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3DDFF><colcolor=#000>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Richard of Conisbrough, 3rd Earl of Cambridg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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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
출생 | 1385년 7월 20일 |
잉글랜드 요크셔 코니스버러 성 | |
사망 | 1415년 8월 5일 (향년 30세) |
잉글랜드 햄프셔 사우샘프턴 | |
배우자 | 앤 모티머(1408년 결혼 / 1411년 사망) |
모드 클리퍼드(1411년 이후 결혼) | |
자녀 | 이사벨라, 헨리, 리처드 |
아버지 | 랭글리의 에드먼드 |
어머니 | 카스티야의 이사벨 |
형제 | 에드워드, 콘스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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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헨리 5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장미 전쟁의 주역인 요크의 리처드의 아버지다.2. 생애
1385년 7월 20일 잉글랜드 요크셔 코니스버러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의 네번째 아들이며 초대 요크 공작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이고, 어머니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의 두번째 딸인 이사벨이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그의 친부는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는 형제인 에드워드, 콘스탄스보다 10년 이상 늦게 태어났고, 아버지 에드먼드가 유언장에서 그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헨리 5세와 1415년 사우샘프턴 음모>의 저자인 T.B. 퓨는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이사벨 부부는 성격상 서로 잘 맞지 않았으며, 리처드가 사생아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대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은 이사벨라가 다소 느슨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여러 애인을 사귀었다고 기술했다. 세간에서는 이사벨과 매우 친밀했다고 전해지는 초대 엑서터 공작 존 홀랜드가 리처드의 친부일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나 요크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기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2]
1392년 12월 23일에 사망한 어머니 이사벨은 유언장에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를 상속자로 지명하고 어린 아들 리처드에게 연금 500마르크를 부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따랐다. 1393년 2월 3일 이사벨이 이전에 받았던 요크셔 수입 중 100파운드의 연금을 어린 리처드에게 제공하도록 했고, 그해 3월 16일에는 350마르크의 추가 연금을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1399년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뒤, 그는 새 왕으로부터 어떠한 호의도 얻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왕실 연금은 매우 불규칙하게 제공되었고, 때로는 아예 지급되지 않기도 했다.
1403년 4월부터 1404년 10월까지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웨일스 반군 지도자 오와인 글린두르로부터 헤리퍼드셔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한 것 외에는 눈에 띄는 군 복무를 하지 못했다. 1406년 8월 메섬의 제3대 스크루프 남작 헨리 르 스크루프 등과 함께 헨리 4세의 딸 필리파가 덴마크 국왕 에리크 7세와의 결혼을 위해 덴마크로 떠날 때 호위했다. 1414년 의회에서 캠브리지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 칭호는 형인 제2대 요크 공작 노리치의 에드워드가 가졌던 칭호였다. 그러나 그는 케임브리지 백작으로서 어떠한 토지를 부여받지 못했고, 너무 가난해서 1415년 프랑스 원정으로 갈 예정인 헨리 5세의 군대에 가담할 때 필요한 장비를 제대로 마련할 수도 없었다.
1415년 7월, 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를 암살하고 전 아내 앤 모티머의 형제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지난날 그와 함께 필리파 왕녀를 덴마크로 수행했으며, 현재 그의 계모인 조앤 홀랜드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헨리 르 스크루프, 히튼의 기사이며 누이 이사벨라의 장인인 토머스 그레이도 가담했다. 그가 음모를 꾸민 건 헨리 4세 집권 이래 왕실의 외면을 받으면서 가난에 짓눌린 데다 백작 작위를 수여했으면서 토지를 주지 않은 것에 모욕감을 느꼈고, 이번 프랑스 원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부와 명예를 얻을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15년 7월 31일, 이들이 왕으로 세우려 했던 에드먼드 모티머가 포트체스터 성으로 달려가서 헨리 5세에게 이실직고하면서 음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왕은 즉시 세 사람을 모조리 체포한 뒤 프랑스 원정에 참여한 귀족들을 배심원으로 삼은 임시 재판에 회부했다. 세 사람 모두 음모를 꾸몄다는 걸 솔직히 인정했다. 다만 헨리 르 스크루프는 자신이 음모에 일부러 가담해서 추가 정보를 확보한 뒤 헨리 5세에게 고발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배심원들은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법원은 세 사람 모두에게 교수형 후 시체를 4등분해 전국에 보내는 형벌을 내렸다. 헨리 5세는 코니스버러의 리처드, 토머스 그레이에게는 참수형만 집행하게 했지만, 자신을 배신한 헨리 르 스크루프의 형은 그대로 집행하게 했다. 그는 1415년 8월 5일 사우샘프턴 북문에 세워진 교수대로 끌려가 헨리 르 스크루프와 함께 처형되었다. 사후 사우샘프턴에 있는 성 줄리언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가 처형된 뒤 3개월 후, 형인 노리치의 에드워드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전사했다. 그의 4살짜리 아들 리처드는 아버지 뿐만 아니라 백부의 직위와 재산을 모두 물려받았고, 이를 기반 삼아 잉글랜드 군계와 정계에서 활약하다가 장미 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1461년, 손자 에드워드 4세는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에게 내려졌던 형이 불규칙하고 불법적이라는 이유로 무효화했다.
3. 가족
- 앤 모티머(1390 ~ 1411):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와 엘리노어 홀랜드[3]의 딸.
- 이사벨라(1409 ~ 1484): 히튼의 기사 토머스 그레이의 장남 토머스와 초혼, 초대 에식스 백작 헨리 부르시에와 재혼.
- 헨리: 유년기에 사망.
- 리처드(1411 ~ 1460): 제3대 요크 공작. 장미 전쟁의 주역.
- 모드 클리퍼드(? ~ 1446): 제6대 클리퍼드 남작 토머스 드 클리퍼드의 딸. 리처드와 결혼하기 전에 제6대 라티머 남작 존 네빌과 결혼했다. 리처드가 처형된 후 코니스브러 성 등지에서 조용히 살다가 1446년 8월 26일에 사망해 요크성의 로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 영국 노샘프턴셔주 이스트 노샘프턴셔 자치구 나싱턴의 성 처녀 메리와 모든 성인 성당에 새겨진 스테인글라스. 좌측 인물은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이고, 우측 인물은 제3대 케임브리지 백작 코니스버러의 리처드다.[2] 이후 리처드 3세 유해가 발굴되고 부계 혈통 Y염색체 검사때 에드워드 3세 후손들과 불일치가 나면서 이 소문이 신빙성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장미 전쟁을 이끈 요크의 리처드, 에드워드 4세, 리처드 3세는 코니스버러의 리처드의 아내인 앤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차남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의 손녀이기에 영국 왕실의 피를 이었다.[3]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