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Mary Wollstonecraft | |
출생 | 1759년 4월 27일 |
영국 런던 스피탈필즈(Spitalfields) | |
사망 | 1797년 9월 10일 (향년 38세) |
영국 런던 서머스 타운(Somers Town)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사상 | 자유주의 페미니즘, 공화주의 |
직업 | 철학자, 저술가 |
배우자 | 윌리엄 고드윈(1797년 결혼) |
파트너 | 길버트 임레이(1794년 동거) |
자녀 | 장녀 패니 임레이(1794 ~ 1816) 차녀 메리 셸리(1797 ~ 1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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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철학자이자 자유주의 페미니즘, 공화주의 사상가이다.2. 생애
영국 런던에 위치한 스피탈필즈(Spitalfields)의 빈곤층 집안 출신으로, 거칠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유약하고 위축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장남에 대한 편애로 인해 제대로 사랑받지도 못했고, 당대의 다른 여성들이 보통 그렇듯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히도 친척들 사이에 지식인이 꽤 많았기 때문에 독학을 통해 저술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고, 이후 귀족 집안의 가정교사로 뛰면서 수준 높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1788년 이후로는 《애널리티컬 리뷰(Analytical Review)》 에 꾸준히 비평을 기고하는 등 비평가로서도 활동했고, 외국어도 익혀서 출판물 번역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이런 활동들을 통해 저자는 방대한 계몽주의 문헌과 사상들을 말 그대로 흡수했다.
1794년에 자신이 동거하던 미국 출신 외교관이자 사업가이며 작가인 길버트 임레이와의 사이에서 딸 패니를 낳은 뒤에 프랑스 혁명 즈음에 헤어지고 1797년에 무정부주의 정치철학자인 윌리엄 고드윈과 법적인 차원에서만 결혼하였고, 고드윈의 첫 자식이자 자신의 둘째인 딸을 출산한 뒤에 열흘 만에 향년 38세로 산욕열로 사망하였다. 이때 태어난 딸이 바로 저 유명한 SF 소설 《프랑켄슈타인》 의 작가인 메리 셸리. 이 인물이 페미니즘적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한편에서는 메리 셸리의 창작세계 속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메리 셸리가 살아생전에 어머니가 쓴 본서에 대해 딱 잘라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너무 일찍 어머니를 신생아 시절에 여의었기 때문에 딸이 어머니의 사상에 대해 영향을 받았을리는 만무하다.
3. 업적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명저를 저술했다. 그 외에도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Men》,[1] 《An Historical and Moral View of the Origin and Progress of the French Revolution》, 《Thoughts on the Education of Daughters》, 《Letters Written in Sweden, Norway, and Denmark》 등의 다양한 종류의 저술활동을 했다. 그 중 일부는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교육, 혁명, 인권 등을 논하는 비문학 도서들이며, 유명인들과 교류한 다양한 서신들은 기행문의 성격도 일부 갖고 있다. 그 외에도 저자는 출판계를 통해서 연결된 의사나 화가 등의 전문직 남성들과 함께 해부학 등의 전문지식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고 하는데, 당시 그들이 저자를 지성인으로 존중해 주는 것을 느끼고서 "지식을 추구하는 남성은 지식을 추구하는 여성을 멸시하지 않는다" 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 본서 7장 각주 7번에 나온다. 그래서인지 본서에서 (특히 251-252페이지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남성관은 대단히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경향이 있다.4. 그 외
비단 여성에 대한 책을 쓰는 것 이외에도 영국 왕실에 반대하는 급진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운동에도 지지를 보냈고, 모든 계급과 신분을 아우르는 보통선거권을 무려 100년의 시대를 앞서서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자 이에 크게 매료되어 파리로 넘어가서 현지에서 오랫동안 체류하기도 했다. 그런데 파리에는 동시대의 프랑스 여권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가 있었음에도 서로 교류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페미니즘의 어머니' 라는 칭호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여성 운동에 관련하여 명확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2]정작 그녀의 외손자 퍼시 셀리(1819 ~ 1889) 남작은 사돈인 친조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으며 서식스 보안관으로 임명되는 등 공직에 있으면서 호의호식해서 공화주의자인 외할머니,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퍼시 셀리가 자녀 없이 사망함으로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직계 자손은 완전히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