 소리 친 말.[52] 1961년부터 1975년까지 벤피카 소속으로 에우제비우와 함께 벤피카의 전성기를 이끈 팀동료. 포지션은 레프트윙이였다.[53]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키퍼.[54] 강부자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서 유세비오라고 말했다. 심지어 강부자는 경기 중에 골대 옆에서 에우제비우가 오줌싸는 걸(...)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