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초대 서퍽 공작 윌리엄 드라 폴 William de la Pole, 1st Duke of Suffolk | ||
성명 | 윌리엄 드 라 폴 William de la Pole | |
출생 | 1396년 10월 16일 잉글랜드 왕국 서퍽 코튼 | |
사망 | 1450년 5월 2일 영국 해협 | |
아내 | 앨리스 초서 | |
자녀 | 존, 제인(사생아) | |
아버지 | 마이클 드 라 폴 | |
어머니 | 캐서린 스태퍼드 | |
형제 | 마이클, 알렉산더, 존, 토머스, 카트린, 이사벨라, 엘리자베스 | |
직위 | 서퍽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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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말기 잉글랜드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었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2. 생애
1396년 10월 16일 잉글랜드 왕국 서퍽 코튼에서 2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과 2대 스태퍼드 백작 휴 스태퍼드의 딸인 캐서린 스태퍼드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415년 아버지와 형 마이클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아버지는 아르플뢰르 공방전에서 전사했고, 3대 서퍽 백작이 된 형 마이클은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형 마이클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고 아들은 없었기 때문에, 그가 4대 서퍽 백작이 되었다.그는 이후에도 헨리 5세의 원정에 참여했으며, 1421~1422년 노르망디 원정 때 분견대 지휘권을 맡았다. 1423년 샹파뉴에서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의 지휘를 받았으며,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에서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휘를 받아 아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이후 토머스 몬타구의 핵심 부관이 된 그는 1426년 1월 잉글랜드 기병 5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를 침공해 렌 시 인근까지 기마약탈을 벌였다.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4,500프랑을 배상금으로 내는 조건으로 기마 약탈을 중단하게 했다.
1428년 10월, 토머스 몬타구가 오를레앙 공방전을 감행할 때 부관으로서 참여했다. 10월 24일 토머스 몬타구가 오를레앙의 주요 요새인 투렐 요새의 2개 탑 중 하나에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봤다. 그런데 노트르담 탑에 설치된 대포가 그 쪽으로 쏜 포탄이 그의 머리에 명중했고, 그는 한쪽 눈이 찢어지고 얼굴이 짓이겨진 채 쓰러졌다. 이후 멍 슈흐 루와흐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11월 3일에 사망했다. 이후 새 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공성전을 감행했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자명하니 포격을 도시로 끊임없이 퍼붓고 철저하게 봉쇄해서 적을 굶겨 죽이기로 하고, 수비대가 파괴한 수녀원 폐허 위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수많은 목조 요새가 도시 주변에 세워졌지만, 도시를 완전 포위하기에는 병력이 매우 부족했기에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생 세베르, 롬바르드인 용병 테오돌트 드 발페르그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영국군이 미처 봉쇄하지 못한 지점을 통과해 요새로 진입했고 보급품도 꾸준히 전달되었다.
12월 1일 슈루즈베리 백작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포위군을 돕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12월 7일 수비대가 투렐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오를레앙 수비대는 12월 29일까지 도시 외곽에 남아있는 여러 교회를 불태웠다. 이듬해인 1249년 1월,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의 서쪽 요새 주변에 울타리와 도랑으로 연결된 일련의 요새를 세우고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429년 4월까지 오를레앙 동쪽 강둑의 생 루에 추가 요새를 세웠다. 그 동안 보급품이 도시의 북쪽과 북동쪽 도로를 통해 오를레앙으로 들어왔다. 잉글랜드군은 이를 막기 위해 요새화된 기지를 그쪽에 세우려 했지만, 그러기엔 병력이 부족해서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렇게 오를레앙 공방전이 반년째 이어지던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가 구원군과 함께 오를레앙에 입성했다. 이후 잔의 맹활약으로 잉글랜드군이 설치한 요새들이 하나둘씩 공략되었고, 5월 7일 투렐 요새 마저 함락되었다. 이제 오를레앙을 공략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자, 윌리엄과 존 탈보트는 5월 8일에 잔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오를레앙 요새 앞에 집결했다. 그 모습을 본 프랑스군도 전투를 준비했고, 일부 사령관들은 아예 성밖으로 나가서 저들을 쓸어버리자고 외쳤다. 하지만 잔은 이 날이 일요일이기 때문에 전투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출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적이 출격하지 않자 파리로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추격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잉글랜드군이 오를레앙을 공략하지 못한 건 윌리엄이 구원군이 오기 전에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윌리엄은 오를레앙에서 철수한 뒤 오를레앙 주변의 요새들에 군대를 배치시켜 프랑스군의 예상되는 공세를 저지하면서 잉글랜드 겸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의 지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윌리엄 본인은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를레앙에서 9마일 떨어진 루아르 강 남쪽 기슭의 쟈흐고(Jargeau)로 이동했고, 존 탈보트와 토머스 스케일스 역시 비슷한 숫자의 병력을 이끌고 각각 멍(Meung), 보장시(Beaugency)에 자리를 잡았다. 1429년 6월 10일, 프랑스군은 장 2세 달랑송과 잔 다르크의 지휘하에 쟈흐고로 진군했다. 그날 밤 쟈흐고 인근에 이르렀을 때, 일부 잉글랜드군이 숙영지를 세우고 있던 프랑스군을 급습했다. 이에 놀란 병사들이 후퇴하자, 잔 다르크가 직접 달려가서 그들을 진정시키고 잉글랜드군을 도시 안으로 쫓아내게 했다.
다음날, 잔은 성벽 앞으로 다가가서 "이곳을 천국의 왕과 온화한 샤를 왕에게 넘겨준다면 평안을 얻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학살당할 것"이라고 외쳤지만, 잉글랜드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6월 12일, 프랑스군은 공성포를 동원해 성벽을 공격했다. 프랑스군의 포탄 세례로 인해 성벽이 점차 허물어지자, 윌리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판단하고 프랑스 장군 라 이르에게 항복 조건을 협상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장 2세는 자신이 아니라 일개 부관에게 협상을 요청한 것에 모욕을 느꼈다. 잔은 잉글랜드군과 협상해서 희생을 줄이자고 제안했지만, 장 2세는 협상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전투를 피할 수 없게 되자, 잔은 전면적인 공격으로 빨리 끝내자고 제안해 모두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잔은 오를레앙 때 그랬던 것처럼 몸소 최전선으로 달려가서 군기를 든 채 장병들을 독려했고, 병사들은 이에 용기를 얻어 성벽에 사다리를 걸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벽 위의 잉글랜드군이 사다리를 밀어내고 돌을 마구 떨어뜨리는 바람에 사상자가 늘어날 뿐 성이 공략될 기미가 없자, 잔은 몸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 때 한 잉글랜드 병사가 내던진 돌이 그녀의 투구를 정통으로 가격했고, 그녀는 성벽 아래로 떨어져 한동안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았던 그녀는 금세 회복되어 또다시 사디리를 성벽에 걸고 올라갔다.
잔이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 성벽을 기어올랐고, 기어이 성벽을 넘어 쟈흐고 시내로 진입했다. 잉글랜드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끝내 압도되어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인사를 제외하고는 전원 사살되었다. 이때 존은 속절없이 생포되었고, 형제 알렉산더는 전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기욤 르노( Guillaume Renault)라는 젊은 종자에게 생포된 뒤 자신이 종자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욤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고 한다. 그 후 2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1431년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434년 윌링퍼드 성주로 선임되었고,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퍼트와 동맹을 맺었다. 두 사람은 잉글랜드와 조속히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끝내기를 희망했고, 주전파인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와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1435년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한 뒤 글로스터 공작이 섭정을 맡겠다고 나서자, 헨리 보퍼트와 함께 강력하게 반대해 무산시켰다. 이후 잉글랜드의 정국은 험프리 세력과 보퍼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두 파벌간의 심각한 정쟁으로 인해, 잉글랜드 정부는 정책을 일관적으로 펼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437년 11월 16일 16세 생일 직전에 성년으로 인정받고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헨리 6세는 헨리 보퍼트를 멘토로 삼고 그에게 의존했고, 이로 인해 힘의 균형은 차츰 보버트 파로 향했다.
1441년, 험프리의 아내 엘레노어가 점술가들에게 미래가 어찌 될 지를 문의해 헨리 6세가 그해 7월이나 8월에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시달릴 거라는 예언을 들은 일, 눈의 마녀인 마저리 조드메인(Margery Jourdemayne)으로부터 물약을 받아 복용함으로써 임신을 이루려 했다고 했던 일을 발각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험프리는 이 일로 명에가 실추되었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잉글랜드 정계는 윌리엄과 헨리 보퍼트가 장악했다.
1444년 2월, 윌리엄이 프랑스에 외교 대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잉글랜드군이 거듭된 원정 실패로 인해 프랑스 측에 큰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터라, 그는 국내로 돌아온 이후에도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면책권과 책임을 분담할 수행원들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후의 협상 끝에, 1444년 5월 28일 헨리 6세와 앙주의 르네의 딸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2년간의 휴전을 맺는다는 내용의 투르 협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협약에는 멘을 프랑스에 돌려준다는 비밀 협약이 있었고, 이는 그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1446년 8월, 멘을 프랑스에 양도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대중에 알려졌다. 이에 프랑스와의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글로스터 공작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글로스터 공작은 1441년 흑마술 스캔들 이후로 더 이상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왕족이자 1436년 2차 칼레 공방전의 영웅으로서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윌리엄과 헨리 보퍼트 등은 글로스터 공작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음모를 꾸몄다. 1447년 2월 18일, 글로스터 공작과 가신들이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후 서퍽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고호소에 연금되었던 그는 2월 23일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글로스터 공작이 갑작스러운 체포에 큰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고, 또다른 학자들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대의 대다수 민중은 그가 살해되었을 거라 믿었다. 당국은 대중의 의심을 뿌리치기 위해 상처가 없는 그의 시신을 공개했지만, 이후에도 글로스터 공작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걸 막지 못했다.
글로스터 공작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지 2달 후인 1447년 4월 11일, 헨리 보퍼트가 웬체스터 울브시 성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정부의 핵심 인사가 된 윌리엄은 시종장, 잉글랜드 제독에 선임되었고, 펨브로크 백작을 겸임했다. 이후 프랑스 측이 멘을 양도하는 걸 차일피일 미루는 것에 항의하며 무력으로 멘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자, 그는 곧바로 협상을 시작했다. 멘에 지분이 있었던 잉글랜드 지주들이 토지와 재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합의가 지연되었지만, 결국 1448년 3월 15일 잉글랜드인 지주들에게 10년치 지대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주는 조건으로 멘이 프랑스에 양도되었다. 그해 6월, 윌리엄은 프랑스와의 약속을 이행하고 휴전을 성사시킨 공로로 서퍽 공작으로 승진했다.
1449년 3월 24일, 노르망디 방면 잉글랜드군의 아라곤 용병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무시당하자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샤를은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프랑스군이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면서 노르망디를 상실하게 생기자, 윌리엄에 대한 여론의 분노가 폭발했다. 1450년 1월 26일, 의회는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멘을 프랑스에 팔아넘겼으며, 정당한 법 절차를 방해하거나 관리들을 매수한 혐의로 탄핵했다. 그리고 1월 28일, 윌리엄은 체포되어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윌리엄을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헨리 6세는 그를 총애했기 때문에 쉽사리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여론이 더욱 거세져서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이르자, 왕은 어쩔 수 없이 3월 17일 윌리엄에게 런던에 머무르고 있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영주들이 집결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윌리엄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출두한 뒤 귀족 배심원 재판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왕의 자비에 맡겼다. 그러면서 자신은 왕을 위해 오래도록 헌신했으니 그 점을 헤아려달라고 호소했다. 헨리 6세는 고심 끝에 잉글랜드를 배반한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고 선언했지만, 정당한 법 절차를 방해하고 관리들을 매수한 혐의를 문제삼아 그해 5월 1일을 기준으로 5년간 왕궁에서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1450년 3월 17일 밤, 윌리엄은 런던 탑에서 비밀리에 풀려나 런던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2,000여 명의 폭도들이 윌리엄을 필즈의 성 자일스 대성당까지 추격해, 윌리엄을 따르던 하인 일부를 붙잡아 중상을 입히고 재물을 약탈했다. 겨우 탈출한 윌리엄은 4월 30일에 외아들 존에게 "하느님을 화나게 하지 말고 매사에 자비를 구하며, 왕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봉사하며, 어머니를 잘 섬기고, 아첨하는 무리의 조언을 피하고 선하고 유덕하며 진실한 사람들을 동료로 끌어들이며, 자기 생각대로 하지 말고 좋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뒤 하인들과 함께 배 두 척과 보트 한 척을 타고 입스위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윌리엄의 배는 '탑의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배에 의해 가로막혔다. 윌리엄은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에게 자신이 왕명에 따라 칼레로 파견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선장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윌리엄은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믿고 배에 올랐지만, 니콜라스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그를 반역자라 부르며 체포했다. 윌리엄이 헨리 6세의 인장이 찍힌 안전통행증을 내밀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네가 말한 왕(the king)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the crown of England)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곧 잉글랜드의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고 왕국 공동체가 곧 왕권이다.
선장과 선원들은 모의 재판 끝에 윌리엄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5월 2일, 윌리엄은 니콜라스호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녹슨 검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그 후 윌리엄의 시신은 도버의 모래사장에 던져졌고 머리는 나무 말뚝 위에 전시되었다. 그의 하인들은 무사히 해안으로 옮겨졌지만 소지품을 모두 빼앗겼다. 나중에 그의 시신은 수습되었고, 헐에 있는 카르투시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앨리스 초서(1404 ~ 1475): 잉글랜드 수석 집사 토머스 초서의 딸이자 시인 제프리 초서의 손녀. 앨리스는 11살 때 기사 존 펠립과 결혼했고, 1415년 존 펠립이 사망한 뒤 토머스 몬타구와 1421년에 결혼했으며, 1429년 토머스 몬타구가 전사한 뒤 윌리엄 드 라 폴과 결혼했다.
- 존 드 라 폴(1442 ~ 1492): 제2대 서퍽 공작. 1450년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했지만 1453년 헨리 6세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1458년 요크의 리처드의 셋째 딸이자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의 누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재혼했다. 존 본인은 튜더 왕조의 헨리 7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그럭저럭 왕의 신임을 유지했다. 하지만 존과 엘리자베스의 아들들은 요크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고, 헨리 7세 즉위 이후 요크 왕조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았다.
- 사생아
- 제인 드 라 폴(1430 ~ 1494): 윌리엄이 수녀였던 케이의 말린과 성관계를 맺으면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스토너의 기사 토머스 스토너의 부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