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30대 황제 데키우스 DECIV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본명 |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데키우스 발레리누스 Gaius Messius Quintus Decius Valerinus |
제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Gaius Messius Quintus Traianus Decius Augustus |
출생 | 201년 |
로마 제국 일리리쿰 부달리아 | |
사망 | 251년 (향년 49=50세) |
로마 제국 모에시아 아브리투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49년 9월 ~ 251년 6월 (2년) | |
전임자 | 필리푸스 아라부스 |
후임자 |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호스틸리아누스 |
배우자 | 헤레니아 에트루킬라 |
자녀 |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호스틸리아누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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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0대 황제.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아우구스투스, 사망 당시 제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메시우스 퀸투스 트라야누스 데키우스 피우스 펠릭스 인빅투스 아우구스투스 였다.익히 알려진 통칭은 '데키우스'이지만, 종종 '트라야누스 데키우스'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속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대 로마인들 이상으로 로마의 전통과 정신을 많이 계승하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서구권의 로마사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논쟁이 많은 황제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이유는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 최초로 제국 내 크리스트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통적인 라틴 저자들에게 데키우스는 상당히 훌륭하게 평가받고 있다. 반면, 당대 크리스트교인들과 후대의 크리스트교 저자들에게는 “지긋지긋한 짐승”이라고 비난받고 있다.
데키우스는 군인황제시대를 개막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이 말하는 ‘촌뜨기’ 출신이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와 달리 그 배경은 전혀 다른 황제였다. 그는 즉위 이전까지 원로원 의원을 오랫동안 역임하면서 군사, 행정, 정치 분야를 모두 섭렵했으며, 30대의 나이에 첫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이는 같은 발칸 반도 태생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 결이 다른 상류층 출신이었다.
데키우스는 245년부터 다뉴브 강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가 249년 봄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에 등극했고 필리푸스 아라부스를 무찌른 후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후 250년 1월부터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를 전개했으나 251년 6월 트라키아를 침공한 동게르만계 고트족에 맞서 싸우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데키우스는 200년 무렵, 도나우 강 방어선에 인접한 판노니아 시르미움 근처 부달리아(오늘날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부모나 가문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집권 직전 황제였던 카루스처럼 고향이 판노니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허나 아직까지는 데키우스의 고향은 판노니아라는 주장이 일반적이며 이 일대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을 조상으로 둔 로마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데키우스가 이탈리아 혹은 다른 지역 출신일 것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본래 성씨가 이탈리아 라틴 성씨로 속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메시우스인 것을 볼때, 오래된 이탈리아 평민 씨족집안 메시우스 가 출신 중 도나우 강 유역의 퇴역병 정착도시에 정착한 로마군 후예일 확률이 매우 확실하다. 따라서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전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이탈리아 혈통의 속주 로마인 후손 내지 카루스의 예처럼 의외로 이탈리아 쪽이 부모의 고향일 확률이 높으며 전형적인 2세기 말 ~ 3세기 원로원 유력자 내지 최상류층이 확실하다고 한다. 즉, 데키우스는 믿을 수 없는 위서인 《로마황제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소개와 달리, 최소 속주 태생의 기사계급 출신의 상류층 이상인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이었다.그가 동시대 사람으로 같은 파벌로 추측되는 발레리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내지 선배격으로 이탈리아 귀족을 대표했던 발비누스, 푸피에누스(막시무스)처럼 '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거쳤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다만, 200년 무렵 태어난 데키우스가 232년 대략 32살의 젊은 나이에 첫 집정관을 역임한 것을 볼 때, 단순한 신참자(노부스 호모)가 아닌 것은 명확하며 기록과 달리 최상류층 자제들처럼 어린 나이에 이를 빠르게 역임하고 집정관까지 고속 승진한 것은 분명하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데키우스가 로마 원로원 가문 태생 내지 기사계급의 최상류층인 증거는, 로마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인 친인척 관계와 친구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데키우스의 아내 헤레니아 에트루킬라의 친정과 데키우스의 결혼생활이다. 대개의 신참자들과 달리 데키우스는 비슷한 연배의 헤레니아 에트루킬라와 첫 결혼을 하여, 평생을 해로했다. 그런데 아내 헤레니아 에트루킬라는 세습 원로원 의원의 딸로 에트루리아 혈통의 원로원 귀족 출신이었고, 두 사람은 모두 초혼이었다. 데키우스 부부는 장남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를 227년 얻었다. 여기에서 학자들은 데키우스가 믿을 수 없는 고대 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상의 내용과 달리, 의외로 속주만 고향인 꽤 유복한 메시우스 성씨를 가진 원로원 의원의 아들 혹은 대대로 살아온 속주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혈통의 상류층 자제라고 강하게 확신한다. 왜냐하면 보통의 속주 태생 신참자들이나 페르티낙스와 같은 해방노예 아들 등 하층민 출신 신참자들은 데키우스가 장남을 얻은 나이 대라고 해도 명문가 규수를 아내로 맞이해 장남을 얻을 확률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이다.
물론, 데키우스의 고향은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촌동네' 취급하던, 변방의 도나우 강 일대가 확실한 만큼 처가만큼 가세가 대단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남의 풀네임이 부친 데키우스의 풀네임 대신 외가쪽 이름을 많이 따온 것을 보면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로마 귀족 사회에서 보통 아내 쪽 가문이 부유하고 명망이 높으면, 가문을 이을 장남이나 차남에게 향후 클리엔텔라와 사회적 위상 등을 고려해 막강한 처가의 이름을 붙여줬기 때문이다[1] 따라서 어떤 이들은 데키우스가 이탈리아인 조상을 가진 속주 상류층이며 외동딸만 있는 처가의 데릴사위로 장인에게 원로원 의원을 세습했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이런 추측 역시 기본적으로 데키우스와 그 부모가 최소 속주 내 상류층인 것을 가정하고 예상한 학설이다.
한편 데키우스는 즉위 전부터 발레리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같은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유서깊은 노빌레스 출신 원로원 귀족들과 두터운 우정을 나눴고 그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성향과 출신배경을 가졌던 데키우스를 지지했다고 한다.
이처럼 데키우스의 신상정보와 생애 전반을 살펴보면, 보통의 발칸 반도 태생 로마인들과 달리 의외로 꽤 높은 집안 태생인 것은 여러 근거로 확실하다. 다시 말하면 데키우스는 군 입대 후 대대장 계급의 훈련교관에서 황제로 벼락 출세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리아 속주 출신으로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티메시테우스의 측근으로 프라이토리아니에서의 경력을 토대로 황제까지 오른 필리푸스 아라부스와는 그 출신배경부터 상반된 당대 최상류층이었고 이 사람의 출세는 속주 출신 군인이나 야심가들의 출세와는 공통점이 의외로 적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데키우스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이탈리아와는 거리가 먼 일리리쿰 출신임에도, 막시미누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와는 달리 단순한 변방 촌뜨기 태생 신참자는 아니었다. 당연한 말인데, 그의 군 경력 역시 지휘관 계급부터 출발한 것이 확실하며 서른이 되기 전 원로원에 입성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여러 승진코스를 밟은 뒤 지휘관을 거쳐 원로원 의원으로 선출됐다고 한다. 상술했듯 232년에 첫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235년부터 238년까지 군사적 자질을 요구하거나 원로원 귀족들이 선호하는 모이시아 총독,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았다.
여러 기록상 데키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 행정 쪽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인품도 괜찮았던데다 교양도 상당히 훌륭한 장군이었고, 전형적인 2세기 후반 ~ 3세기 초반기의 원로원 귀족임에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따라서 데키우스는 원로원과의 관계는 돈독했고, 세베루스 왕조가 사라진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도 자신이 무너뜨린 필리푸스에게도 신뢰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2.2. 황제 즉위
245년경, 데키우스는 필리푸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데키우스는 248년에 모이시아와 판노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파카티아누스 등의 반란을 진압한 후, 그가 이끄는 군대는 그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데키우스는 병사들이 자신을 추대한 뒤 건낸 보랏빛 망토을 걸친 상태에서 한동안 주저하다가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데키우스는 무너져 내려가는 국가의 재건과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249년 봄 로마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때 데키우스의 옹립과 다뉴브 일대에서의 반 필리푸스 아라부스 운동에 대해 현대 로마사 연구자들은 데키우스가 적임자였다고 해도 로마 내 발칸 반도 분리주의 움직임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고 말한다.249년 9월(또는 10월), 필리푸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격돌한 데키우스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상업중심지로 알려진 베로에아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데키우스에게 전투에서 패한 필리푸스는 부하들의 배신에 절망에 빠져 249년 9월 자살했다. 이후 이 소식은 로마에 전해졌는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근위대는 필리푸스의 아들 필리푸스 2세를 근위대 병영에서 살해했고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황제로 인정한 뒤 트라야누스의 칭호를 그에게 바쳤다.
베로에아 전투 승리 후,데키우스는 곧바로 로마로 이동해 여러 달 동안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원로원이 선사한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가문의 이름으로 채택했고, 로마 재건을 위해 수 많은 공공 건축물을 보수하고 신축 건축물을 입안해 건설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서의 직위를 인정받은 뒤 이미 사라져버린 감찰관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했다. 감찰관은 과거에 로마의 존속에 크게 기여했지만, 역대 황제들이 그 직위를 가로채면서 기능이 서서히 왜곡되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데키우스는 감찰관을 부활시켜야만 공공의 용기, 고대의 원칙과 풍습, 추상같은 법률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다며 원로원들에게 감찰관을 부활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는 원로원에게 감찰관 선출을 맡겼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발레리아누스를 선출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의 크나큰 신임에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자신이 무능해 시대의 부패상을 고칠 수 없으며, 감찰관은 황제의 위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하의 신분으로 그런 엄청난 직무와 권한을 맡을 수 없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2.3. 로마 다신교 부흥과 기독교 박해 정책
데키우스는 로마 다신교 부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로마 제국이 날로 쇠약해지고 내란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종교적 신념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겼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신들에 대한 종교적 열기를 되살리고 제국에 대한 로마인의 충성심을 끌어올려 제국의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신전을 새로 건축하거나 복원하는 사업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데키우스 치세에 세워진 이탈리아의 여러 비문에서는 황제를 "신전 복원자"라고 칭했다. 아퀼레이아 시민들은 데키우스의 지시에 따라 넵투누스의 동상을 복원했으며, 아프로디시아스(Aphrodisias, 현재 튀르키예 아이딘 주 가이레) 주민들은 황제로부터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희생제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서신을 받았다.이렇듯 로마 다신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던 데키우스는 250년 1월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에우세비우스와 락탄티우스 등 후대 기독교 학자들의 기록,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한 현대 학자들은 아래의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제국의 모든 주민들은 특정일까지 '제국의 안전을 위해' 지역 사회의 제사장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주민들은 제물을 바친 후 그들이 명령에 따랐다는 사실을 기록한 증명서를 발급받을 것이다. 이 증명서는 모든 신에 대한 주민의 충성심과 희생제물과 음료, 그리고 희생제를 감독하는 관리의 이름을 증언할 것이다."
이 칙령이 내려진 뒤, 지역 당국은 담당 구역의 시민들이 희생제를 드리게 한 뒤 이 행위를 증명하는 특별 문서, '리벨루스(libellus)'를 발급했다. 몇몇 문서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위원들은 이집트의 테아델피아(Theadelphia) 마을에서 온 세레누스의 아들 아우렐리우스 아세시스가 올바른 제물을 바치는 것을 감독하였다. 나(아세시스)는 항상, 그리고 끊임없이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고, 이제 모두 앞에서, 법령의 지시에 따라,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바치고, 제물의 일부를 맛보았다. 이제 이것을 위원들에게 증언해달라고 요청한다. 나, 아센시스는 32세로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제물을 바치고 이교도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했고, 데키우스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데키우스가 기독교 박해 정책을 단행한 이유에 대해 몇 가지 관점이 제시되었다. 에우세비우스는 전임 황제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비밀리에 기독교를 신봉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데키우스가 증오심을 품고 박해를 단행했다고 주장했다.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데키우스가 발레리아누스의 선동에 따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데키우스가 기독교를 박해하려고 이 칙령을 반포했다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 데키우스의 칙령은 기독교인 만이 아니라 제국의 모든 신민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교회를 파괴하거나 성경을 불태우는 조치는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학자들은 데키우스가 기독교 그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희생제를 드리기를 거부한 기독교도 개인의 행위를 문제시했을 거라고 본다. "팍스 데오룸(pax deorum: 신들의 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데키우스에게 있어 기독교도들이 신들에게 희생제를 바치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심각한 범죄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신들을 부정하는 '무신론자'이며,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자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단행된 박해로 교황 파비아노, 안티오키아의 주교 바빌라 등 유명 인사가 순교했고,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치프리아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은둔했으며, 많은 신자들이 배교했다. 이 박해가 언제 끝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50년 6~7월에 절정에 이르렀다가 황제의 시선이 고트족의 발칸 반도 침입을 저지하는데 쏠리면서 자연스럽게 사그라든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데키우스는 역시 유일신을 섬기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전통적인 종교 관습을 따르는 걸 허용하는 정책을 공식화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침을 따라 로마 신들에 대한 희생 제물 헌납을 강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을 별도로 처벌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4. 전사
250년, 고트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했다.[2] 그들은 마르키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뒤 니코폴리스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데키우스는 급히 트라키아로 진군해 니코폴리스를 포위한 고트족에 접근했다. 이에 고트족은 포위를 풀고 하에무스 산맥으로 물러났다. 데키우스는 급히 그들을 추격했으나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돌연 군대를 돌려 맹렬한 기세로 기습했다. 데키우스의 로마군은 이 기습에 당황해 격파되었고 데키우스는 후방으로 물러난 후 군대를 수습했다. 이렇게 로마군을 격파한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를 포위했고, 필리포폴리스 수비군 사령관 티투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고트족에게 항복한 뒤 크니바 왕과 동맹을 맺고 데키우스에 대항했다.하지만 데키우스는 전의를 잃지 않고 군대를 다시 모집한 후 고트족과 합류하려고 진군하고 있던 카르피족과 게르만족의 행군을 차단하고 산꼭대기의 통로를 신임하는 장교들에게 맡긴 후 국경 요새들을 강화하는 한편 고트족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후 데키우스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고트족을 몰아붙였고, 고트족은 점차 괴멸될 위기에 빠진다.
이에 고트족의 왕 크니바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모두 내주는 조건으로 안전한 퇴각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한 데키우스는 침략자들을 응징하여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겠다고 결심했고 어떠한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고트족은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251년 6월 모이시아의 아브리투스에서 로마군과 격돌했다.(아브리투스 전투)
고트족은 3개 대열로 이뤄져 있었는데, 제3열의 전면은 습지대의 엄호를 받고 있었다. 이윽고 벌어진 교전 초기에 공동 황제로서 아버지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던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병사들이 동요하자, 데키우스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한 병사의 죽음은 공화국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데키우스는 아들의 죽음에도 흔들림 없이 군대를 지휘했고, 결국 고트족의 제1열과 제2열이 괴멸되었다. 이에 로마군은 제3열마저 섬멸하려 진군했다. 그런데 그들은 에트루스쿠스의 죽음에 분노해 이성을 상실했는지 제3열 전면에 있는 늪지대로 돌진해 버렸다. 병사들은 늪에 빠져 밑으로 가라앉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병사는 미끄러졌다.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는 장창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반면 고트족은 그런 습지에서 싸우는 게 익숙했다. 그들은 키가 컸고 창이 길었으며, 멀리서도 적군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결국 로마군은 늪지대에서 허우적대다가 고트족에게 괴멸되었다. 이때 데키우스도 늪지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전사했고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로써 데키우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외적에게 전사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1621년 로마의 산 로렌초 부근에서 발견된 루도비시 대석관. 서기 250년에서 26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로마 대석관이다. 중앙에서 로마군을 지휘하는 인물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한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 대석관을 제작한 목적은 남편과 아들을 잃어 비탄에 빠진 데키우스의 미망인 헤레니아 에트루킬라를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로마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 평가
데키우스는 제국을 통치한 지 2년 만에 다뉴브 강을 건너 이민족을 쫓는 동안 아브리투스에서 배반을 당해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지나치게 과감한 공격을 하다가 전사했지만 데키우스는 ‘군사 한 명 잃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꿋꿋한 모습을 보였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재개했고, 격렬히 싸우다가 마찬가지로 전사했다.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관하여》, 29
데키우스는 동향 출신의 전임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사산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즉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받고 있는[3]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많이 비교되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이런 비교 부분에서의 평가에 따르면 데키우스의 평가는 그가 현대까지 논쟁의 대상이 된 조직적 기독교 박해와 달리 상당히 괜찮다고 당대 로마인들부터 현대까지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는 데키우스 역시 막시미누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처럼 군인 출신임에도 군사경험, 군사적 재능이 두 전임자보다 상당히 괜찮았고 인격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로마인들이 말하는 ‘촌뜨기’ 출신 군인황제임에도 군단장을 거쳐 원로원 의원을 오랫동안 역임했고 이 과정에서 군사, 행정, 정치 분야를 모두 섭렵하고 그 성과도 평균 이상으로 좋았던 사람이었다.
데키우스는 현대까지도 “뛰어난 발칸 출신의 로마 황제”의 1번 타자이자 그 시작이라고 불린다.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대선배이자 직속 선배라는 이야기인데, 이는 그가 두 전임자와의 상대평가 측면에서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3세기 황제 중 괜찮았다고 평가받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일각에서는 그가 유능했다고 해도 같은 발칸 출신의 후임자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콘스탄티누스 1세와 비교해보면 군사적 역량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부족하지 않느냐는 말이 있다. 즉,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떠도는 소문처럼 제위를 노리고 음모를 꾸며 데키우스의 군사적 무능을 보여주고 데키우스 부자를 동시에 없애기 위해 고트족과 비밀 제휴한 것이 진짜 사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 이를 감안해도 무작정 대단하다고 떠받들 수 없다는 이야기다.[4]
그러나 이런 주장과 별개로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로 대표되는 로마시대 저자들의 평가는 “짧지만 명예로운 제위를 마감하는 영광스러운 최후”로 불려졌고, 후임자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모두 병사들에게 살해되면서 빠르게 몰락한 탓에 데키우스와 그의 장남의 전사는 이들에 비해 로마 황제다웠다고 평가를 받았다. 반면 이런 황제로서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서구권 로마사 역사가들 사이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논쟁이 많은 황제 중 한명이다. 바로 로마 황제 중 최초로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기독교도를 박해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기독교도였던 로마인, 또는 기독교 공인 이후의 로마인들과 역사가들에게 “전통을 강조한게 지나쳤다”, “지긋지긋한 짐승”같은 말을 들을 정도로 비난받고 있다.
특히 이런 여론은 당대 팔레스타인과 레반트, 이집트 일대에서 더 격렬했다고 하는데, 4세기 팔레스타인의 카이사레아에서 활동한 에우세비우스는 전임자 필리푸스가 기독교도였다고 주장하면서 데키우스의 조직적인 기독교 박해가 정치적 목적으로 자행되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3세기 군인 황제 시대 황제 중 상상 이상으로 괜찮았던 황제였다는 라틴 저자들의 평가처럼 대대적인 제국 내 기독교 박해가 단점이어도 이 부분 외에는 국가행정, 군사 측면에서 황제로서 괜찮았다고 평가받는 만큼 그가 무작정 좋은 황제, 또는 나쁜 황제로 평가하는 것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1]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경우, 그의 본가는 갈리아 부족장으로 플라비우스 왕조때 원로원에 입성한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 태생임에도 조부와 부친이 고위 원로원 의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외가인 안토니누스 가문의 영향력이 대단해 외가에서 받은 이름과 결합해 사용했다. 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원로원 입성 전부터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외가의 가문명과 재산을 물려받고 이를 주요가문으로 삼아, 즉위 전까지 이탈리아 세습귀족 중 한 명이었다.[2] 시비는 로마가 먼저 걸었다. 전임 황제 필립 아라부스가 카르피족을 족치고나서 고르디아누스3세 시기에 맺었던 로마가 고트족에게 연공금을 지불하는 조약을 깨버렸다.[3] 고대 전승 기록에서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암살됐다고 하지만, 교전국 페르시아 측의 기록이나 비문에서는 고르디아누스 3세가 기병대를 이끌고 싸우다가 격전 중 전사했다고 나온다.[4] 이는 오늘날에는 근거없는 낭설로 치부되고 있다. 왜냐하면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데키우스 유족들에게 한 행동, 데키우스 차남을 양자삼아 공동황제로 두고 한 행동 및 그의 태도 등을 봤을 때, 또 갈루스의 인간됨을 보았을때 그가 조국과 데키우스 부자를 고트족에게 팔 이유도 없고, 당시 로마 상황상 지나치게 무모한 방법으로 제위를 찬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