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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기리크 막 둥갈 Giric mac Dúngail | |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 |
이름 | 스코틀랜드 게일어: Giric mac Dúngail (기리크 막 둥갈) 영어: Gregory (그레고리) |
출생 | 832년경 |
사망 | 890년 (향년 57~58세) |
재위 | 알바 국왕 |
878년 ~ 889년 | |
부모 | 돔날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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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5대 국왕.2. 생애
기리크(Giric)라는 이름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시기 어머니와 함께 순교한 성 키리아쿠스와 연관이 있다. <왈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성 키리쿠스는 기리크의 수호성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기원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베르찬의 예언>, <플랜 마이니스트리흐의 연대기>, 라틴어로 기재된 스코틀랜드 국왕 목록인 'Nomina regum', 'Cronica regum scotorum' 등 후대 자료에서는 그를 '둥갈의 아들 기리크라는 의미인 'Giric mac Dúngal' 또는 'Grig fil Dungal'로 표기했다.스코틀랜드 역사가이자 고대 유물 수집가 윌리엄 포브스 스킨(William Forbes Skene, 1809 ~ 1892)은 기리크가 브리튼식 이름 '쿠리그(Curig)'의 게일어 형태이며, 그는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 왕실 혈통이며, 던가일 또는 던나구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켄트 대학교 브리튼 제도 전문 중세사 교수인 알프레드 P. 스미스(Alfred P. Smyth, 1942 ~ 2016)는 그가 키나드 1세의 동생 돔날 1세의 아들이며, 키나드 1세의 직계 후손을 밀어내고 왕위를 쟁취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글래스고 대학교의 스코틀랜드 역사와 문학 교수인 아치볼드 알렉산더 맥베스 던컨(Archibald Alexander McBeth Duncan, 1926 ~ 2017)은 기리크는 작위상으로만 알바 왕이었을 뿐이며, 키나드 1세의 성명 미상의 딸과 결혼한 스트래스클라이드 국왕 룬의 형제로, 오하드 막 룬의 외삼촌이라고 주장했다. 글래스고 대학교의 스코틀랜드 역사 교수인 도비트 브라운(Dauvit Broun, 1961 ~)은 기리크는 왕족이 아니라 게일인 귀족이며, 876~877년 바이킹이 알바 왕국을 침략한 이래 왕실이 일시적으로 무너지자 권력을 쟁취했다고 주장했다.
877년 카우산틴 1세가 바이킹과 전쟁을 치르던 중 사망한 후, 동생 아드 막 키나다가 왕위에 올랐다. 얼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아드는 878년 동료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알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느루림이라는 곳에서 살해당했다고 한다. 15세기 연대기 작가이며 로클레번의 성 세르반 수도원의 원장인 윈튼의 앤드류는 그의 저서 <스코틀랜드 원시 연대기>에서 아드가 후임자인 기리크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그 후 기리크는 스트래스클라이드 국왕 룬의 아들인 오하드 막 룬과 함께 권좌에 올랐다.
기리크와 오하드는 여러 기록에서 11년간 동시에 군림했다고 밝혔다. 다만 그와 오하드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알바 왕의 연대기는 기리크와 오하드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alumnus ordinatorque'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일부 학자들은 'alumnus'를 양자라고 번역하면서, 기리크는 오하드의 양아버지라고 추정한다. 다른 학자들은 기리크가 오하드의 '후원자' 또는 '보호자'라고 추정하며, 아치볼드 알렉산더 맥베스 던컨은 'alumnus'이 auunuculus (삼촌)에 대한 표기 오류라고 주장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켈트어 교수 존 런스 경(Sir John Rhŷs, 1840 ~ 1915)은 기리크가 픽트족 계통의 비 게일인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오하드는 포트리우(Fortriu)의 브리튼인을 통치하는 하위왕이었을 거라고 추정했다. 벤자민 허드슨은 그가 알핀 가가 아닌 다른 소왕국의 왕족 혈통이며 기리크의 형제인 알려지지 않은 왕 카우산틴의 존재를 주장했다. 현재도 기리크와 오하드 간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설이 제기되나 정설은 없다.
14세기 세인트 세르프스 섬의 로크 레번 수도원장이자 <스코틀랜드 원시 연대기>(Orygynale Cronykil of Scotland)의 저자인 윈타운의 앤드류(Andrew of Wyntoun, 1350 ~ 1425)는 그가 픽트족의 억압으로부터 스코틀랜드 교회를 해방시켰으며, 아일랜드와 브리튼섬의 대부분을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이 연대기의 일부 사본에서는 그가 아일랜드가 아닌 버니시아(Bernicia)를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11세기에 집필된 <산크토 쿠스베르토의 역사>(Historia de Sancto Cuthbert)는 이교도 대군세를 이끌었던 할프단이 사망한 뒤 노섬브리아인과 노르드인이 바이킹 노섬브리아 왕국의 제2대 국왕 구스레드(Guthfrith)의 지휘 아래 연합하여 스코트족의 침략을 물리쳤다고 기술했다. 학자들은 기리크가 아일랜드와 브리튼섬 대부분을 지배했다는 기록은 신빙성이 없으나, 그의 치세 아래 알바 왕국이 재건된 뒤 바이킹을 상대로 분쟁을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알바 왕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치세 기간인 885년 6월 16일 '성 키리쿠스의 날'에 개기일식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기리크와 오하드가 추방되었다고 한다. 통치 기간이 11년이라고 기술된 걸 고려할 때, 실제로 추방된 연도는 889년이었을 것이다. <멜로즈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기리크는 890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Nomina regnum>에 따르면, 그는 스트래선 지방의 던던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11세기 말에 게일어 로 작성된 두안 알바나흐(Duan Albanach: 스코틀랜드의 노래)는 아드 막 키나다 사후 기리크과 오하드 막 룬을 생략하고 돔날 2세가 뒤를 이었다고 서술했는데, 여러 학자는 두 사람이 후대 알바 왕실에 의해 반역자로 간주되어 왕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인위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