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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피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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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어원3. 역사
3.1. 4세기까지의 행적3.2. 훈족의 봉신과 게피드 왕국의 건국3.3. 확장과 몰락
4. 역대 게피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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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6세기 다키아를 중심으로 서쪽의 티서 강, 동쪽의 올트 강, 남쪽의 다뉴브 강, 북쪽의 카르파티아 산맥을 경계로 삼아 군림했던 동게르만족의 일파. 4세기에 훈족의 지배를 받다가 454년 네다오 전투에서 훈족을 격파하고 독립한 뒤 게피드 왕국을 건국하고 567년까지 이어가다가 랑고바르드족아바르족의 협공으로 몰락했다.

2. 어원

"게피드(Gepids)"는 고대 로마 시대에 활동한 로마 역사가들로부터 'Gepidae', 'Gipidae', 'Gipedae', 'Gipides' 등으로 다양하게 거론되었다. 요르다네스고트족의 기원과 역사를 다룬 역사서 《게티카》(Getica)에서 "Gepids"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이에 따르면, 게피드는 고트어 단어 "gepanta"에서 유래했으며, 의미는 '늦다', '게으르다'였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게피드족은 고트족과 함께 스칸자(Scandza)[1]에서 비스툴라 강어귀로 이동했다. 이때 게피드족이 탄 배는 고트족이 탄 2척보다 해안에 늦게 도착했고, 이 때문에 게피드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반면, 세비야 대주교 이시도르(600/601 ~ 636)는 《어원 또는 기원에 관한 도서 20권》(Etymologiae sive Origines libri XX)에서, 게피드를 라틴어 "pedes"( "다리")와 인위적으로 연결해, 게피드족은 군마를 타고 싸우는 것보다 걸어서 싸우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게피드'로 일컬어졌다고 설명했다. 12세기의 동로마 제국 어휘 백과사전인 《어원 메가》(Ἐτυμολογικὸν Μέγα)는 게피드족을 '고트족의 아이들'이라는 뜻의 'Gētípaides'(Γητίπαιδες)로 지칭해, 게피드족이 고트족의 분파 또는 가까운 친척이라고 보았다.

현재 학계에서는 요르다네스와 이시도르의 주장 모두 신빙성이 별로 없다고 간주하며, 많은 언어학자는 라틴어 소유격 복수형을 사용할 때 "p"가 실제로 "b"와 유사한 마찰음으로 쓰이는 걸 고려해, 게피드의 원래 게르만어 형태는 영어(독일어 geben, 네덜란드어 geven)에서 여전히 발견되는 게르만어 동사 "to give"를 기반으로 '* Gíbidoz'일 거라 보며, 이 단어의 의미는 '재능있는 자', '보상받는 자', 또는 '관대한 자' 중 하나일 거로 추정한다.

3. 역사

3.1. 4세기까지의 행적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게피드족은 본래 고트족과 함께 스칸자 섬에 살다가 비스툴라 강어귀에 있는 섬으로 이주했다. 이후 고트족은 계속 남하했지만, 게피드족은 섬에 남았고, 그들이 거주하는 섬은 '게페도이우스(Gepedoius: 게피드족의 초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파스티다라는 왕이 섬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부르군트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을 물리쳤다. 그러던 중 '가파른 산맥 인근'에서 고트족과 맞닥뜨렸다. 파스티다는 게피드족이 그동안 확보한 영토가 가파른 산맥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오래 거주하기 힘들다고 여기고, 고트족에게 토지를 달라고 요청했다. 고트족이 이를 거절하자, 게피드족은 갈티스 시 인근 아우차 강변에서 고트족과 맞붙었다. 양군은 어둠이 내릴 때까지 싸우다가 게피드족이 패배를 인정하고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게피드족이 로마 역사가들에게 처음 언급된 시기는 3세기 말이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정복한 '스키타이인'[2] 목록을 나열했는데, 그중엔 게피드족도 있었다. 같은 사료에 따르면, 프로부스 황제는 전쟁 포로로 잡은 게피드족, 반달족, 그레퉁기족을 발칸 반도에 정착시켰다고 한다. 291년 트리어에서 거행된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11번째 추도사에 따르면, 게피드족은 반달족과 연합해 타이팔리족과 일부 고트족 동맹과 격돌했고, 다른 고트족은 테르빙기족, 알레만니의 지원을 받은 부르군트족을 격파했다고 한다. 헝가리 역사가 이슈트반 보나(Istvan Bona, 1930 ~ 2001)는 막시미아누스의 추도사에 언급된 전투는 290년경 다키아 지방에서 벌어졌다며, 요르다네스가 언급한 파스티다와 고트족이 맞붙은 전투와 동일시했다. 반면에, 고고학자 쿠르트 호렌트(Kurt Horent)는 248년 이후 카르파티아 산맥 동쪽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거라고 추정한다. 월터 폴은 전투가 248년에서 291년 사이에 벌어진 게 틀림없다고 추정하며, 카르파티아 산맥 내부 또는 외부에서 벌어졌을 거라고 본다.

4세기 이전 로마 역사가들은 게피드족에 대해 별로 다루지 않았는데, 이는 게피드족의 영토가 로마 제국과 접해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역사가들은 "가파른 산맥"을 언급한 요르다네스의 기술에 근거하여 게피드족이 3세기 말에 티서 강 상류 또는 드니에스터 강 상류를 따라 카르파티아 산맥 인근에 이르렀을 거로 추정한다. 게피드족이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이슈트반 보나는 그들은 260년대에 카르파티아 분지 북동부에 거주했을 거로 추정하지만, 에스테르 이스트바노비치와 발레리아 쿨샤르는 350년 이전에 게피드족이 해당 지역에 정착했음을 확언할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은 티서 강과 코로스 강 사이 일대(현재 헝가리 북동부와 루마니아 북서부)에 매장된 묘지에서 4세기에 제작된 칼, 창, 철제 방패를 발견했다. 많은 학자는 이 무덤이 게피드 전사들의 것으로 추정하며, 이슈트반 보나는 이러한 묘지는 게피드족이 4세기경에 해당 지역을 확실히 장악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3.2. 훈족의 봉신과 게피드 왕국의 건국

405년 또는 406년,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으로 이뤄진 대규모 집단이 훈족의 침략을 피해 다뉴브 강 중부에서 강을 건너 로마 제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 후 중부 다뉴브 일대는 훈족과 그들에게 복속된 동고트족 및 게피드족이 지배했다. 그 후 게피드 전사들은 수십 년간 훈족의 침략 활동에 동행했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훈족의 왕 아틸라는 게피드 왕 아르다리크와 동고트 왕 발라미르를 다른 모든 족장보다 존중했다고 한다. 게피드족은 훈족의 원정에 참여하면서 많은 전리품을 확보했고, 게피드 귀족들은 이를 토대로 부유한 삶을 살았다. 다뉴브 강 연안에서 발견된, 5세기에 살았던 게피드 귀족 여성의 무덤에서는 무거운 은색 포크, 구슬 목걸이, 은색 팔찌, 큰 금귀걸이, 옷과 벨트에 은색 걸쇠가 발견되었다.

451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아르다리크가 이끄는 게피드군은 아틸라군의 우익을 맡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좌익을 맡은 프랑크족과 격돌했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양자는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서로 격렬하게 맞붙어 쌍방 15,0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453년 아틸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그동안 훈족의 지배를 받았던 종족들이 대거 봉기했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게피드족의 왕 아르다리크가 가장 먼저 봉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르다리크는 454년 또는 455년에 판노니아의 네다오 강변에서 루기, 사르마티아, 수에비 연합군과 함께 훈족을 격파하고 아틸라의 장남 엘라크를 처단했다.

네다오 전투 패전 후 훈족 제국은 붕괴하였고, 게피드족은 카르파티아 분지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게피드족은 자신의 힘으로 훈족의 영토를 단독으로 획득했으며, 다키아 전체를 승리자로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에 평화와 연례 조공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그들이 제국의 동맹자임을 확인하고 연간 100파운드의 금을 지급했다. 아파치다(Apachida)와 소메세니(Someseni)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게피드 통치자들이 5세기 후반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음을 암시한다.

3.3. 확장과 몰락

파일:Gepid_kingdom_6th_century.png

게피드족은 수에비족, 스키리족, 사르마티아 및 여러 종족이 형성한 연합에 가담해 판노니아에 정착한 동고트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468년 볼리아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과 연합한 동고트족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473년 동고트 지도자 테오데미르가 동로마 제국이 보조금 지급을 지불한 것을 보복하기 위해 일리리아로 쳐들어가면서 발칸 반도에 혼란이 발생하자, 게피드족은 그 틈을 노려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잇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인 시르미움을 점령했다. 488년 동고트족이 테오도리크 대왕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진군할 때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참패해 국왕 트라우스틸라가 전사했고, 시르미움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그 후 모종의 시기에 시르미움을 다시 확보했지만, 504년 테오도리크가 파견한 피치아 휘하 동고트군에 격퇴되어 시르미움에서 물러났다.

이후 게피드족은 동고트 왕국에 예속되었다가 526년 테오도리크 대왕이 사망하자 독립했다. 그들은 528년 또는 530년 시르미움을 침공했지만 비티게스에게 격퇴되었다. 하지만 동고트 왕국이 내부 갈등과 동로마 제국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지자, 게피드족은 537년 재차 공세를 개시해 시르미움을 최종적으로 접수했고, 시르미움을 중심지로 삼고 다뉴브강 무역로를 독점해 막강한 부를 누렸다. 539년, 동로마 제국군 대부분이 사산 왕조를 막으러 나간 사이, 게피드 왕국은 헤룰리족과 연합해 모에시아를 약탈하고 모에시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 칼루크를 사살했다. 동로마 제국은 게피드족이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고 더 이상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막대한 공물을 바쳐야 했다.

546년에서 548년 사이,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 아우도인을 설득해 다뉴브 강에 접한 옛 로마 속주인 판노니아를 접수하도록 했다. 황제는 이를 통해 판노니아를 지배하는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이 격돌함으로써, 자국의 영토를 침탈하는 게피드족을 억제하기를 희망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의 도시였던 시르미움을 상실한 것에 분노했으며, 어떻게든 보복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후 랑고바르드족과 게피드족간의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았고, 랑고바르드족의 왕 아우도인과 게피드 왕국의 왕 투리신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궁정에 사절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랑고바르드족의 편을 들어 그들을 공식적인 동맹으로 삼았고, 게피드족에게 대항해 군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549년,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이 전장에서 대치했다. 이때 투리신드는 아우도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아우도인은 이를 수락했다. 얼마 후 일리리쿰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인 요한네스가 10,000명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도착했지만, 전쟁은 이미 끝났다. 요한네스는 그 대신 게피드족의 동맹 부족인 헤룰리족과 맞붙어 상당한 적병을 사살한 뒤 돌아갔다. 550년 게피드족과 랑고바르드족은 다시 전쟁을 재개했지만, 양자는 서로와 맞붙는 걸 껄끄러워해 대치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아우도인이 먼저 2년간 휴전하자고 제안했고, 투리신드는 받아들였다.

그 후 투리신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압력을 행사하고자 쿠트리구르족과 동맹을 맺고 이들이 550년 또는 551년에 다뉴브 강을 건너 일리리쿰을 공격해 약탈을 자행하도록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에 대응해 동맹 부족인 우티구르족을 동원했고, 우티구르족은 크림 테트라크사이트 족과 연합해 쿠트리구르족의 본거지인 흑해 북서부 해안을 침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쿠트리구르족은 발칸 반도를 급히 떠나 본거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투리신드는 포기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을 적대하는 슬라브 계열 부족인 스클라베니족과 동맹을 맺고, 자국이 다뉴브 강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걸 이용해 스클라베니족을 동로마 제국 영토로 수송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대가를 받았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탈리아의 동고트족에게 대항해 원정군을 보내려 했지만, 투리신드의 연이은 훼방으로 인해 진척이 잘 되지 않자, 투리신드와 화해하려 했다. 투리신드는 이에 응하기로 하고, 사절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족이 맺은 것과 같은 수준의 동맹을 맺고, 원로원 의원 12명이 조약을 지지하겠다고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에 응했고, 551년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이탈리아로 진군할 때 게피드족 400명이 참여했다. 그 후 552년 휴전이 만료되자 투리신드와 아우도인은 다시 전쟁을 벌였다. 동로마 제국은 랑고바르드족이 나르세스를 돕기 위해 전사 5,500명을 보내준 것에 보답해 이에 상응하는 병력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게르마누스 장군의 아들인 유스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 아라티우스, 헤룰리족의 수아르투아스, 아우도인의 처남인 아말라프리드 등으로 구성된 동로마군이 결성되었지만, 울피아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느라 대부분이 그쪽으로 이동했고, 아말라프리드가 이끄는 군대만이 랑고바르드족과 합세했다. 이후 시르미움 서쪽에서 벌어진 아스펠트 전투에서, 게피드족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투리신드의 아들 투리시모드는 아우도인의 아들 알보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게피드족에, 제국에 복종하고 공물과 보조병을 바치며, 다키아 리펜시스와 싱기두눔 일대를 반환하는 대가로 그들의 주권을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했고, 투리신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560년경 투리신드가 사망한 뒤 쿠니문드가 게피드족의 왕이 되었다. 565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과의 대결이 임박하자, 쿠니문드는 새로운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누스 2세에게 시르미움을 넘겨줄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정작 동로마 제국군은 출동하지 않았다. 그 사이, 랑고바르드족은 아바르족과 동맹을 맺었다. 파울 부제에 따르면, 567년 쿠니문드 왕이 이끄는 게피드족이 랑고바르드족을 선제공격했지만, 아바르족의 원군에 힘입은 랑고바르드족이 완승을 거두었고, 알보인은 쿠니문드를 주살한 뒤 수급을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와인 잔으로 만든 후 허리띠에 착용했다고 한다. 일부 사료에 따르면, 바얀 1세가 쿠니문드를 죽이고 수급을 벤 뒤 알보인에게 넘겼다고 한다. 또한 알보인은 쿠니문드의 딸 로자문드를 아내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대우했고 온갖 학대를 자행했다. 로자문드는 이에 복수하고자 572년 근위대원 페레도를 포섭해 알보인을 살해했다.

한편, 게피드 왕국의 중심지였던 시르미움은 별다른 전투 없이 동로마군에 접수되었다. 이리하여 게피드 왕국은 무너졌고, 게피드족은 랑고바르드족과 아바르족의 치하에 들어갔다. 568년 알보인이 이끄는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많은 게피드족이 따라갔지만, 나머지는 옛 왕국의 영역에 남아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았다. 동로마-아바르 전쟁이 한창이던 599년과 601년, 프리스쿠스, 페트루스, 코멘티올로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게피드족이 거주하는 많은 지역을 황폐화했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시모카트의 테오필락토스에 따르면, 630년 동로마군이 아바르족의 영토에 진입해 게피드족이 잔치를 벌이던 현장을 습격해 30,000명을 생포했다고 한다. 이후 게피드족은 역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9세기 후반의 기록에 따르면 게피드족이 여전히 티자강 동쪽에서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며, 이를 뒷받침하듯 고고학 기록에서도 아바르 칸국 시대에 게피드족 사회 조직이 견재했음을 시사하는 발굴들이 등장했다. 한편, 집단유전학 연구에서도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게피드족이 아바르족과 섞이지 않고 자신의 혈통과 문화를 지켰음을 시사한다.

4. 역대 게피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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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르다네스는 머나먼 북방의 거대한 섬이라고 묘사했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한다.[2] 현재 학계에서는 고트족 계통 종족이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