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Flavius Antiochianus | |
전체 이름 | ???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 Flavius Antiochianu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로마 원로원 의원, 집정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
아버지 |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
배우자 | 폼포니아 움미디아 |
[clearfix]
1. 개요
고대 로마 제국 군인 황제 시대 시대의 집정관, 원로원 의원. 악명 높은 로마 제국의 황제 엘라가발루스 시대때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221년 집정관을 지낸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의 동명이인 아들이다.3세기의 위기 속에서 유명무실해진 원로원을 이끌고, 정국을 주도한 당대 최고의 거물 정치가이다. 따라서 두번째 집정관을 지낼 당시, 후기 로마제국에서 보일 법한 형태로 집정관을 지내면서 황제 대리인 역을 수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도와 로마 제국의 불안한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 무차별적인 숙청을 막았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사후 정국 흐름 속에서 퀸틸루스, 아우렐리아누스 통치 기간 내내 내홍에 빠진 제국을 통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미상이나, 아버지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와 마찬가지로 개인이름은 티투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의 프라이노멘이 티투스였을 것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부친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시리아 코엘레 속주의 안티오키아 출신 에퀴테스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 혹은 셀레우코스 제국 아래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그리스 사람의 후손이다. 어머니의 신원은 불분명하나 모친 역시 기사계급 이상에 속한 그리스 혈통 로마인으로 추정된다.
동명이인의 아버지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세베루스 왕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래에서 백인대장을 거쳐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노부스 호모)'다. 그는 세베루스 황제 아래에서 기용된 직업 군인 출신 신참자로, 세베루스 황제 치세 말이던 211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속주 보조군 사령관을 지냈고, 이후 오늘날 북아프리카 서쪽의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로 건너가 이곳 주둔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군공을 세웠다. 그는 게르마니아, 포에니쿠스 등 복무지에서 덕장, 용장이라는 평을 두루 들었고, 병사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군부의 신뢰 하락 속에 위기에 빠진 엘라가발루스 정부는 그를 주목했고, 율리아 마이사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는 군대의 신망을 얻는 그를 로마로 소환했다. 두 시리아인 아우구스타는 그를 221년 집정관에 추천했고, 임기 종료 후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의 동료 근위대장으로 지명했다. 이렇게 안티오키아누스의 부친은 엘라가발루스 아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끄는 근위대장이 된 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암살을 명받자 이를 꺼림직하게 여겨 그 명을 받들길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는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이 222년 3월 11일 엘라가발루스,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히에로클레스를 죽일 때, 팔라티노 황궁으로 쳐들어가 스페스 베투스 정원을 뒤지는 부하들을 만류했다가 이 사건이 꼬투리잡혔다. 이때 누명을 쓴 그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즉위 직후,율리아 마이사와 울피아누스의 지시로 살해됐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성년식을 치른 뒤, 이탈리아의 오래된 세습 귀족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딸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몇 안 되는 방계 황족 후예인 폼포니아 움미디아와 결혼했다. 아내 폼포니아 움미디아는 엘라가발루스에게 남편이 살해되고,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 안니아 파우스티나의 1남 1녀 중 첫째로 부계는 이탈리아, 모계는 이탈리아, 그리스 폰투스와 히스파니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결혼은 안니아 파우스티나가 엘라가발루스의 새로운 아우구스타로 낙점되기 직전에 거행됐다고 하나, 폼포니아 움미디아가 219년생으로 아주 어렸고, 안티오키아누스 역시 성년식 전의 어린이였을 확률이 높아, 엘라가발루스가 몰락한 뒤에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해 당시 안티오키아누스의 부친은 엘라가발루스가 아무리 막장 황제이더라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적으로 만들면 안 되었기 때문에, 엘라가발루스가 안니아 파우스티나에게 협박을 할 때,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추모한다면 딸과 사위부터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확률이 희박하다.
결혼 직후부터 장모 안니아 파우스티나 소유의 피시디아 개인 영지 내 대저택으로 건너가 살았고, 아내와 함께 로마와 피시디아를 오고 가면서 평생을 살았다. 이는 최근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발굴된 로마 시대 비문을 통해 확인된다. 해당 비문에서는 아내 폼포니아 움미디아와의 사이에 자녀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름 미상의 자녀가 여러 명 있었음이 다른 비문과 1970년대 연구에서 확인됐다. 오르멜레이스(Ormeleis)의 비문으로 불린 또 다른 비문 속 금석문에 따르면, 279/2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당시 안티오키아누스의 아이들이 그들의 사망한 어머니 폼포니아 움미디아와 아버지 안티오키아누스를 기리기 위해 이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처남 폼포니우스 바수스(259년 집정관)와 일찍부터 정치적 동지이자 의형제 같은 사이였다. 그래서 세베루스 왕조의 몰락을 같이 체험.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학정을 경험하면서, 이후의 혼란기를 모두 거쳤다. 이 사이, 그는 원로원 동료와 일반 서민들에게 유능하고 책임감 강한 원로원 의원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다가 갈리에누스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제위에 올랐다.
순수 군인 출신으로 원로원과 연줄이 없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는 즉위 직후,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는 그를 보결 집정관으로 추천했고, 수도 장관 자리를 내려 내각을 이끌게 했다. 이후에도 황제는 전염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그를 신뢰해 고견을 듣고 여러 원로원 의원, 장군을 등용했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치세 말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전염병에 걸려 죽었고, 그 다음 황제가 된 퀸틸루스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제위를 빼앗긴 뒤 자살했다.
그렇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누스를 죽이거나 은퇴시키지 않고, 더 크게 중용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그에게 두 번째 집정관 직을 추천했다. 그러면서 그는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로마 시의 행정, 치안을 담당하는 수도 장관 자리를 주면서, 고견을 구했다. 이런 이유로 안티오키아누스는 두번째 집정관을 지낼 당시 발리네움 건설 책임자로 발탁됐고, 황제 대리인 지위를 받아 아우렐리아누스 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제국 개혁을 책임졌다. 이 시기 1군단과 인근 로마 민중들을 위해, 오론테스 강변의 안티오키아에 안티오키아니 목욕탕으로 알려진 거대한 목욕탕을 짓는 계획을 세웠다.
음모를 꾸미거나, 활용해 상대에게 원한을 사지 않아 이 부분에서 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아우렐리아누스는 두 번째 집정관을 지낸 직후의 안티오키아누스에게 271년, 272년 그리고 274년에 수도 장관 직을 맡게 할 만큼, 그를 곁에 끝까지 두려고 했다. 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275년 10월에 살해됐다.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된 이후, 안티오키아누스의 기록 역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무렵 아내와 함께 피시디아로 거처를 옮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279/280년 그의 아내가 죽었고, 안티오키아누스 역시 사망한 것을 볼 때, 아우렐리아누스 사후에는 정계 은퇴 후 프로부스 재위 연간에 병사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