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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보퍼트(초대 서머셋 공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
John Beaufort, 1st Duke of Somerset
파일:John Beaufort.Duke of Somerset.jpg
성명 존 보퍼트
John Beaufort
출생 1404년 3월 25일
잉글랜드 왕국 서머셋
사망 1444년 5월 30일 (향년 40세)
잉글랜드 왕국 코펫 성
배우자 블렛소의 마거릿 뷰챔프
자녀 마거릿
아버지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어머니 마거릿 홀랜드
형제 헨리, 토머스, 에드먼드, 조앤, 마거릿
직위 서머셋 백작, 서머셋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3.1.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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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웠다.

튜더 왕조의 개창자 헨리 7세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1]

2. 생애

1404년 3월 25일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장남이자[2] 초대 서머셋 백작인 존 보퍼트와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인 마거릿 홀랜드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1410년 3월 16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헨리 보퍼트가 서머셋 백작위를 물려받았지만, 1418년 9월 25일 루앙 공방전 도중에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그가 서머셋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1421년 동생 토머스 보퍼트와 함께 랭커스터의 토머스의 원정에 참여했지만, 그해 3월 21일 보제 전투에서 참패했고, 동생과 함께 사로잡혔다. 동생 토머스는 1427년 삼촌이자 잉글랜드 추기경인 헨리 보퍼트가 프랑스와 협상한 덕분에 풀려났지만, 그는 1438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동안 어머니가 그를 대신해 서머셋 백작령을 관리했다.

1438년 포로 생활 13년 만에 몸값이 마련되어 풀려난 뒤 1439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40년 존 탈보트의 아르플뢰르 탈환 작전에 참여해 함대를 이끌고 해상을 봉쇄해 공략에 기여했다. 1443년 4월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퍼트의 추천에 따라 서머셋 공작과 켄달 백작에 동시에 선임되었고, 메인과 앙주를 영지로 수여받았으며, 기옌의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뒤, 헨리 보퍼트의 야심찬 계획을 실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루앙보르도 모두 프랑스군의 공세에 위협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루앙이 공략되면 노르망디가 위험해지고, 보르도가 공략되면 가스코뉴가 위험해지니, 어떻게든 두 곳 모두 지켜야 했다. 하지만 둘다 지키기에는 물자와 병력이 부족했다. 이에 헨리 보퍼트는 가스코뉴에 투입된 프랑스 주력군을 앙주나 푸아투로 유인한 뒤 야전으로 섬멸하고 프랑스에게 휴전을 강요하기로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오래도록 포로 생활을 했고 군사 경력이 일천한 존 보퍼트가 이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에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추기경이 보퍼트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사적인 감정으로 나랏일을 결정한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돌았다.

1443년 8월 초, 존 보퍼트는 4,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솔렌트에서 출항해 라 우그 해안에 상륙했다. 이후 아브랑슈에서 지원군과 합세해 병력이 6,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는 먼저 노르망디 총독 요크의 리처드가 지키고 있는 루앙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장병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해, 그들이 노르망디 곳곳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주민들을 핍박하는 걸 막지 못했다. 후에 요크의 리처드의 의뢰로 존 보퍼트의 병사들이 저지른 악행을 다룬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그 분량이 87페이지에 달했다고 한다.

1443년 9월 중순에 존 보퍼트가 이끄는 군대가 앙제 인근에 나타나 앙제 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공성포가 없었기에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그저 주변 지역을 약탈하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던 중 가스코뉴로 진군했던 프랑스군이 공세를 중단하고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존 보퍼트는 가스코뉴의 프랑스군이 이 쪽으로 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북서쪽으로 철군했다. 그러다가 9월 말에 푸앙세 인근에서 포병대와 합류한 뒤,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푸앙세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디에프 공방전을 치르고 있던 장 드 뒤누아가 푸앙세를 지원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을 파견하자, 매튜 고프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분견대 1500명이 샤토공티에에서 이들을 물리쳤다.

10월 중순, 푸앙세 공략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공략을 단념하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브르타뉴 국경의 성채 라 게르슈를 공략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당시 브르타뉴 공국은 잉글랜드 왕국과 막 평화 협약을 맺고 휴전 중이었는데, 잉글랜드군이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린 것에 분노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가 잉글랜드 정부에 항의했다. 이에 당황한 추밀원은 브르타뉴 공작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존 보퍼트에게 브르타뉴 공국에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1443년 12월, 존 보퍼트는 보몽을 점령한 뒤 원정군을 해산한 뒤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그러나 막대한 군비를 썼음에도 성과가 보잘 것 없고 노르망디를 약탈해 민심의 이반을 초래했으며, 쓸데없이 브르타뉴 공국을 침략해 일을 그르쳤다는 비난에 직면했고, 급기야 왕을 알현하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직무 태만 및 반역 혐의를 묻는 재판이 예정되었다. 그는 이 상황에 깊은 절망을 느끼고 코펫 성으로 은퇴했고, 1444년 5월 30일에 그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후 도셋의 윔보른 수도원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직위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형제 에드먼드 보퍼트가 물려받았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잉굴프의 크로일랜드 수도원 연대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가 맡은 사업은 짧은 시간 안에 해결되었고, 공작은 화려하게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 반역죄로 기소되어 왕 앞에 나타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토록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의 고귀한 마음은 이 가장 불행한 소식을 듣고 극도의 분노를 느꼈고, 이토록 큰 치욕의 오점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의 존재를 끝내고 죽음을 앞당겼다."

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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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rgaret Beauchamp of Bletso.png
블렛소의 마거릿 뷰챔프(Margaret Beauchamp of Bletso)

아내 블렛소의 마거릿 뷰챔프(1410년 ~ 1482년)는 3대 블렛소의 뷰챔프 남작 존 뷰챔프의 딸이다. 올리버 세인트 존 경과 초혼하여 사별한 이후 존 보퍼트와 재혼했지만 그와도 사별했으며 이후 6대 웰즈 자작 라이오넬 드 웰즈와 삼혼했다.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리치몬드와 더비 백작부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Lady Margaret Beaufort, Countess of Richmond and Derby)
1443년 5월 31일 1509년 6월 29일 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3]
1대 리치몬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4]
슬하 1남[5]
헨리 스태퍼드 경[6]
1대 더비 백작 토머스 스탠리
  • 사생아
    • 서머셋의 타신: 윌튼의 그레이 기사 레이놀드 그레이의 부인.
    • 서머셋의 존(1444 ~ 1453): 요절.

[1] 외동딸 마거릿 보퍼트의 외아들.[2] 캐서린 스윈포드에겐 장남이었지만 곤트의 존에게는 차남이었다.[3] 윌리엄 드 라 폴의 아들.[4] 발루아의 카트린과 오웬 튜더의 장남.[5] 헨리 7세[6] 초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의 차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