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3:19:51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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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왕국 스튜어트 왕조 제3대 국왕
제임스 1세
James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James_I_of_Scotland.jpg
왕호 제임스 1세 (James I)
별칭 포로왕 (the captive)
출생 1394년 7월 25일
사망 1437년 2월 21일 (향년 42세)
재위기간 1406년 4월 4일 ~ 1437년 2월 21일
대관식 1424년 5월 21일
배우자 조앤 보퍼트[1] (1424년 결혼)
자녀 마거릿, 이사벨라, 메리, 존, 알렉산더, 제임스 2세, 엘리노어, 아나벨라
아버지 로버트 3세
어머니 아나벨라 드루몬드
형제 데이비드, 로버트, 마거릿, 메리, 에지디아, 엘리자베스

1. 개요2. 어린 시절3. 스코틀랜드 국왕4. 여담

[clearfix]

1. 개요

중세 스코트어: Iames I
영어 & 스코트어: James I
스코틀랜드 게일어: Seumas I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으로 간혹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1세와 혼동하기 쉽다. 둘 다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왕위 기준으로는 제임스 1세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 스튜어트 가문의 먼 후손이다. 아무래도 영국사가 잉글랜드 위주로 다뤄지기 때문에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더 유명하다.

2. 어린 시절

로버트 3세의 둘째 아들로 그가 8세 때 그의 형인 데이비드가 숙부인 올버니 공작과의 권력 싸움 끝에 패배해 감옥에서 죽었다. 이 때문에 어린 나이에 왕위계승자가 되어 숙부 올버니 공작의 위협을 피해 스코틀랜드 변방에서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그의 지지자들은 제임스를 프랑스로 망명시키려 했으나 올버니 공작과 협력 관계였던 제임스 더글러스 백작이 그들의 계획을 눈치채고 제임스가 있던 곳을 기습했다. 하지만 제임스를 생포하는데는 실패했다. 제임스는 배로 스코틀랜드를 탈출하려 했지만 하필이면 해적들에게 납치돼 잉글랜드 랭커스터 왕조의 초대 왕이었던 헨리 4세한테 보내졌다. 그 후 잉글랜드에서 포로로 18년간 지냈다. 포로 생활은 잉글랜드 왕실이 제임스를 왕족으로 대우해주었기에 편안한 생활을 했다. 특히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왕실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백년전쟁 때는 잉글랜드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3. 스코틀랜드 국왕

잉글랜드 포로 생활 당시 더글러스 백작과 밀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자신의 형 데이비드를 죽인 원수인 올버니 공작 일가를 몰락시켰다. 이후 스코틀랜드 국왕들이 그래오듯 왕권 강화에 나섰으며 반항적인 하이랜드클랜들과 귀족들을 통제했다. 또한 반독립적이던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고 했다. 대외적으로는 헨리 4세의 이복조카였던 조앤 보퍼트와 혼인을 하며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1436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휴전이 깨지면서 프랑스 편에 붙어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록스버러 성 공성전을 이끌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후 퍼스의 블랙프라이어즈 대수도원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아톨 백작 등 그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2]

4. 여담

  • 그의 장녀인 마거릿이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아내[3]였다.

[1] 초대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의 장녀로 곤트의 존의 친손녀이자 헨리 4세의 이복조카.[2]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암살을 주도한 월터 스튜어트 아톨 백작(Walter Stewart, Earl of Atholl, 1360?~1437)의 처형 방식은 매우 잔혹했다고 한다. 첫째 날에는 크레인이 달린 수레에 실려 올라갔다가 떨어진 후 온 몸을 잡아당겨 관절을 뽑고는 을 채운 채 '모든 반역자의 왕'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달궈진 쇠 왕관을 썼고, 둘째 날에는 허들에 묶인 채 에딘버러의 중심가를 걸어가며 조리돌림당했으며, 셋째 날에는 산 채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스튜어트가 보는 앞에서 내장을 불태운 후 심장을 꺼내 찢은 후 불태우는 방식으로 끔찍하게 처형당한 것도 모자라 그 시체는 참수되고 네 토막이 나며 왕국 각 지역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잉글랜드의 교수척장분지형(Hanged, drawn and quartered)과도 유사하다) 암살범의 나이가 당대 기준으로는 매우 고령인 77세였던 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잔혹한 형벌이었는지 당시 교황 대사였던 비오 2세는 "국왕 살해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더 큰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 대한 처벌이 더 큰 것인지" 판단할 수 없어 당황했다고 한다.[3] 루이 11세가 즉위하기 전에 죽어서 프랑스 왕비가 되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