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21:02:04

디안 드 푸아티에

프랑스 메트레상티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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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D08F><colcolor=#000000> 발렌티누아와 에탕프 여공작
디안 드 푸아티에
Diane de Poitiers
파일:Diane de Poitiers.jpg
이름 디안 드 푸아티에
(Diane de Poitiers)
출생 1499년 9월 3일[1]
프랑스 왕국 드롬 생발리에 성
사망 1566년 4월 25일 (66세)
프랑스 왕국 외르에루아르 아네 성
배우자 루이 드 브레제 (1515년 결혼 / 1531년 사망)
자녀 프랑수아즈, 루이즈
아버지 장 드 푸아티에
어머니 잔 드 바타르니
서명 파일:Signature_of_Diane_de_Poitiers.jp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왕의 애첩2.3. 말년
3. 여담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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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Three-Crescents-Diane-Poitiers.png
디안 드 푸아티에의 문장
세 개의 초승달이 엉켜있는 모습이다.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의 애첩. 앙리 2세의 애첩들 중 가장 유명한 여인으로 앙리 2세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 여성이다.

2. 생애

2.1. 유년기

생발리에의 영주 장 드 푸아티에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푸아티에 가문[2]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었으며 디안은 언어, 예술 등 다방면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디안은 매우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다. 그녀의 외모는 '분홍빛이 도는 하얀 피부, 밤색 머리, 지성미가 보이는 아몬드 모양의 갈색 눈동자, 약간 기울어진 섬세한 코, 뾰족하고 가늘지만 모양이 좋은 입술'로 묘사된다.

1515년에 15살의 나이로 39살 연상인 아네의 영주 루이 드 브레제[3]와 결혼했다. 부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사이가 원만했다고 한다. 1524년에 디안의 아버지 장 드 푸아티에가 부르봉 공작의 반역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을 때, 루이 드 브레제는 장인의 무고함을 호소했고 덕분에 장 드 푸아티에는 참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은 풀려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2.2. 왕의 애첩

파일:Diane-as-Huntress.jpg
디안을 모델로 그려진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

1531년 7월 23일에 남편이 사망하면서 디안은 31살에 과부가 되었다. 남편의 사후 디안은 검은색과 흰색의 옷만 입었다. 이는 디안을 정숙해보이게 하는 동시에 그 미모와 더불어 신비로운 이미지를 자아냈다. 이러한 이미지는 디안의 이름의 어원인 달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와 결부되어 디안은 많은 예술 작품에서 디아나로 묘사되었다.

고위 귀족이었던 디안은 소녀시절부터 프랑수아 1세의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성들의 시녀로 일했다.[4] 남편이 사망할 즈음 디안은 열살이 조금 넘은 앙리 2세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앙리 2세는 아름답고 자상한 디안을 무척 따랐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앙리 2세에게 디안은 어머니이자 당시에 유행했던 기사도 문학에 등장하는 귀부인과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19살이나 났으며 디안의 장녀가 앙리 2세보다 나이가 많았다. 때문에 둘이 남녀관계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533년에 앙리 2세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는 앙리 2세에게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디안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디안과 카트린은 육촌 자매였기에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카트린을 앙리 2세의 신부로 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디안은 앙리 2세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538년 경에 그의 정부가 되었다. 이러한 관계의 변화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신의 내용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이때 디안은 38살, 앙리 2세는 19살이었다.

왕세자의 애첩이 된 디안은 궁에서 높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앙리 2세에게는 다른 애인도 있었지만 디안은 대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며 신분이 낮아 궁에서 무시를 당하던 카트린은 디안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디안의 가장 큰 정적은 앙리 2세의 아버지 프랑수아 1세의 정부 에탕프 공작부인이었다. 그러나 1547년에 앙리 2세가 즉위하면서 디안은 에탕프 공작부인의 궁정 출입을 금지하고 에탕프 공작령을 몰수했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실권이 없었기에 디안은 궁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여성이 되었다.

디안은 애첩이라는 이유로 거들먹거리지 않고 카트린 왕비가 아프면 간호하는 등, 저자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디안의 존재 자체가 카트린에게는 큰 고통이였다. 그녀가 애첩일뿐만 아니라 디안이 어떻게 말하냐에 따라 앙리 2세가 왕비인 카트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으며, 심지어 동침 여부도 디안의 말에 걸려있었다. 앙리 2세는 카트린이 준 리본이 아닌 디안이 준 리본을 달고 마상창시합에 나섰다.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나라에서 손님이 왔을 때 디안과 함께 맞이하고, 그녀와 대놓고 애정행각을 보여 왕비인 카트린을 무색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카트린은 왕실 소유의 아름다운 성인 슈농소 성을 좋아했는데, 앙리 2세는 이 슈농소 성을 디안에게 하사해 카트린에게 굴욕을 줬다. 게다가 앙리 2세는 카트린이 낳은 아이들의 교육을 디안에게 맡겨 카트린의 아이들은 어머니보다 디안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불평할 수도 없는 게 디안은 기본적으로 카트린을 지켜주는 입장이었으며, 디안은 단순한 왕의 정부가 아닌 동반자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디안의 앙리 2세에 대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녀가 정치적으로 간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디안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 디안의 딸이 시집을 간 기즈 가문의 세력이 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즈 가문은 왕의 총신이었던 안 드 몽모레시와 충돌했는데, 이 때문에 몽모레시는 디안을 싫어했다. 중년의 나이에도 디안은 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1548년에 발렌티누아 여공작에, 1553년에 에탕프 여공작에 임명되었다.

2.3. 말년

파일:Diane_de_Poitiers.jpg
발렌티누아와 에탕프의 여공작 디안 드 푸아티에

디안의 권세는 앙리 2세가 사망하면서 사라졌다. 1559년 6월 30일, 앙리 2세는 마상창시합에 참가했다가 눈에 창날이 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앙리 2세는 고통을 호소하다 7월 10일 사망하였다. 이후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장남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였고 궁의 모든 권력은 대비이자 섭정이 된 카트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모든 귄세와 입지를 상실한 디안은 앙리 2세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당했으며, 앙리 2세에게 선물받은 왕가의 보석과 슈농소 성도 반환하라는 처분을 받았다.

그렇게 그녀는 정치에서는 배제되었으나 막대한 재산을 보전할 수 있는 관대한 처분을 받으며, 아네 성에서 조용히 살다가 1566년에 숨을 거두었다.

3. 여담

  • 앙리 2세와 디안 드 푸아티에의 관계는 명나라성화제만귀비의 관계와 비교되곤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디안은 만귀비처럼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는 것.
  • 디안은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당나귀의 젖과 찬물로 목욕을 하고 장시간 말을 탄 후, 적은 양의 식사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잠들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중년의 나이에도 10대와 같은 피부를 유지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주세페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언급된다. 여기서는 아버지 몬테로네 백작의 사면을 조건으로 딸인 디안 드 푸아티에가 프랑수아 1세에게 능욕당한 것으로 나온다.

라나 터너가 주연한 역사 영화 <디안(Diane)>(1956)이 있다. 로저 무어앙리 2세로 나온다.

게임 창세기전 3에 그녀의 이름을 딴 디안 드 푸와티에라는 캐릭터가 있다. 재밌게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이름을 딴 캐릭터인 카트린느 메디시스와 가까운 파트너 사이로 나온다.

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 A급 교역 항해사로 등장한다. 공업품 위주의 스킬을 보유하고 있으며 교환 전략에 특화되어 있는데 유저들이 선호하는 스킬셋과 스탯 밸런스는 아니어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한국의 웹소설 황후 자리를 버리겠습니다에 디안 푸아티에라는 황제의 애첩이 등장한다. 다만 이 캐릭터는 실제 디안 드 푸아티에의 이름만 따 온 인물로 보인다.


[1] 1500년 1월 9일에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2] 정확하게는 푸아티에-발랑티누아 가문. 이 가문은 12세기에 푸아티에 지역에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지역이지만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가문인 푸아티에 가문과는 관련이 전혀 없다.[3] 샤를 7세와 그의 정부 아녜스 소렐의 손자이다.[4] 왕족의 시녀가 되는 것은 고위 귀족 여성들만이 맡을 수 있는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