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5:07:25

피에르 드 브레제

이름 피에르 2세 드 브레제
Pierre II de Brézé
출생 1410년 또는 1412년
프랑스 왕국 브레제
사망 1465년 7월 16일
프랑스 왕국 몽레리
아버지 피에르 1세 드 브레제
어머니 클레망스 카르보넬
아내 잔 뒤 베크크레스팽
자녀 자크 드 브레제
직위 노르망디 세네샬, 푸아투, 앙주, 루앙 보안관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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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노르망디 평정에 기여했다. 146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 대항한 대귀족들에 맞서다가 몽레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2. 행적

1410년 또는 1412년경에 프랑스 왕국 브레제에서 피에르 1세 드 브레제와 클레망스 카르보넬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일찍부터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궁정에서 일했다. 1433년 여름 샤를 7세의 시어머니이자 앙주 공작부인인 아라곤의 욜란다와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샤를 7세의 총애를 받고 권세를 누리던 조르주 1세 드 라 트레무야유를 궁정에서 쫓아낼 때 관여했다. 1434년 메인 백작 샤를 4세 드 메인에 의해 메인 주 출신 대의원에 선임되어 왕립 의회에 들어갔고. 1437년 앙주 보안관, 1440년에는 푸아투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440년 7월 도팽 루이와 여러 대귀족이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상대로 프라그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샤를 7세를 확고하게 지지하고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노르망디와 아키텐에서 벌어진 프랑스군의 일련의 공세에 참여했으며, 요크의 리처드를 상대로 퐁투아즈 공방전에서 두각을 드러낸 공으로 1441년 샤를 7세로부터 에브뢰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왕의 정부인 아녜스 소렐의 후원에 힘입어 시종장이 되었고, 이전에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샤를 4세 뒤 멘에게 손해를 입히면서 왕실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강화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에 많은 귀족들은 반감을 품었고, 1440년 7월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던 그에게 불만이 있었던 도팽 루이는 이 틈을 타 1448년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권을 농단하고 있으며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샤를 7세는 피에르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계속 신임했다. 이후 피에르는 1449년 베르뇌유를 공략했으며, 1450년 포미니 전투에 참여해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이후 노르망디 세네샬에 선임되어 잉글랜드 선박에 대한 해적 행위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1457년 잉글랜드의 샌드위치 항구를 습격했다.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하고 새 국왕이 된 루이 11세는 피에르를 로슈에 가두었다. 하지만 그의 군사적 재능이 아까운데다, 그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자 1462년 초에 석방했다. 이후 왕의 지시에 따라 지난해에 요크 왕조에드워드 4세에 의해 폐위된 랭커스터 왕조의 국왕 헨리 6세의 왕비인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돕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고, 1462년 가을 스코틀랜드로 이동한 뒤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함께 잉글랜드 북부를 여러차례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463년 여름 프랑스로 철수했다.

1464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반기를 들 조짐이 포착되자, 루이 11세는 피에르를 루앙의 보안관으로 선임해 프랑수아 2세를 견제하게 했다. 1465년 대귀족들이 루이 1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어 공익 연맹을 결성하자, 그는 이에 대항해 왕을 지지하는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1465년 7월 16일 몽레리 전투에서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다. 사후 루앙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피에르는 생전에 잔 뒤 베크크레스팽과 결혼해 외아들 자크 드 브레제를 낳았다. 자크는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고, 1462년 샤를 7세와 아녜스 소렐의 딸인 샤를로트 드 발루아와 결혼했다. 그러나 1477년 6월 1일 루브르 성에서 간통중이던 아내와 피에르 드 라베르뉴를 습격해 둘다 죽여버렸다. 이후 파리 의회에 소환되어 100,000리브르의 벌금형을 선고받고 1477년부터 1481년까지 투옥되었고, 영지는 몰수되어 장남 루이 드 브레제에게 넘어갔다.[1] 루이 11세 사후 유죄 판결이 억울하다며 항소했고, 1486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사면되었다.


[1] 본래라면 왕의 이복 여동생을 살해한 것이니 처형되어야 했지만, 루이 11세가 아녜스 소렐과 소렐의 자녀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보였기에 이 정도로 감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