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요르다네스 (라틴어: Jordane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동로마 제국의 사제,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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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로 동게르만계 고트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다룬 《게티카》의 저자이다.2. 행적
본인이 《게티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알라노비야무트(Alanoviiamuth)였고, 할아버지는 파리아(Paria)로 이란계 알란족의 지도자였던 칸다크(Candac) 왕의 비서였다고 한다. 또한 요르다네스 자신은 칸다크 왕의 누이의 아들인 군티기스(Gunthigis)의 비서였다고 소개했다."개종하기 전에는 무식했다."
라고 한 것을 볼 때 가톨릭을 처음부터 믿은 것이 아니라 게르만 다신교 또는 아리우스파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다른 저서인 《로마나》의 서문에서 비길리우스 덕분에 각성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 '비길리우스'라는 인물이 교황 비질리오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나 불확실하다. 일부 사본에서는 그가 자신을 주교라고 밝힌 대목이 있고, 일부는 라벤나의 주교라고도 하나, 라벤나 주교 명단에는 요르다네스의 이름이 없다. 이외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3. 《게티카》(Getica)
요르다네스는 고트족의 기원과 역사를 다룬 역사서 《게티카》(Getica)[1]를 집필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의 집필 목적을 밝혔는데, 자신이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의 《고트족의 역사》 12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전해들은 카시타리우스(Castalius) 형제가"《고트족의 역사》 요약본을 보내달라"
고 요청했기에, 집필 중이던 《로마나》를 중단하고 서둘러 요약본을 집필해야 했다고 밝혔다.이 책은 비스툴라 강(비스와강) 하구에 면해 있고,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와 폼포니우스 멜라의 저서에서 언급된 스칸드자(Scandza)라는 큰 섬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요르다네스는 이 스칸드자 섬이 고트족을 포함한 수많은 종족들의 고향이며, 먼 과거에 고트 왕 베리크가 고티스칸자(Gothiscandza)로 종족들을 이주시키면서 장대한 고트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요르다네스의 설명에 따르면,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밝힌 트라키아인들 중 가장 용감하고 가장 정의로운 종족이었던 게타이족의 반신 잘목시스(Zalmoxis)가 고트족의 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트족은 베소시스(Vesosis)라는 이름의 이집트 파라오와 싸웠으며, 그리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과 분쟁을 치른 뒤 소아시아 서부의 트로이와 발칸 반도 서부의 일리리아를 약탈했다고 한다. 이렇듯 신화적인 이야기로 일관하던 《게티카》는 서기 3세기에 고트족과 로마군 사이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지는 대목에서부터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대목으로 넘어간다. 이 책은 동로마 제국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고트족을 물리치는 대목에서 마무리되며, 요르다네스는 고트족을 무찌른 로마인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밝혔다.
이 책에 서술된 고트족의 행적이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학계의 논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요르다네스가 카시오도루스의 《고트족의 역사》를 그대로 요약하지 않고,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를 덮어썼으며, 서기 6세기의 종족들과 그 이전의 종족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가령, 요르다네스는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게타이족이 곧 고트족이라고 주장했고, 타키투스, 대 플리니우스,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언급한 베네디족은 6세기부터 역사에 등장하는 슬라브족과 동일하다고 봤다. 여기에 다키아를 고트족과 혼종하기도 했다. 일부 동유럽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6세기 이전부터 슬라브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했지만, 학계는 구체적인 고고학적, 역사학적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덴마크의 역사가 아르네 쇠비 크리스텐센은 《게티카》는 전적으로 조작된 기록이며 요르다네스가 설명한 고트족의 기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반을 둔 것일 뿐이고, 로마 세계가 이민족의 침략으로 무너진 뒤 새롭게 권력을 얻은 자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캐나다의 역사가 월터 고파트는 《게티카》가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홍보하기 위한 선전 도구였다고 주장했다. 고트족과 그들의 야만적인 사촌들은 로마 세계에 속하지 않으니, 서부 지역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확장은 정당하다는 걸 입증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요르다네스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완전히 배제하는 것 역시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가령 고트족이 비스툴라 강에서 기원했다는 요르다네스의 주장에 대해, 오스트리아 역사가 헤르비히 볼프람은 서기 1세기와 2세기에 포메른 동부 일대에 거주했던 구토네족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이주한 '고트족'의 후예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요르다네스는 '크니바' 왕을 언급했는데, 6세기에 출간된 《고트 왕들의 계보》에는 그 이름이 없으며, 3세기의 위기가 한창이던 251년 데키우스 황제의 로마군을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섬멸한 고트족의 지도자 크니바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로 볼 때, 요르다네스는 단순히 카시오도루스의 《고트족의 역사》를 요약하고 민간 전승을 덧붙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기 3세기의 로마 기록을 참고하는 등 상당히 공들여서 작성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렇듯 논란이 많은 저서이지만, 역사 기록이 희소한 고트족 연구의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4. 《로마나》(Roman)
천지창조부터 552년 테이아 왕에 대한 나르세스의 승리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주요 사건들을 요약한 역사서이다. 이 작품은 《왕국과 시대의 계승에 관하여》(De Regnorum ac Temporum Successione), 《세계의 기원과 로마인들과 다른 나라들의 행위에 관한 책》(Liber de origine mundi et actibus Romanorum ceterarumque gentium) 또는 《로마인의 착취》(De gestis Romanorum) 등 여러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역사가 제롬과 그의 제자였던 마르켈루스 코메스의 기록을 주요 출처로 삼았으며, 플로루스의 기록을 일부 참조하기도 했다.《로마나》는 전반적으로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450년부터 550년까지 100년 동안의 역사와 이탈리아 북방의 여러 이민족 국가에 대한 일부 설명은 신빙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저서는 《게티카》와 파울 부제의 《랑고바르드족의 역사》(Historia Langobardorum)와 한 묶음이 된 채 간행되곤 했다. 그러다가 1882년 테오도르 몸젠이 각각 《게티카》와 《로마나》로 구별하면서, 비로소 《게티카》와 분리되었다.
[1] 원제는 《게테인(고트족)의 기원과 행적》(De origine actibusque Getarum)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