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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의 험프리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
Humphrey of Lancaster, Duke of Gloucester
파일:Humphrey of Lancaster.Duke of Gloucester.jpg
이름 랭커스터의 험프리
(Humphrey of Lancaster)
출생 1390년 10월 3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망 1447년 3월 4일 (향년 57세)
잉글랜드 왕국 서퍽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장례식 1447년 3월 4일
세인트 알반스 수도원
배우자 에노의 자클린 (1422년 결혼 / 1428년 결혼 무효)
엘레노어 코브햄 (1428년 결혼 / 1441년 결혼 무효)
자녀 아서 플랜태저넷 (사생아) , 안티고네 (사생아)
아버지 헨리 4세
어머니 메리 드 보훈[1]
형제 헨리 5세, 토머스, , 블랜치, 필리파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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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헨리 4세의 아들이자 헨리 5세의 동생. 백년전쟁 시기 헨리 5세의 원정에 참가했고, 헨리 6세의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말년에 반역을 꾀한 혐의로 체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사했다.

2. 생애

1390년 10월 3일, 당시 더비 백작이었던 헨리 4세와 제2대 노샘프턴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의 딸인 메리 드 보훈의 네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헨리 5세, 토머스, , 블랜치[2], 필리파[3]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외할아버지 제7대 해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에서 유래했다. 1399년 아버지가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을 때, 형제 헨리, 토머스, 존과 함께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00년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다른 형제들이 아버지의 치세 동안 무예와 전쟁 기술을 연마하고 웨일즈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전선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는 학자 소양을 기르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1413년 3월 20일 임종을 눈앞에 둔 아버지를 큰형 헨리와 함께 지켜봤고, 이후 즉위한 헨리 5세에 의해 1414년 글로스터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잉글랜드의 대의회관에 선임되었고, 1415년 추밀원 의원이 되었다. 1415년 4월 16일부터 18일까지 이어진 의회에 참석해 전쟁 준비를 논의했으며, 형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던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그의 리처드,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스크루프, 기사 토머스 그레이를 심판하는 재판에 형제 토머스와 함께 판사를 맡아 사형을 선고했다.

1415년 8월 18일 ~ 9월 22일 아르플뢰르 공방전에 참여해 고전 연구를 통해 익힌 공성전 기술을 써먹어서 요새 공략에 기여했으며, 뒤이은 아쟁쿠르 전투에 참여헀다. 전투 도중에 중상을 입고 쓰러지자, 헨리 5세는 그 앞에 서서 프랑스 기사들의 공격을 막아내가며 그를 지켰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헨리 5세는 그를 도버 보안관, 잉글랜드 남동부 해안의 다섯 항구 감독관, 국왕의 중위 등 여러 직위에 선임했다. 141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예를 다해 맞이했다. 홀린셰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손에 칼을 들고 해안가에서 황제를 정중하게 맞이하면서, 지기스문트로부터 잉글랜드 국왕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라고 요구해 황제가 이를 승낙한 후에야 상륙을 허가했다고 한다. 현대 학자들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기에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한다. 이후 1416년 8월 15일, 켄터베리에서 신성 로마 제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영원한 우호와 프랑스에 대한 공동 공격 및 방어를 약속하는 켄터베리 조약이 체결되었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사망했고 아들 헨리 6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헨리 6세는 고작 10개월 밖에 안 된 갓난아기였기에, 험프리의 형인 베드퍼드 공작 존섭정을 맡았다. 이후 존은 오랫동안 프랑스 북부에서 도팽 샤를을 따르는 아르마냑파와 전쟁을 치르느라 바빴기 때문에, 험프리와 헨리 4세의 이복 형제이며 윈체스터 주교인 헨리 보퍼트가 권력을 공유했다. 그러나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는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또한 험프리는 존의 권세를 질투해, 존의 부르고뉴 공국과의 우호 정책을 종종 훼방놓았다.

이 무렵, 에노 여백작 자클린이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당시 자클린이 처한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그녀는 1415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넷째 아들인 투렌 공작 장과 결혼했고, 1415년 12월 15일 장의 형이자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인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장차 프랑스 왕비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1417년 4월 4일 남편 장이 돌연사하면서 16세에 미망인이 되었고, 2달 후인 5월 31일에 아버지 빌헬름 2세 마저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로부터 물려받은 에노와 홀란트, 질랜드의 여백작이 되었지만, 삼촌이자 새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이 세 지역마저 회수하려 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삼촌의 야심을 막을 사람을 남편으로 삼기로 하고, 브라반트 공작 장 4세와 1418년 3월에 결혼했다.

요한 3세는 이 기회에 저지대 국가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으며 에노로 쳐들어갔고, 자클린은 이에 대응해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을 받아 항전했다. 그러나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군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데다 심약한 성격이었던 브라반트 공작 장 4세는 요한 3세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다가 1419년 5월 성 마르틴스딕 조약을 체결해 요한 3세에게 12년간 홀란트와 질랜드에 대한 전적인 양육권을 넘기고 그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은 뒤 전쟁에서 이탈했다. 결국 남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자클린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홀란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마지막 도시였던 레이던 시마저 1421년 초 요한 3세에게 함락당하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자클린은 자신에게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주지 않는 남편 장 4세를 원망했고,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그녀는 교황청에 남편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했으며 성적 결합도 이뤄지지 않았으니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는 요청서를 발송한 뒤 새 남편감을 물색했다. 마침 존의 권세를 질시해 이에 버금갈 세력을 갖추길 희망했던 험프리는 그녀와 결혼하고 저지대 국가에 진출함으로써 세력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험프리와 자클린은 1423년 2월에서 3월 7일 사이에 에식스주 해들리 마을에서 비밀 결혼을 맺었다. 1423년 10월 20일, 헨리 6세는 험프리의 요구에 따라 자클린과 그녀의 후손들이 잉글랜드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특권을 내렸으며, 글로스터 공작부인으로 인정했다.

이후 험프리와 자클린은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와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에게 혼인을 승낙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부르고뉴 공작이자 자클린의 사촌이었던 선량공 필리프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저지대 국가에 잉글랜드가 진출하기를 바라지 않아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험프리, 자클린 부부와 부르고뉴 공국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험프리는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1424년 가을에 자클린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칼레에 상륙한 뒤 11월 말에 몽스에 입성한 후 12월 5일에 몽스에서 에노 백작으로 취임했다. 1425년 1월 3일, 그는 공식 문서에 아래와 같이 서명했다.
"험프리, 신의 은총으로 왕의 아들이자 형제이자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에노 백작, 홀란트, 질랜드, 펨브로크, 프리슬란트의 영주이자 잉글랜드의 시종장."

1425년 1월 6일,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요한 3세는 자식이 없었고, 죽기 1년 전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를 저지대 국가 내 영지들의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선량공 필리프는 요한 3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재빠르게 군대를 보내 두 백작령을 장악하고는, 자클린과 험프리의 결혼은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았기에 간통이며,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자클린의 진정한 남편이니 이 영지들의 주권자라고 선포했다. 이후 험프리와 필리프간의 날이 선 편지가 오갔고, 급기야 양자는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베드퍼드 공작 존이 중재하면서 결투는 취소되었다.

3월 말, 험프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추밀원에 브라반트 공작과의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당국은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부르고뉴 공국과 갈라서기 싫었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험프리가 그렇게 자리를 비운 사이,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을 받은 브라반트군이 공세를 개시해 5월 중순에 몽스를 포위했다. 몽스 주민들은 처음에는 강경히 맞섰지만 결국 6월 13일 항복했다. 험프리의 지지자 일부는 처형되었고, 자클린은 헨트에 감금되어 부르고뉴군의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자클린은 9월 2일 새벽에 남장을 하고 탈출해 홀란트의 주요 도시인 하우다에 도착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 세력인 '대구파'의 반대 세력인 홀란트의 지주 귀족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자클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선량공 필리프는 대구파 도시들에서 대규모 민병대를 소집해 자클린을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대구파 민병대는 자클린의 군대의 매복에 걸려 학살당하고 부대 깃발을 전부 빼앗겼고, 자클린파 민병대가 역습에 나서 대구파 도시들을 향한 습격 작전을 벌였다.

1426년 1월, 선량공 필리프가 파견한 부르고뉴군이 로테르담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자클린은 험프리가 보낸 소규모 잉글랜드 병사들과 함께 항전했지만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부르고뉴군이 로테르담에서 더 진군하지 않는 사이 군대를 신속하게 재건한 자클린은 6월에 대구파의 주요 도시인 하를럼을 포위했다. 플란데런에 주둔한 부르고뉴군이 하를럼을 구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매복에 걸려 괴멸되었다. 이에 선량공 필리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가 하를럼을 구원했고, 자클린 파벌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1427년 4월 17일,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이리하여 부르고뉴 공작은 에노, 홀란트, 질란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모든 명분을 상실했다. 그러나 부르고뉴의 법률가들은 험프리와의 재혼이 합법적인 결혼이 아닌 간통임을 자클린이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통치자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영주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법적인 근거는 거의 없었지만 부르고뉴의 막강한 권력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에노 백령의 삼부회는 결국 부르고뉴 공작을 영주로 인정했다.

이렇듯 상황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지만, 잉글랜드에 있던 험프리는 아내를 돕기 위해 병력을 보내주지 않고 직접 현장으로 가지도 않았다. 이에 자클린은 부르고뉴 공작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그녀의 남편인 험프리가 자신의 숙적이자 장차 공국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고 지적하며, 그와 이혼하면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자클린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여전히 기대해 이 제안을 거부했고, 부르고뉴 공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홀란트를 다시 침공했다. 자클린은 이에 맞서 처절하게 항전하면서, 남편에게 연이어 서신을 보내 구원을 간청했다.

1428년 3월 3일, 험프리는 잉글랜드 의회에 홀란트로 군대를 파견해 자클린을 구해야 한다는 안건을 제출했지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이에 험프리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클린과의 모든 관계를 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는 1425년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스터브러의 기사 레지날드 코브햄의 딸인 엘레노어 코브햄을 정부로 삼고 있었다. 그는 자클린과의 결혼을 없던 일로 해버린 뒤 엘레노어 코브햄과 결혼했다. 이에 런던 시의 여성 대표단이 의회에 출석해 자클린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험프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무시당했다. 험프리에게 버림받은 자클린은 결국 모든 영지의 행정권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게 양도하며 앞으로 그의 허락 없이 결혼할 경우 영주권을 몰수당한다는 내용의 델프트 조약에 서명했다.

그 후 잉글랜드에서 내치를 맡으면서도 종종 헨리 보퍼트와 정쟁을 벌이던 험프리는 1435년 베드퍼드 공작 존이 사망하자 자신이 잉글랜드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헨리 보퍼트가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섭정은 쉽게 정해지지 않았고, 잉글랜드의 정국은 험프리 세력과 보퍼트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험프리 파벌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길 희망했고, 보퍼트 파벌은 휴전 협상을 벌이길 원했다. 두 파벌간의 심각한 정쟁으로 인해, 잉글랜드 정부는 정책을 일관적으로 펼칠 수 없었다.

1436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플란데런 민병대와 연합해 30,000 대군을 이끌고 칼레를 공격했다. 이에 험프리가 10,000명에 달하는 구원군을 이끌고 바이을로 진군했다. 칼레 공방전에서 고전하고 있던 필리프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철수했다. 이후 험프리는 생오메르를 심각하게 약탈한 뒤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이후 그는 전쟁을 지속하길 갈망하는 런던 시민과 여러 영주들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사우스 웨일즈 대법원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퍼트 파벌의 지속적인 방해 공작으로 인해, 그의 의중은 정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한편, 험프리는 플라센티아 궁전을 짓고 그곳에서 화려한 궁정 생활을 하면서 예술가들을 널리 후원했다. 옥스퍼드 대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280권 이상의 원고를 대학에 기증했다. 그의 이름은 옥스퍼드 대학교 보들리언 도서관의 일부인 '듀크 험프리 도서관'에 남아있다. 또한 그는 그리니치 공원을 만들고 듀크 험프리 타워를 세웠는데, 1670년대에 철거되었고 그리니치 천문대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 그는 버리의 시인 존 리드게이트와 존 캡그레이브를 후원했으며, 이탈리아의 많은 주요 인문주의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고 그리스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의뢰했다.

그러던 1441년, 험프리의 아내 엘레노어는 점성가 토머스 사우스웰, 로저 볼링브로크를 불러 미래가 어찌 될 지를 문의했다. 두 사람은 헨리 6세가 올해 7월이나 8월에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시달릴 거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에 대한 소문을 접한 헨리 6세가 심란해하자, 측근들은 다른 점성술사들을 불러 점을 친 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밝혀냄으로써 왕을 안심시켰다. 이후 측근들은 소문을 추적한 끝에 토머스 사우스웰과 로저 볼링브로크, 엘레노어의 고해사제였던 존 홈즈를 체포했다. 엘레노어는 급히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도주해 교회의 보호를 받으려 했지만, 주교단의 심문을 받았다.

엘레노어는 장기간에 걸친 심문 끝에 자기가 눈의 마녀인 마저리 조드메인(Margery Jourdemayne)으로부터 물약을 받아 복용함으로써 임신을 이루려 했다고 고백했다. 결국 엘레노어와 동료 공모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사우스웰은 런던 탑에서 사망했고, 로저 볼링브로크는 교수형 당한 뒤 시체가 4등분으로 쪼개져 잉글랜드 각지에 보내졌으며, 마저리 조드메인은 화형에 처해졌다. 엘레노어는 런던에서 공개 참회를 하고 험프리와의 결혼이 무효로 처리된 뒤 채스터 성으로 보내져서 평생 옥고를 치러야 했다. 험프리는 이 일로 명예가 실추되었고,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험프리는 여전히 왕족이자 1436년 칼레 포위전의 영웅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1446년 8월, 잉글랜드 당국이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와 협상한 끝에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고 휴전을 맺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글로스터 공작의 정계 복귀와 전쟁 재개를 요구했다. 이에 헨리 보퍼트와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을 위시한 정계 거물들은 험프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음모를 꾸몄다.

1447년 2월 18일, 험프리와 가신들이 반역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이후 서퍽의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 고호소에 연금되었던 그는 2월 23일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당시 57세의 고령이었던 그가 갑작스러운 체포에 큰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고, 또다른 학자들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는 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대의 대다수 민중은 그가 살해되었을 거라 믿었다. 당국은 대중의 의심을 뿌리치기 위해 상처가 없는 그의 시신을 공개했지만, 이후에도 험프리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도는 걸 막지 못했다.

험프리의 유해는 하트퍼드셔의 세인트 알반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두번 결혼했지만 적법한 자녀를 얻지 못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부에 의해 2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아들 아서 플랜태저넷은 기사로 활동하다가 1447년경에 사망했고, 딸 안티고네는 제2대 탱커빌 백작 헨리 그레이와 결혼했고, 1450년 헨리 그레이가 사망한 뒤 기사 존 다만시에와 재혼했다.


[1] 험프리 드 보훈의 차녀.[2] 1392 ~ 1409,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의 부인[3] 1394 ~ 1430,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왕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