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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보퍼트(잉글랜드 추기경)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
Henry Beaufort, Bishop of Winchester
파일:헨리 보퍼트(잉글랜드 추기경).jpg
이름 헨리 보퍼트
Henry Beaufort
출생 1375년
잉글랜드 왕국 랭커스터 공작령
사망 1447년 4월 11일 (향년 72세)
잉글랜드 왕국 윈체스터 울브시 성
아버지 곤트의 존
어머니 캐서린 스윈포드
형제 , 토머스, 조앤
자녀 제인 보퍼트(사생아)
종교 가톨릭 (세례명: 헨리코)
직위 윈체스터 주교, 잉글랜드 추기경, 잉글랜드 총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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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성직자.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 생애

아버지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3번째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 말기와 리처드 2세 치세 초기에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곤트의 존이고, 어머니는 기사 페인 드 로에의 딸이며 존의 기사이자 젠트리인 휴 드 스윈포드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 스윈포드였다. 캐서린이 언제부터 곤트의 존의 정부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휴 드 스윈포드가 사망한 후인 1371년 11월에 처음으로 기록상에서 곤트의 존의 정부로 지목되었다. 그녀는 곤트의 존과의 사이에서 헨리 보퍼트 외에 , 토머스, 조앤[1]을 낳았다.

일찍이 교회에 들어가 교육받은 그는 1396년 초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가 정식으로 결혼하고 1397년 2월 두 사람의 자식들이 합법적인 아이로 인정받으면서 잉글랜드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1398년 2월 27일 링컨 주교로 선임되었고, 1398년 7월 14일에 서품되었다. 1399년 이복 형이자 더비 백작인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03년에 헨리 보퍼트를 영국 총리로 임명했고, 헨리 보퍼트는 1404년 11월 윈체스터 주교로 임명될 때까지 그 자리를 역임했다.

1411년 왕위 계승권자인 몬머스의 헨리 왕자와 함께 헨리 4세의 측근들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가 헨리 4세에게 적발되는 바람에 정계에 참여하는 걸 금지당했다. 그러다가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하고 몬머스의 헨리가 헨리 5세로 등극한 뒤 총리에 재선임되어 1417년까지 맡았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417년 교황 마르티노 5세가 그에게 잉글랜드 추기경 직위를 제안했지만, 헨리 5세의 불허로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1422년 8월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이후 헨리 5세의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 존이 섭정을 맡았지만 프랑스에서 도팽 샤를을 받드는 아르마냑파와 전쟁을 치르느라 대부분 외지에 나갔고, 잉글랜드 국정은 헨리 5세의 또다른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가 맡았다. 그러나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는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헨리 보퍼트는 1424년 잉글랜드 총리에 올랐지만 험프리를 추종하는 세력의 압력을 받아 금방 물러나야 했다. 한편 험프리 역시 에노 여백작 자클린과 결혼한 뒤 그녀의 영지를 되찾아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저지대 국가에 세력을 펼치려 했지만, 헨리 보퍼트를 위시한 반대 세력이 의회를 틀어쥐고 군대 지원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두 사람의 정쟁을 어떻게든 중재하고자 갖은 애를 썼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26년 마침내 잉글랜드 추기경이 된 헨리 보퍼트는 교황 마르티노 5세로부터 후스파를 응징하기 위한 십자군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 1427년 여름, 독일로 건너간 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끄는 십자군 2만 5천 명의 원정에 동행했다. 그러나 십자군 내부에서 후스파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많은 십자군 장병들이 탈영하더니, 8월 4일 타호프 전투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마르티노 5세는 헨리 보퍼트에게 다시 십자군을 모아서 후스파를 공격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헨리 보퍼트는 더 이상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이를 거부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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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헨리 보퍼트와 잔 다르크.jpg
잔 다르크를 심문하는 보퍼트 추기경
폴 들라로슈 작, 1856년

1430년 잔 다르크콩피에뉴 공방전에 참가했다가 부르고뉴파에 체포되었다. 이후 잔은 몇 달간 옥고를 치르다가 루앙으로 보내진 뒤 보페의 주교 피에르 코숑이 주재하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헨리 보퍼트는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 참석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일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는 재판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다. 그가 유일하게 참석한 게 확인되는 날은 1431년 5월 24일에 잔 다르크가 강압에 못 이겨 생트웽 수도원 경내에서 자신이 성녀가 아니며 그동안의 이단적인 주장을 철회하고 교회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선언한 때였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4일 후 참회 선언을 취소했고, 5월 30일 루앙의 시장 광장에서 화형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헨리 보퍼트는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지는 광경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1455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주재한 잔 다르크의 복권 재판에서 "그녀가 화형당하던 날 참석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잉글랜드인까지도 눈물을 쏟아냈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많은 증인들이 헨리 보퍼트가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규탄한 재판에 출석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중 한 명은 잔 다르크를 심판한 재판관 중 한 명이었던 루앙의 참사회원 앙드레 마게리였다. 마게리는 헨리 보퍼트가 보베 주교 피에르 코숑의 설교가 잔 다르크에게 너무 호의적이라면서 불평하자 질책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게리가 어떤 설교를 언급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431년 12월 16일, 헨리 보퍼트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베드퍼드 공작이 프랑스로 데려온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에 참석해 왕의 미사를 집전했다. 1434년 윌링퍼드 성주로 선임된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1435년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한 뒤 글로스터 공작이 섭정을 맡겠다고 나서자, 서퍽 백작과 함께 강력하게 반발해 무산시켰다. 이후 잉글랜드의 정국은 험프리 세력과 보퍼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험프리 파벌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길 희망했고, 보퍼트 파벌은 휴전 협상을 벌이길 원했다. 두 파벌간의 심각한 정쟁으로 인해, 잉글랜드 정부는 정책을 일관적으로 펼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437년 11월 16일 16세 생일 직전에 성년으로 인정받고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헨리 6세는 헨리 보퍼트를 멘토로 삼고 그에게 의존했고, 이로 인해 힘의 균형은 차츰 보버트 파로 향했다.

1441년, 험프리의 아내 엘레노어가 점술가들에게 미래가 어찌 될 지를 문의해 헨리 6세가 그해 7월이나 8월에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시달릴 거라는 예언을 들은 일, 눈의 마녀인 마저리 조드메인(Margery Jourdemayne)으로부터 물약을 받아 복용함으로써 임신을 이루려 했다고 했던 일을 발각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험프리는 이 일로 명에가 실추되었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후 잉글랜드 정계는 헨리 보퍼트와 그의 정치적 동지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장악했다.

1443년 4월 헨리 보퍼트의 추천에 따라 서머셋 공작에 선임되고 기옌의 총사령관에 부임된 헨리의 조카 존 보퍼트가 헨리 보퍼트의 야심찬 계획을 실현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루앙보르도 모두 프랑스군의 공세에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루앙이 공략되면 노르망디가 위험해지고, 보르도가 공략되면 가스코뉴가 위험해지니, 어떻게든 두 곳 모두 지켜야 했다. 하지만 둘다 지키기에는 물자와 병력이 부족했다. 이에 헨리 보퍼트는 가스코뉴에 투입된 프랑스 주력군을 앙주나 푸아투로 유인한 뒤 야전으로 섬멸하고 프랑스에게 휴전을 강요하기로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오래도록 포로 생활을 했고 군사 경력이 일천한 존 보퍼트가 이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에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추기경이 보퍼트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사적인 감정으로 나랏일을 결정한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돌았다. 이후의 원정에서, 존 보퍼트는 막대한 군비를 썼음에도 성과가 보잘 것 없고 노르망디를 약탈해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으며, 쓸데없이 브르타뉴 공국을 침략하는 등의 실책을 연이어 범한 것으로 인해 직무 및 반역 혐의를 묻는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몰리자 코펫 성으로 은퇴한 뒤 1444년 5월 30일에 그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1444년 5월 28일, 윌리엄 드 라 폴의 주도로 투르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조카인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왕비로 삼고, 노르망디 바로 남쪽에 있는 프랑스 북부의 메인 일대를 프랑스에 넘기기로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잉글랜드인들이 메인을 넘긴다는 것에 격분해 글로스터 공작의 정계 복귀와 전쟁 재개를 요구했다. 이에 윌리엄 드 라 폴, 헨리 보퍼트를 위시한 정계 거물들은 험프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음모를 꾸몄다.

1447년 2월 18일, 험프리와 가신들이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후 서퍽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고호소에 연금되었던 그는 2월 23일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험프리가 갑작스러운 체포에 큰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고, 또다른 학자들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대의 대다수 민중은 그가 살해되었을 거라 믿었다. 당국은 대중의 의심을 뿌리치기 위해 상처가 없는 그의 시신을 공개했지만, 이후에도 험프리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걸 막지 못했다. 험프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지 2달 후인 1447년 4월 11일, 헨리 보퍼트는 웬체스터 울브시 성에서 사망했다.

헨리 보퍼트는 링컨의 주교였던 시기에 알려지지 않은 여성[2]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제인 보퍼트를 낳았다. 제인 보퍼트와 그녀의 남편인 기사 에드워드 스트래들링은 헨리 보퍼트의 유언장에서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 에드워드 스트래들링은 1423년 제인 보퍼트와 결혼한 뒤 그해 12월 사우스웨일스의 상공회의소 위원으로 발탁되어 1437년 3월까지 그 직책을 역임했다.


[1] 1379 ~ 1440, 제2대 페러스 남작 로버트 드 페러스와 초혼, 제4대 네빌 남작이자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재혼.[2]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이며 제4대 셜튼 남작 존 셜튼의 부인인 앨리스 피츠앨런이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