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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데런 가문의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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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House of Flanders네덜란드어: Huis Vlaanderen
프랑스어: Maison de Flandre
플란데런 가문은 플란데런 지방을 지배하던 영역제후 가문이다. 발상지이자 핵심 연고지로서 플란데런 백국과 불로뉴 백국을 세습했다. 후대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조를 건설했으며 에노 백국, 라틴 제국의 황제도 계승했다. 프랑스 왕가나 잉글랜드 왕가와 인척 관계를 맺고 지리적으로 맞닿아 있는 프랑스의 왕, 신성 로마 황제 및 영국의 왕과 봉신 관계나 대립을 통해 세력을 넓히며 유지했다.
2. 기원
초대 영주 보두앵(Baudouin, Iron Arm)의 출신에 대해서는 불명확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인 서 프랑크 왕 샤를 2세의 딸, 유디트 카를링(Judith Karling)과 결혼했다.[1] 두 커플의 혼인은 상당히 아침 드라마스럽다. 당시 카롤루스 왕조에는 특이하게도 여자가 태어나면 결혼을 시키지 않고 수녀원으로 보내는 관례가 있었다. 이 왕조는 당시 최첨단 문물인 살리카법을 따랐는데, 전 왕조 메로베우스 왕조로 딸들을 대대로 시집을 보내 외척으로 활동하며 메로베우스의 영향력을 점점 집어삼켰다.내로남불의 전형인 이 가문들은 자신들이 프랑크 왕국을 역성혁명으로 찬탈하자, 모계로 작위가 흘러가서 작위와 연계된 토지가 다른 나라로 흘러가는 것을 철저히 방지했다. 당시 유디트는 9세기 프랑크의 다른 여인들처럼 남성들에게 소위 순종하는 여성이었고, 데인계 노르드인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영국 섬의 앵글로색슨족 왕들과 연합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맺을려고 했다. 여자가 홀로 고생할까봐 샤를 2세는 딸에게 랭스 대주교로 하여금 무려 여성 최초로 기름 부음을 하여 여왕으로 만든 다음 웨식스 왕국의 국왕 애설울프(Æthelwulf)의 두 번째 왕비로 혼인하게 했다. 그런데 웨식스 왕이 2년 뒤 죽자 그의 아들 애설볼드(Æthelbald)와 재혼한다(...) 그런데 그 아들도 2년 뒤 사망하자 웨식스의 모든 자산을 팔고 프랑크로 되돌아갔다.
부왕 샤를은 딸을 상리(Senlis) 수도원으로 보냈지만, 이미 인생 역경 다 겪으며 젊은 에설볼트의 자유분방한 여왕으로 살았었고 순결하지도 않은 유디트가 그 감옥 같은 자리에 안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샤를 2세는 다른 결혼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이름 없이 무쇠팔(Bras de Fer[2])이라고 알려진 한 평민[3]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 평민을 대담한 자(Baudouin)라고 불렀다. 빡친 샤를 2세는 두 연놈을 바로 교황에게 부탁해 파문시키고 추노꾼을 보냈지만, 유디트의 사촌이자 로타링기아 왕국의 로타리우스 1세의 장남 로타르 2세에게 피신했다. 그들이 알고 갔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타르 2세의 열렬한 지지로 선출된지라, 로타르 2세의 권고와 추천으로 두 커플이 오자 상황을 해명받고 로타르의 부탁으로 파문을 철회했다. 샤를 2세는 3보전진 2보후퇴의 심정으로 그들을 불려들였고 오세르에서 정식으로 결혼시켰다.
별명이 곧 이름이 된 평민 무쇠팔 보두앵[4]은 바이킹의 공격을 막기 위해 북해에 인접하여 바이킹의 침략이 끊이질 않는 셸드강(Scheldt) 남쪽을 영지로 받았다.
샤를 2세는 천하디천한 사위가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리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두앵은 상황을 철저히 관리했고 그 부부 사이에서 보두앵 2세(Baudouin II van Vlaanderen)가 태어났다. 그는 바이킹의 위협을 진압하고 그의 군대와 영토를 빠르게 확장했으며, 결국 샤를 2세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다. 보두앵의 대약진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을 하나의 지역으로 만들었고 조수 간만의 차이로 셀드강에서 하루 두 번의 범람으로 플랑드르(Flandre), 홍수(flood)가 나는 곳이라는 뜻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 제후국 중 하나가 되었다.
3. 성장
보두앵 2세의 어머니 쥬디스의 화려한 결혼 전과로 웨식스 왕국의 알프레드 대왕(Ælfrēd)의 계모이자 형수...였다.[5] 그렇기에 알프레드의 딸 엘프스리스(Ælfthryth)와 자연스럽게 결혼한다. 이후 플랑드르 가문은 카롤루스 대제와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으로 이름을 날린다. 보두앵 2세는 두 아들은 각각 아르눌(Arnoul)과 아델로프(Adalolphe)로 아르눌이 플랑드르를 아델로프가 볼로뉴를 물려받는다.[6] 고드프루아는 아델로프의 후손이다. 카롤루스 왕조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외척이기에 예루살렘 왕국의 고드프루아가 메로베우스 왕조의 후손이라고 칭하는 명분이 이렇게 생긴다.[1] 의외로 오늘날 명문으로 여겨지는 유럽 구 귀족 가문 중에는 중세 초기~성기에 탄생한 경우가 꽤 있는데, 이런 가문들은 한미하였던 가문의 시조가 자기 능력을 선보이면서 처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기존에 이미 혈통적으로 우월한 귀족 가문의 사위가 되는 식으로 대두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중세 전반은 사라센인이나 노르드인, 마자르인 등 이민족의 침입이나 십자군 전쟁, 레콩키스타, 북방 십자군 등 역동적인 사건이 많았기에 이런 식으로 출현하는 입지전적인 가문이 꾸준히 등장하였던 편이다.[2] 팔 씨름 잘하는[3] 다만 영문, 이탈리아 위키에는 유디트를 만나기 전에도 이미 백작이었고 그의 할아버지가 카롤루스 대제의 차남인 카롤루스 이우니오르의 사생아였다고 서술했다. # #[4] 상술하였듯, '팔씨름 잘하는 대담한 녀석'이라는 뜻. 오늘날에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초로 성씨와 이름이 탄생할 때는 다 이런 식이었다. 즉, 개인의 특성이나 별명, 혹은 그 개인에게 기원하는 바를 따라서 본명을 짓고, 연고지나 조상 및 가문의 특성(명망 있는 선조 이름 자체도 포함)을 따라서 성명을 지었는데, 후대에는 본래 어감이나 뜻이 일상에서는 거의 잊힌 채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면은 오늘날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작명하는 순간만큼은 여전히 고려되는 편이다.[5] 단 이는 애설볼드의 압력으로 재혼한 것으로 웨식스 내에서도 그다지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6] 후에 아르눌의 남계가 전멸하자 모계로 아델로프 계열이 플란데런을 차지하게 되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