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11:12:56

에우세비우스

파일:에우세비우스.jpg
이름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Eusebius of Caesarea)
출생 260년에서 265년 사이
사망 339년 5월 30일
직위 카이사레아 주교

1. 개요2. 생애3. 저서
3.1. 교회사(Ἐκκλησιαστικὴ ἱστορία)3.2.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Βίος Μεγάλου Κωνσταντίνου)3.3. 연대기(Παντοδαπὴ ἱστορία Pantodape historia)3.4. 명사록(Περὶ τῶν τοπικῶν ὀνομάτων τῶν ἐν τῇ Θείᾳ Γραφ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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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4세기에 활동한 로마 제국의 성직자, 신학자, 그리스도교 역사가. 저서 <교회사>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 등을 집필하였으며, "교회사의 아버지"라는 별칭으로 일컬어진다.

2. 생애

전반적인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후계자인 아카키우스가 <에우세비우스의 생애>를 집필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동시대의 그리스도교 역사가 예로니모와 4세기 역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 소조멘, 그리고 테오도레투스의 기록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동시대인인 아타나시우스, 아리우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의 글에는 그의 활동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가 들어 있다.

260년에서 265년 사이에 카이사레아 마리티아 일대에서 출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며, 일찍 세례를 받고 도시에서 교육을 받았고, 296년경 시리아 팔레스티나에서 살았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에서 콘스탄티누스가 군대와 함께 이동하는 걸 목격했다고 기술했는데, 실제로 당시 콘스탄티누스가 소속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로마군이 이 지역을 종종 통과하곤 했다. 카이사레아의 아가피오스에 의해 장로가 되었다.

한편, 그는 팜필루스라는 인물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는지, 그는 종종 '에우세비우스 팜필리(팜필루스의 아들 에우세비우스)'라고 불렸다고 한다. 팜필루스는 카이사레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오리게네스의 신학을 신봉하는 인물이었고, 에우세비우스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오리게네스파가 되었다. 아마도 오리게네스가 유산으로 남긴 개인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주교들이 생전에 남긴 저서와 서신들을 탐독했을 것이며, 이를 통해 후에 교회사를 집필할 때 필요한 자료를 습득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신플라톤주의에서 쓰이는 용어를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옹호했는데, "신성한 현시"라는 글에서 그리스도를 "로고스(logos)"로 묘사하였다.

그 후 카이사레아에서 그리스도교에 관한 여러 저서를 집필하던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를 반포한 313년 직후 아가피우스의 뒤를 이어 카이사레아 주교가 되었다. 이 시기 아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파문당하고 카이사레아로 찾아오자, 그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고 주교회의를 소집해 아리우스의 신학이 흠잡을 데가 없다고 선언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우스를 지지했지만, 아타나시우스 등 반 아리우스 파가 우세하여 아리우스파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걸 막지 못했다.

그래도 궁정에 자주 방문하여 긴밀한 대화를 나누고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기에 입지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강력하게 비난하던 아타나시우스가 황제에게 미움을 사 추방되기도 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후, 그는 황제를 기리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를 집필했다. 339년 5월 30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3. 저서

비록 이단으로 정죄된 오리게네스파이자 아리우스파 인사였지만, 중세 수도자들은 그의 저서를 중요하게 여겨서 필사본을 많이 남겼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저서는 <교회사>,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 <연대기>, 그리고 <명사록>이며, 그 밖에도 성경의 본문 비평, 오리게네스를 옹호하는 기록 등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3.1. 교회사(Ἐκκλησιαστικὴ ἱστορία)

파일:교회사.jpg

290년경에 집필을 시작하여 밀라노 칙령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저서는 12사도 시대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전까지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다루었다. 이 책은 총 6권으로 이뤄졌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제1권: 주요 주교들의 승계
제2권: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역사
제3권: 이단의 역사
제4권: 유대인의 역사
제5권: 이교도와의 관계
제6권: 순교자

교회사는 역대 주교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이들과 이단으로 판명된 인사들을 주로 다루었다. 또한 단순히 교회와 신자들의 이야기만 다루지 않았고, 로마 제국과 역대 황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다루었다. 다만 신뢰성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제기된다. 당대부터 "꾸며낸 이야기가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에드워드 기번 등 근대 학자들은 에우세비우스가 순교자의 수를 지나치게 부풀렸으며 미화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며, 믿을 만한 걸 찾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또한 반유대주의 성향이 다분히 담겨있는데, 특히 다음 구절은 유대인을 공격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로 인용되었다.
"선동, 전쟁, 장난스러운 음모가 연이어 이어졌고, 마침내 베스파시아누스의 포위망이 그들을 압도할 때까지 예루살렘과 유대 전역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상대로 감히 저지른 죄에 대한 신의 복수가 그들을 덮쳤다."

하지만 문헌 기록이 얼마 되지 않는 초기 교회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임은 분명하며, 문헌 자료가 별로 남지 않은 군인 황제 시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가 들어있어서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기번 등 근대 학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기 위해 에우세비우스를 지나치게 깎아내렸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3.2.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Βίος Μεγάλου Κωνσταντίνου)

337년 사망한 콘스탄티누스 1세를 추도하는 의미로 집필된 저서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여 수많은 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 황제에 대한 예찬을 담았다. 그는 이 저서에서 황제가 생전에 자신에게 "병사들과 함께 빛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모양의 형상이 하늘에서 구현된 걸 목격했으며, 그 밑에는 '이로써 승리하리라'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했다. 다만 황제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때 그리스도의 상징이 담긴 표식을 사용했는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1]

콘스탄티누스가 저지른 악행을 숨기고 일방적인 찬사를 보내는 저서라서 역사적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황제가 개인적으로 보낸 서신에 사산 왕조의 왕중왕 샤푸르 2세에게 보낸 서신[2]까지 다루고 있기에 그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3.3. 연대기(Παντοδαπὴ ἱστορία Pantodape historia)

아브라함에서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로마 통합까지의 연대기를 담았다. 총 2권으로 이뤄졌는데, 제1권은 초기 작가들이 기록한 세계사의 요약본을 국가별로 정리하여 수록하였고, 제2권은 중요 사건과 날짜 목록이 표 형식으로 수록되었다. 특이한 점은 이 제2권에 고대 올림픽 우승자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3] 그리스도교 역사가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에게 경외를 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던 올림픽을 주요 사건으로 다뤘다는 점은 참으로 이색적이라 하겠다. 그리스어로 작성되었을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아르메니아어 번역본이 현재 전해지며, 예로니모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제2권도 완전한 형태로 존재한다.

3.4. 명사록(Περὶ τῶν τοπικῶν ὀνομάτων τῶν ἐν τῇ Θείᾳ Γραφῇ)

성경에 나오는 지명의 목록을 수록한 저서이다. 그는 서문에서 "신성한 영감을 받은 성경 전체로부터 항목들을 모아서 첫 글자별로 분류해, 사람들이 텍스트 전체에 흩어져 있는 지명을 쉽게 알 수 있게 하겠다"라고 밝혔다. 이는 당시에 성경에 나오는 지명을 정리한 저서가 따로 없어서 사람들이 이해에 어려워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장소는 약 980개에 달한다. 성지 예루살렘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4년에 세운 건물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에, 책의 집필 시기는 324년 이전인 것으로 추정된다.


[1]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큰아들 크리스푸스의 가정교사로 일했던 그리스도교 신학자 락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에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병사들의 방패에 키로 십자가(XP)를 새기게 했다고 주장했다.[2] 콘스탄티누스는 이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를 진심으로 믿으며, 자신의 성공은 예수의 뜻에 부합하기 때문이라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산 왕조 내 그리스도인을 박해한다면 다른 박해자들처럼 몰락하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3] 기원전 776년부터 기원 후 217년까지의 달리기 경주 우승자들이 주로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