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9 06:18:16

아녜스 소렐

프랑스 메트레상티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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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1B589><colcolor=#000000> 아녜스 소렐
Agnès Sorel
파일:Agnes Sorel.jpg
이름 아녜스 소렐
(Agnès Sorel)
별칭 아름다움의 여인 (Dame de beauté)
출생 1422년 프랑스 왕국 투렌
사망 1450년 2월 9일 (28세)
프랑스 왕국 쥐미에쥬
자녀 샤를로트, 마리, 잔
아버지 장 소로
어머니 카트린 드 메녤레
형제 샤를, 루이, 앙드레, 장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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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국왕 샤를 7세의 애첩.

프랑스 역사상 국왕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메트레상티트르이다.

2. 생애

샤를 7세의 사랑을 받기 전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본래 나폴리왕비이자 로렌 여공작인 이자벨의 시녀였는데, 샤를 7세가 이자벨을 만났을 때 샤를 7세의 눈에 들어 애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44년에 샤를 7세와의 사이에서 첫 자식인 샤를로테를 낳고 프랑스 궁중으로 처소를 옮겨 마리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

아녜스는 밝은 금발머리와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샤를 7세에게는 아녜스 외에도 애인이 있었으나 아녜스만큼 사랑받은 여인은 없었다. 샤를 7세는 아녜스에게 화려한 보석 등의 선물을 아끼지 않았으며 성을 하사하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왕이 가장 좋아하는 거처였던 로슈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그만큼 샤를 7세가 아녜스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의 애첩이 된 아녜스는 자신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다녔으며 궁중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덕분에 아녜스의 4명의 형제들은 왕의 총애를 얻어 높은 관직을 얻어냈다. 몇몇 사람들은 아녜스를 '왕관 없는 왕비(la reine sans couronne)'라고 불렀다.

당시에 죄악시되었던 정부이면서 정치적 영향력까지 있었기에 아녜스에게는 여러 정적이 생겼다. 아녜스를 가장 노골적으로 적대한 사람은 샤를 7세의 아들인 도팽 루이였다. 도팽 루이는 아버지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으며, 아버지가 수많은 아이를 낳아준 어머니는 신경도 안 쓰고 애인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엔 1446년에 도팽 루이가 칼을 들고 아녜스를 해치려다가 아녜스가 가까스로 왕의 거처로 도망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샤를 7세는 루이한테 크게 화가 나 루이를 수도에서 추방해 지방으로 보내버렸다.

1450년에 넷째 아이를 출산하고 얼마 안 가 아녜스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아녜스의 죽음이 워낙 갑작스러웠으며 생전에 적이 많았기에 당시 궁중에서는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후대의 주장으로는 이질로 사망했다는 설과 수은 중독으로 인한 사망이었다는 주장 등이 있지만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다.

아녜스가 죽은 후 샤를 7세는 아녜스의 사촌인 앙투아네트 드 메녤레를 정부로 삼아 그녀의 빈 자리를 채웠다.

3. 여담

  • 토플리스 패션의 선구주자이다. 아녜스는 파격적인 노출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냈는데, 앞가슴이 다 드러나는 깊이 패인 옷을 입고 가슴팍을 다이아몬드 목걸이로 장식하고 돌아다녀 프랑스 궁중을 뒤집어엎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아녜스의 초상화는 주로 가슴이 드러나있다. 프랑스의 화가 장 푸케는 아이를 안고 한쪽 가슴을 드러낸 아녜스를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믈룅 성모 마리아 (1451-1452년)
  • 아녜스는 화려한 진미로 식탁을 꾸며 왕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요리사들이 만든 여러 요리는 후대에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양송이트러플, 절인 소 혀 등으로 만드는 가니쉬인 '아녜스 소렐'이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하얀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당나귀 젖으로 목욕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