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4 00:46:19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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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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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png
이름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François Ier de Bretagne)
출생 1414년 5월 11일
브르타뉴 공국
사망 1450년 7월 19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442년 8월 29일 ~ 1450년 7월 19일
아버지 장 5세 드 브르타뉴
어머니 잔 드 발루아
형제 안, 이자벨, 마르그리트, 카트린, 피에르 2세, 질
아내 사보이아의 본, 앙주의 욜랑드, 스코틀랜드의 이사벨라
자녀 르노, 마르그리트, 마리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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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남동생인 질 드 브르타뉴를 숙청했지만 본인 역시 얼마 안가 사망했다.

2. 생애

1414년 5월 11일 브르타뉴 공국 반에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인 잔 드 발루아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안[1], 이자벨[2], 마르그리트[3], 카트린[4], 피에르 2세, 질 드 브르타뉴[5]가 있었다. 1427년 9월 15일 몽포르 백작에 선임되었으며, 1442년 8월 29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1443년 10월 중순, 존 보퍼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국경의 성채 라 게르슈를 공략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당시 브르타뉴 공국은 잉글랜드 왕국과 막 평화 협약을 맺고 휴전 중이었다. 그는 잉글랜드군이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린 것에 분노해 잉글랜드 정부에 항의했다. 이에 당황한 잉글랜드 추밀원은 브르타뉴 공작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존 보퍼트에게 브르타뉴 공국에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1444년, 잉글랜드 대사로 활동하다가 브르타뉴로 귀환한 형제 질은 8세의 부유한 상속녀인 프랑수아즈 드 디낭과 결혼해, 샤토브리앙 남작과 길도 성을 포함한 브르타뉴의 여러 곳을 확보했다. 그 후 질은 프랑수아 1세에게 더 많은 상속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다. 프랑수아 1세가 거절하자, 그는 대사로 활동하던 시절 친분을 맺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접근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브르타뉴에 있는 자신의 모든 영지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가 1445년 7월 5일에 잉글랜드로 보낸 편지는 프랑수아 1세의 요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는 이에 분개해 그를 체포하려 했지만, 프랑스 무관장이자 그의 삼촌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만류하자 일단 용서해주기로 했다.

1446년, 노르망디에서 파견된 잉글랜드 궁수들이 질이 다스리던 길도에 들어섰다. 이에 프랑스의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그는 프랑스 국왕의 허락을 받고 1446년 6월 26일 프리장 드 코에티비 장군을 파견해 질을 체포했다. 이후 질은 디낭으로 이송된 뒤 렌으로 옮겨졌다. 이때 그는 렌에 있었지만 질을 만나보기를 거부했다. 그 후 질은 샤토브리앙으로 이송되어 그곳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 질의 재산과 프랑수아즈 드 디낭의 재산은 모조리 압수되어 브르타뉴 공작 직할지가 되었다.이후 브르타뉴 법무장관 올리비에 뒤 브레일의 주관하에 1446년 7월 31일 르동에서 질의 반역죄를 논하는 재판이 거행되었다. 하지만 1447년 헨리 6세가 질의 석방을 위해 브르타뉴에 군사 개입을 하겠다고 위협하자, 재판은 중단되었다.

1448년 10월, 질은 몽콘투어 성으로 옮겨졌다. 질은 그곳에서 학대당하다가 12월에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구원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샤를 7세는 질의 석방을 보내기 위해 프리장 드 코에티비 제독을 파견했다. 코에티비는 1449년 5월 반에 도착한 뒤 그에게 질을 석방하라는 왕명을 전했고, 그는 일단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후, 헨리 6세가 질을 잉글랜드로 보내라고 요구하는 서신이 도착했는데, 이 서신은 사실 피에르 라 로즈라는 자가 위조했다고 알려졌다. 프랑수아 1세는 이 서신에 격분해 질의 석방을 취소했다. 질은 생로뇌의 하두이나예 성으로 옮겨졌다.

1449년 3월 24일, 잉글랜드 용병대장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브르타뉴로 쳐들어가서 푸제르를 공략했다. 휴전 기간 중에 부유한 도시인 푸제르를 점령한 것에 분노한 프랑수아 1세는 노르망디의 잉글랜드 정부에 푸제르를 돌려주고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잉글랜드 정부는 쉬리엔이 단독으로 그렇게 했을 뿐 자기들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탄원했다. 샤를 7세는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잉글랜드군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간주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노르망디를 향한 대규모 공세를 벌였고, 노르망디 전역이 프랑스의 영토로 신속하게 귀속되었다. 잉글랜드 측은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지만 포미니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1450년 4월 25일, 질을 감시하던 올리비에 드 멜 등 간수들이 질을 목 졸라 죽였다. 프랑수아 1세가 명령을 내렸는지, 간수들이 독단적으로 저질렀는지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시 대 사람들은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수아 1세는 공개적으로 질이 가엾게 죽었다며 후회를 표명했다. 그로부터 불과 3개월도 안 된 1450년 7월 19일, 프랑수아 1세는 낭트에서 사망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반의 르동에 있는 생 소뵈르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사보이아의 본(1415 ~ 1430):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의 딸. 1426년 프랑수아 1세와 약혼했으며, 1430년 결혼이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그해 9월 25일에 사망했다.
  • 앙주의 욜랑드(1412 ~ 1440): 앙주 공작이자 나폴리 국왕 루이지 2세와 아라곤의 욜란다의 딸.
    • 르노(1434 ~ 1439): 요절.
  • 스코틀랜드의 이사벨라(1426 ~ 1494):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와 조앤 보퍼트의 딸.
    • 마르그리트(1443 ~ 1469): 에탕프 백작 프랑수아의 부인.
    • 마리(1446 ~ 1511): 로한 자작, 포르호에트 백작 장 2세의 부인.

1450년, 프랑수아 1세는 임종을 눈앞에 뒀을 때 형제 피에르 2세를 브르타뉴 공작 후계자로 선택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정부는 그의 장녀인 마르그리트가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 1409 ~ 1415, 요절[2] 1411 ~ 1442, 라발 백작 기 14세의 부인[3] 1412 ~ 1421, 요절[4] 1415 ~ 1412, 요절[5] 1420 ~ 1450, 샹토세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