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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colcolor=#fff> 예루살렘 왕국 플랑드르 왕조 초대 국왕 고드프루아 Godefroid | |
재위 | 신성 로마 제국 니더로트링겐 공작 고트프리트 5세 (Gottfried V, Herzog von Niederlothringen) (1089 ~ 1100) 예루살렘 왕국의 성묘의 수호자[1][2] (1099 ~ 1100) |
이름 | Godefroid de Bouillon (프랑스어) Godfried van Bouillon (네덜란드어) Gottfried von Bouillon (독일어) Goffredo di Buglione (이탈리아어) Godefridus Bullionensis (라틴어) Godefroy de Bouillon (현대 프랑스어) Godfrey of Bouillon (영어) |
출생일 | 약 1060년 경 |
출생지 | 정확히 알려지지 않음.[3] |
사망일 | 1100년 7월 18일 (향년 40세 추정) |
사망지 |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
매장지 |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성묘교회 |
가문 | 플랑드르(House of Flandre) |
부모 | 부친 외스타슈 2세 드 불로뉴 모친 이드 폰 로트링겐 |
배우자 | ? |
자녀 |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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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지도자. 성묘의 수호자라고 불리던 예루살렘 왕국의 최초의 통치자.플랑드르 가문의 혈통을 따져보면 메로비우스 왕조, 카롤루스 왕조 그리고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다.
2. 이름
그가 십자군 원정에 나서기 전 유럽에서 그가 가지고 있던 주요 작위와 영토는 대부분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것이었다. 그의 부계 가문은 현재 벨기에 남부 지역을 통치하던 불로뉴 백작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오버로트링겐 공작 가문의 딸이었다. 그는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북쪽에 있는 아버지 쪽의 영토는 거의 물려받지 못했다. 그 역시 작위와 재산을 거의 물려 받지 못해 십자군 원정이라는 모험에 참여하게 된 수많은 차남들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그러나 나중에 니더로트링겐 공작이었던 외삼촌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외삼촌이 가졌던 작위와 영토를 물려받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에 나설 때도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으로서 참여했다.그의 출신지인 부용(Bouillon)이 현재 벨기에의 프랑스어 사용지역이므로 현재 국내에서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주로 소개되어 있지만, 부용은 중세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접경 지역에 있어 실제 그가 어떤 언어를 썼고 어떤 식으로 이름을 표현했을지는 정확하게 추정하기 힘들다. 상황에 따라 여러 언어를 혼합해서 썼을 가능성도 높다.[4] 부용(Bouillon)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령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접경 지역이고 오늘날도 그러하듯 당시에도 실제로 중세 프랑스어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높은 지역이긴 하지만, 바로 인접한 곳은 독일어 사용지역인 룩셈부르크 공령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의 영지인 하로트링겐(니더로트링겐)은 저지독일어 사용지역인데, 굳이 따지자면 고지독일어보다는 네덜란드어에 더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던 지역이었다.[5] 따라서 그의 이름을 프랑스식보다 네덜란드식이나 독일어로 표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다. 유럽에서 그의 이름은 통일된 표기가 없고, 각국에서 자기 나라의 방식으로 표기한다.
그의 이름인 Godfried(네)/Gudfred(덴)/Gottfried(독)/Godfrey(영)/Godefroid(프)/Godefroy(프)/Goffredo(이)은 프랑스에서는 사실상 사용되지 않는 이름이며, 당시 북 게르만족들이 사용하던 이름이다. 9세기 이전에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많이 사용하던 이름이며, 대표적으로 9세기의 전설적인 바이킹이자 당시 덴마크 왕이었던 구드프레드(Gudfred)가 유명하다. 프리지아[6]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된 이름이다. 독일에서도 흔하게 사용되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원래 프랑스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이름이지만,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들이 이 이름을 사용하면서 프랑스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모계쪽이 하(下)로트링겐 집안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는데, 로트링겐 가문에서 대대로 이 이름을 많이 써 왔기 때문이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니더로트링겐 공작 고트프리트 3세였고, 그의 외삼촌은 고트프리트 4세였다. 외삼촌이 죽은 후 그는 공식적으로 니더로트링겐 공작 고트프리트 5세가 되었다. 다만 공작이 된지 6년 후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공작위를 내려놓았고, 이후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너무나 유명해졌다. 이 이름은 하(下)로트링겐 공령의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 프리지아에서 많이 쓰이던 이름이다. 때문에 그의 이름은 당대에는 중세 저지독일어식으로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이름은 당대에 Godefroy라는 프랑스식으로 표기된 바 없었다. 때문에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벨기에에서도 현재 그의 이름을 Godefroid de Bouillon라 표기하고 있다.
3. 생애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 다고베르트 2세의 아들 지게베르트 4세의 후손이라는 설이 전한다.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7]와 하(下)로트링겐 공작 고트프리트 3세의 딸 이드 폰 로트링겐의 차남이다. 아들이 없던 외삼촌 하(下)로트링겐 공작 고트프리트 4세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1076년 고트프리트 4세가 죽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로트링겐 공작령을 자신의 아들에게 주기 위해 고드프루아의 상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1082년 고드프루아에게 프랑스 아르덴에 있는 부용을 주고 승인했다. 그리고 고드프루아는 하인리히 4세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며 충성한 대가로 1089년 로트링겐 공작령을 돌려받았다.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자, 참가를 권유받아 본인의 영지인 로트링겐을 팔아치우고[8], 큰형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 막내동생 베르됭 백작 보두앵, 6촌 보두앵 드 부르와 함께 참전했다.
보에몽과 레몽[9] 그리고 주교 아데마르(Adhémar de Monteil)와 함께 십자군 원정의 핵심 지도자였던 고드프루아는 보에몽이 안티오키아 공략전에서 큰 공을 세운 것을 이유로 안티오키아를 장악한 뒤 움직이지 않자 레몽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예루살렘 전투에서 고드프루아는 제일 먼저 성벽의 일부를 확보해 성문을 열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십자군은 레몽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레몽은 거절했고[10], 레몽 다음으로 십자군의 추대를 받은 고드프루아는 '예수께서 가시관을 쓴 곳에서 왕관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예루살렘의 왕이라는 칭호는 거절하고[11], 사실상 왕이지만 '성묘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 Avoué du Saint-Sépulcre)'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을 다스렸다.
사실 고드프루아도 야망이 없이 오로지 종교적 신념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레몽이 안티오키아에서 성창[12]을 찾아내서 그것의 수호자로서 한껏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때 그 진위에 의문을 품은 성직자를 후원하여 종교재판을 성공시킴으로써 성창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데에 일조했음은 물론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파벌을 키워나갔다. 다만 성창의 진위에 대한 태도를 종교적 신념의 척도로 간주하기는 어려운 것이, 해당 사건이 일어난 과정이 매우 어설퍼서[13], 당시 대동한 교황 특사(아데마르)마저 자작극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14] 원정 최후반기인 예루살렘 공략전에 들어서자 레몽 측 파벌에 붙은 제후는 거의 남지 않았다.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가 그나마 오랫동안 붙어있었으나 그도 예루살렘 공략전에서는 고드프루아 측에 붙었다. 레몽에게 먼저 왕위 제안이 돌아갔다고 하는데 사실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은 고드프루아 파벌이었기 때문에 레몽의 입지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애시당초 레몽과 보에몽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었고 인망도 높았던 아데마르를 끼고 행동하면서 눈에 띄게 굴지 않았던 시점부터 처세술을 부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고드프루아는 병사한 아데마르의 후임으로 온 주교 다임베르트의 요구[15]를 위해 이집트 정벌을 준비했다. 다임베르트가 보에몽과 함께 물밑에서 고드프루아를 끌어내릴 음모를 꾸미던 중, 고드프루아는 1100년 7월 18일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증발하듯이 급사했다.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칼라니시는 아크레 공성 와중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어 전사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연대기에는 전사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대신에 1100년 6월 카이사리아에서 질병을 얻었고 훗날 밝혀지기를 카이사리아의 에미르가 독살을 했다고 언급하지만 그 소문의 출처는 전무하다. 기욤 드 티레 역시 앞선 상황에 대한 기록은 전혀 쓰지 않았고, 그가 독이 든 사과를 베어먹은 후 붕어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마르멜로의 재배시기는 사과의 재배시기와 거의 비슷하거나 앞섰다고 보고 있으며, 그리스 시절부터 먹어왔다고 한다. 고대 유럽 문헌에서 사과(Apple)라고 써진 것은 사실 마르멜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사과도 사실 이 마르멜로를 가리키는 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독이 든 사과라는 클리셰가 역사에 최초로 언급된 사례로서, 아무튼 정설은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에서 돌연히 사망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장례 미사는 성묘교회에서 이루어졌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오스만 제국 시절 무덤은 파괴되었는데 시신에 대한 언급이 없고 부장품인 검 한 자루만 무슬림 기록으로 전해진다.
그는 특이하게도 결혼을 했다, 안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16] 이는 중세 왕의 일대기를 대조해보면 매우 이례적인 형식이다. 마치 그 누군가처럼 신성화를 준비하는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의심이 될 정황이다. 12세기 말 예루살렘 왕국의 연대기 작가인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고드프루아가 극단적으로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보다 훤칠했고 늠름한 육체와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의 머리카락과 수염이라는 풍모에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있었다고 한다. 광대한 육체적 힘을 소유했었다 하며 동로마 제국 군대와 싸웠을 때 마치 사자처럼 포효하면서 동로마 제국 병사 7명을 베어버렸고[17], 킬리키아[18]에서 곰과 힘겨루기에서 이기고, 한번은 전투 중 무슬림 장군의 낙타를 일격에 참수했다고도 한다. 이렇듯 그는 예루살렘에서 최초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국가 서사시 마냥 이상화되었다. 십자군의 지도자이자 예루살렘의 왕, 그리고 예루살렘의 입법자로 묘사되었으며, 그는 아홉 위인으로 알려진 이상적인 기사인 세 명의 이교도 헥토르, 알렉산드로스 3세, 율리우스 카이사르, 세 명의 유대인 여호수아, 다윗, 유다 마카베오, 세 명의 기독교인 아서 왕, 카롤루스 대제,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 포함되었다.
후대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백조의 기사로,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들이 선교용으로 이야기 투의 대목을 덧붙여 만든 일종의 성가인 샹송에 줄기차게 등장했고 현대에는 인디아나 존스에서 페트라에서 영생을 살며 성배를 지키는 십자군의 세 명 형제의 기사(외스타슈, 고드프루아, 보두앵) 중 선택 받은 한 명으로 나오고 성혈(The Holy Blood)과 성배(Holy Grail) 및 다빈치 코드(Da Vinci Code)에서는 고드프루아가 예수의 성스러운 혈통(Sang Real)인 메로비우스 왕조의 후손이라는 가상 이론의 핵심 인물로도 나온다. 예루살렘 해방에 대한 십자군의 보고를 토대로 교황령에서 설립을 지시한 시온수도회의 초대 단장이기도 했다. 이 수도회는 1617년 예수회에 통합되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장미십자회라는 비밀결사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실제로 철학자 데카르트, 과학자 라이프니츠가 연관이 있었다. 참고로 독이 들었던 마르멜로는 장미과다.
이렇듯 고드프루아는 중세 교황령의 역사적 기록과 더불어, 유럽의 음유시인에서부터 시작하여 현대 판타지와 픽션 작가들의 픽션에 아우르는 만년 떡밥을 제공했다.
다만 반유대주의가 득세하던 중세 시절에 살던 사람이라 고드프루아 역시 반유대주의 성향이 무척 강했다. 고드프루아는 1096년 여름, 십자군 원정에 나서면서 유대인을 박멸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의 영지 안에서 사전 허가 없이 적대적 조치가 취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하고 나서야 고드프루아는 그 맹세를 철회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고드프루아에 대한 혐오감은 너무나 깊었는데, 한 유대인은 그의 뼈를 갈아서 먼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19]
4. 가족 관계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고드프루아 드 부용 (Roi de Jerusalem, Duc de Basse Lorraine, Comte de Bouillon, Godefroy de Flandre) | <colbgcolor=#FFF3E4> 불로뉴의 백작, 외스타슈 2세 (Comte de Boulogne, Eustache II van Vlaanderen) | <colbgcolor=#FFFFE4> 불로뉴의 백작, 외스타슈 1세 (Comte de Boulogne, Eustache I van Vlaanderen) | |
<colbgcolor=#E4FFEC> 불로뉴의 백작, 보두앵 2세 (Comte de Boulogne, Baudouin II van Vlaanderen) | |||
아델리나 판 홀란트 (Adelina van Holland) | |||
마틸드 드 루뱅 (Mathilde de Louvain) | |||
루뱅의 백작, 랑베르 1세 (Comte de Louvain, Lambert I de Louvain) | |||
게르베르가 폰 로트링겐 (Gerberga von Lothringen) | |||
이드 다르덴-베르됭 (Ide d'Ardenne-Verdun) | |||
하(下) 로렌의 공작, 고드프루아 3세 (Duc de Basse Lorraine, Godefroid III d'Ardenne-Verdun) | |||
하(下) 로렌의 공작, 고텔롱 1세 (Duc de Basse Lorraine, Gothelon I d'Ardenne-Verdun) | |||
바르브 드 르바르탕[20] (Barbe de Lebarten) | |||
도다 오드 드 페리고르 (Doda Ode de Périgord) | |||
페리고르의 백작, 오드베르 2세 (Comte de Périgord, Audebert II de Périgord) | |||
마틸데 폰 슈바벤 (Mathilde von Schwaben) |
5. 매체에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권에서는 십자군 군주 중에선 그나마 상식인 포지션으로 등장하지만[21] 기본적으로 정의의 군대를 돕지 않는 무슬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헛물켜는 모습을 보인다. 막판에 자신들의 죄악을 이해하고 실의에 빠져 죽는다.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예루살렘 국왕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초반에 파티마 왕조 이집트나 아바스 왕조 칼리파[22] 중에서 한 명이 곧바로 지하드를 선포하는데 이때가 고비다. 이건 다른 시기의 예루살렘 왕국도 같아서 파티마조가 멸망한 후의 시나리오에서도 아바스 칼리프는 여전히 남아 있으므로 예루살렘 왕국 플레이는 초반 지하드를 넘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고드프루아는 미혼이라 직계자손이 없으므로 빨리 결혼해서 후사를 보아야 하며, 보험삼아 친척들도 잘 결혼시켜야 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3의 1066년 시나리오에서도 등장한다. 물론 1차 십자군이 시작되기 약 30년 전의 배경이므로 아직 아기다. 프랑스 플란데런 공작령의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의 아들로 등장한다. 동복 형 외스타슈가 아버지의 후계자이므로 역사처럼 십자군 수혜자로 지정이 가능하다. 동생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2대 왕인 보두앵도 같이 등장한다. 다만 아버지 외스타슈 백작이 땅 한개짜리의 한미한 백작이라 십자군 공헌도 1위를 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영지를 늘리자니 고드프루아가 상속권을 얻게되어 수혜자로 지정할 수 없게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컨셉 플레이를 하기에 여러모로 난이도가 높다.
[1] 사실상 1대 국왕이다.[2] 최초의 통치자지만 왕으로서 다스린 것은 아니다.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서는 교황이 인정해야 하지만 당시에 우르바노 2세는 병을 앓고 있었고 예루살렘 함락 2주 후에 함락 사실도 듣지 못하고 사망한다. 그리고 후임 교황(파스칼 2세)의 선출이 늦어져 고드프루아를 왕으로 임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예루살렘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왕으로서가 아니라 수호자로 통치하게 된다(물론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왕이 맞는다. 다만 공식적인 왕이 아닐 뿐이다).[3] 불로뉴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4] 예를 들어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던 사부아 공자 외젠의 경우 한국에서 영어식, 독일식, 프랑스식 등 다양한 이름으로 소개되어 혼란을 주는 인물인데, 실제로 그가 사용한 서명은 Eugenio von Savoy이다. 이탈리아식 Eugenio, 독일식 von, 영어식 Savoy를 혼합한 이름을 서명으로 사용했다.[5] 물론 고드프루아 본인은 귀족이었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당연히 프랑스어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국의 이름 표기법은 인물의 국적을 기준으로 하지, 그가 주로 사용한 언어를 기준으로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비슷한 시기의 잉글랜드 왕들 역시 모두 프랑스어를 썼으며 영어는 아예 못했던 경우도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그들을 '헨리', '리처드'처럼 영어로 부르지 '앙리', '리샤르'와 같이 프랑스어로 부르지는 않는다.[6] 북 네덜란드[7] 헤이스팅스 전투 때 노르만 편으로 참전했던 사람이다.[8] 10세기 이래 로트링겐은 두 개로 나뉘어 있으며, 고드프루아는 하(下)로트링겐 지방을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영지를 상(上)로트링겐 지역을 다스리는 자신의 친척에게 맡기고, 당장에 필요없는 영지만 팔았다고 한다[9] 툴루즈의 레몽 4세[10] 레몽은 안티오키아도 자신이 통치하려는 등 영지에 욕심을 자주 내보였다. 그러나 십자군 제후들은 전공도 부족한 주제에 욕심만 내비치는 그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 레몽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레몽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자신이 땅을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다른 제후들이 반발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내가 나이가 가장 많지만 나도 조금 부담스럽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이렇게 말하면 다른 제후들도 물러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제후들은 이 발언을 듣자 레몽이 포기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보에몽과 함께 많은 공을 세운 고드프루아를 예루살렘의 통치자로 추대했다.[11] 앞서 말했듯이 왕으로 즉위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12] 흔히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불리는 그것.[13] 문헌 등의 역사적 사료를 통해 발굴한 게 아니라, 한 남자가 전날 꿈에 계시를 받았다면서 근거도 없는(예루살렘이나 콘스탄티노폴리스도 아닌) 곳에서 찾아냈을뿐더러, 그 남자가 성직자도 아니라 프로방스의 농부 출신 피에르 바르톨레미라는 점에서 매우 수상쩍었다. 은자 피에르는 성창의 발견과는 무관하다. 당시 종교계 인사 중 최고위인 르 퓌의 아데마르 주교는 이에 대한 의문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미 그가 성창 진본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14] 1차 십자군 원정의 교황 특사는 르 퓌의 아데마르 주교로 추기경은 나선 적이 없다.[15] 예루살렘을 교황에게 헌납하라는 요구로서, 고드프루아는 이에 당장 거점인 예루살렘을 줄 순 없고, 그 대신 이집트를 정벌하고 거점이 생기면 그때 예루살렘을 교황에게 반환하겠다고 전했다.[16]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도착한 직후,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와 싸우다가 곧바로 화해를 하고 나서 그의 양아들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다.[17] 출처: 동방의 부름/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종인 번역/ 책과함께/ 208쪽[18] 터키 동남부 지역. 십자군 전쟁 시기엔 셀주크 제국을 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왕국을 세웠다.[19] 출처: 동방의 부름/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종인 번역/ 책과함께/ 192쪽[20] 바르브와 이 르바르탕 가문 전체는 후대에 조작된 걸로 판명남. 결국 고델로 1세의 아내는 어떠한 이유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평민일 가능성이 높음.[21] 김태권의 만화에서 십자군 세력은 거의 모두 광신도로 등장하며 이슬람을 몰살하려는 학살자나 기도만 죽어라 하는 나사빠진 인간들이 대부분인지라 정상적인 캐릭터가 거의 없다. 레몽 3세와 보두앵 4세 빼고.[22] 아바스조는 셀주크 왕조 페르시아의 봉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