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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픽트 왕국 국왕 카우산틴 1세 Constantine I | |
이름 | 스코틀랜드 게일어: Causantín mac Ailpin (카우산틴 막 알핀) 영어: Constantine I (콘스탄틴 1세) |
출생 | 836년경 |
사망 | 877년 (향년 40~41세) |
재위 | 픽트 국왕 |
862년 ~ 877년 | |
부모 | 키나드 1세 |
형제자매 | 아드 막 키나다 |
자녀 | 돔날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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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픽트 왕국의 국왕이다. 키나드 1세의 아들이자 돔날 1세의 조카로, 돔날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재위 기간 동안 이교도 대군세를 맞아 분투하여 능력을 빛냈으나 결국 바이킹에게 사망했다.2. 스코틀랜드와 이교도 대군세
그의 재위기간을 대표하는 사건은 이교도 대군세이다. 전설에 의하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위대한 바이킹이 잉글랜드 노섬브리아에서 붙잡혀 국왕 엘라 2세에게 처형당하자 그 아들들이 복수를 위해 대규모의 바이킹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략했다는 사건인데, 이는 단순히 잉글랜드 지역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약골 이바르, 흰 옷 할프단 등이 이끄는 바이킹들은 잉글랜드 동남부의 동앵글리아 왕국을 쳐서 굴복시킨 뒤 노섬브리아 남부를 점령하고 노섬브리아에 맹공을 퍼부어 국왕 엘라 2세를 붙잡아 산 채로 등을 가르고 등가죽을 펼쳐 전시하는 피의 독수리 형벌로 처형했다고 한다. 이후 바이킹들은 브리튼 곳곳에 정착지를 마련해서 주변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중서부와 아일랜드 동부에 바이킹 왕국이 세워졌는데, 스코틀랜드 지역에도 그야말로 공습과도 같은 공격이 전개된다. 바이킹들 역시 스코틀랜드처럼 이 시기의 기록이 들쑥날쑥하고 신화 영역에 의존하는 관계로 바이킹 지도자들의 신원을 정확히 밝히는 것은 어려운데, 공식적으로 이 시기 카우산틴 1세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바이킹들은 북구의 왕 고드프레드의 아들들인 이마르, 아믈리브, 외슬, 알반이라고 한다. 이들은 아일랜드에 상륙해 아일랜드 동부를 점령하고 아일랜드 전역에 위명을 떨쳤다. 그런데 각종 기록을 검토한 결과 고드프레드의 아들 이마르가 유명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 약골 이바르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한 가설로 떠오름에 따라 고드프레드가 곧 라그나르, 알반은 흰 옷 할프단과 동일인물로 비정되었다. 아믈리브와 외슬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다른 유명한 아들과 연결되지 않는다. 다만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자체가 실존여부가 불분명한데다가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아 진실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게일어로 이마르, 아믈리브, 외슬, 알반 네 바이킹 지도자들이 스코틀랜드를 마구 공략했다는 것이다.3. 생애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며. 출생연도마저 알 수 없다. 한 가지 알려진 것은 키나드 1세의 사망 당시 그가 너무 어려 삼촌 돔날이 대신 즉위했다는 것이다. 그의 통치 기록은 거의 바이킹들과의 싸움으로 채워져 있다.866년, 고드프레드의 아들 아믈리브와 외슬이 하이랜드 포트리우에 상륙해 많은 조공과 포로를 획득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카우산틴에겐 천만다행히도, 이듬해에 악재가 터져 아믈리브는 아일랜드로 물러갔다. 우선 아일랜드의 아르드리 아드 핀들리어흐[1]가 군사를 내어 바이킹 점령지를 습격해 여러 마을과 항구를 파괴했고, 또 외슬이 자신의 아내[2]를 탐하려 드는 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믈리브는 870년까지 브리튼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아일랜드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870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일랜드를 진정시킨 아믈리브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이번엔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3]를 공격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군사 요충지 덤바튼을 4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점령했다. 여기서 카우산틴은 어부지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패배로 권위를 상실한 어스트라드클라이드 국왕 아르트갈은 키나드의 아들 카우산틴의 사주로 살해당했다고 한다. 아르트갈에 사후에 왕위에 오른 이는 카우산틴의 매부 룬이었다. 이를 통해 픽트 왕국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까지 영향권에 넣는데 성공하고, 결국 200여년 이후 어스트라드클라이드는 스코틀랜드에 완전 합병된다.
이후 871년 혹은 872년에 아믈리브가 다시 한 번 픽트 왕국을 침공하자 카우산틴은 맞서싸워 874년에 아믈리브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아믈리브의 원정을 돕곤 하던 아믈리브의 형제 이마르도 873년에 죽으면서 일단 대규모의 바이킹 침공은 진정되는 듯 했다.[4]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에서, 875년에 알반-즉 흰 옷 할프단의 침략이 시작됐다. 흰 옷 할프단은 상술한 이마르-혹은 약골 이바르, 아믈리브, 외슬의 형제로써, 근래 그의 형제들이 차례대로 죽자 형제들이 남긴 더블린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그의 군대를 반으로 나누어 한 군은 잉글랜드 침략을 계속하게 하고 다른 군은 아일랜드 쪽으로 북상시켰다고 한다. 이 할프단의 군대의 진격로에 픽트 왕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카우산틴 치세 최대의 위기였는데, 수도 스콘 근교의 달러에서 픽트 왕국군은 할프단의 군대에게 거대한 학살로 기록될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기까지 한다. 이는 픽트 왕국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결국 877년 카우산틴 1세는 이 군대와 맞서 싸우던 중 잡혀 처형당했다.
그의 사후 왕위는 카우산틴과 그의 동생 아드 막 키나다의 후손 사이를 오가게 된다.
[1] 아드 핀들리어흐는 키나드 1세의 딸 말 뮈러와 결혼했기 때문에, 카우산틴 1세와는 처남-매부 관계였다.[2] 여기 얽힌 아믈리브의 아내는 키나드의 딸이라고 하는데, 이 여자가 픽트 왕국의 키나드 1세의 딸, 즉 카우산틴 1세의 남매인지 아일랜드 브레가 왕국의 키나드 막 코난의 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3] 현 스코틀랜드 서남부 지역으로, 이 시기엔 픽트 왕국과 민족적으로도 별개로 웨일스와 같은 브리튼인이 지배했다.[4] 물론 소규모 바이킹들의 경제적 목적을 위한 약탈은 종종 있었다. 바이킹 침공이란 정치적 목적을 함께 띈 대규모 원정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