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 |
출생 | 201년 |
로마 제국 안티오키아 피시디아 | |
사망 | 미상 |
배우자 | 폼포니우스 바수스, 엘라가발루스 |
자녀 | 폼포니우스 바수스(259년 집정관)[1], 폼포니아 움미디아 |
아버지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
어머니 | 안니아 파우스티나 |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 |
왕조 | 세베루스 왕조 (Severan dynasty) |
전임 | 아퀼리아 세베라 |
후임 | 율리아 마이사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황후.2. 생애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을 역임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클루스와 부유한 상속녀인 안니아 파우스티나 사이의 외동딸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황족이다.부모 모두에게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피를 이어 받았다. 어머니 안니아 파우스티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여동생 안니아 코르니피디아 파우스티나의 외손녀, 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조카 움미디아 코르니피디아 파우스티나가 낳은 딸로 자신의 외할머니(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여동생)에게 피시디아의 대영지와 저택을 물려받은 상속녀였고, 피시디아의 대영지는 종신독재관 술라가 처음 차지한 그 영지로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고 평가가치도 높았다고 한다.
조모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셋째 딸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공주이며, 조부는 원로원 의원이자 스토아 철학자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이다. 조부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폰투스 왕국으로 이주했던 아카이아 그리스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갈라티아 속주의 폼페이아폴리스에서 부, 명예를 장악한 집안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첫 아내와 사별 후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 공주를 후처로 맞이했고, 167년 보결집정관과 173년 정규 집정관을 지낼 정도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에게 총애받은 사위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니아 파우스티나의 조부는 황제 부부의 그리스, 아나톨리아 순행을 바로 옆에서 함께 했고 장인, 장모의 도움 아래 동방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 정계 인사들과 인맥을 쌓는 특권도 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장인, 장모의 유지에도 정치쪽과는 거의 담 쌓은 인사인 척 하면서 제 잇속만 챙긴 까닭에, 콤모두스가 망가진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 비겁하게 수수방관했다고 비난받았다.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클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외손자로, 훌륭한 혈통에도 평가가 좋지 못한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200년 정규집정관을 역임했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스스로 안토니누스 가문을 계승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를 자칭하기 전까지는 그 평가가 좋지 않은 위인이었다. 이런 모습은 이 사람의 외사촌들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퀸틸루스 등과 다른 점이었는데, 그는 꾸준히 정계활동을 하고, 권력을 쥐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능력이 지나칠 정도로 무능했다. 이는 그가 어릴 적부터 들어온 평가였는데, 완전히 망가진 외삼촌 콤모두스조차 그를 가리켜 "무능하고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했고 원로원 역시 그를 황제 후보는커녕 원로원 내 지도층 인재로도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콤모두스가 암살된 192년 1월 1일 직후, 주변 사람들에게 후임황제 후보로 거론된 두 사촌형제(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퀸틸루스)와 달리 아예 후보로 거론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럼에도 어쨌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이고 증조부, 조부, 부친까지 3대가 연이어 로마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 집안인 까닭에 당대 명문가와 두루 인척관계를 맺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여 그와 그 친척들은 당대 원로원 유력귀족인 폼페이우스 가문, 비리우스 가문 등과 통혼했다고 한다. 부친의 이부 형제로 이복형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가 있는데,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조카인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의 양자가 됐다. 따라서 그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후손이면서도, 철인황제의 본가 안니우스 베루스 가문과도 희미하게나마 연관이 있었다.
파우스티나는 201년경 어머니의 영지가 있는 안티오키아의 피시디아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이런 이유로 216년, 꾸준히 정계 영향력을 키워 나갈 야망에 부푼 아버지의 명령으로 당시 원로원을 주름잡고 있던, 폼포니우스 가문[2] 출신의 젊은 세습원로원의원 폼포니우스 바수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 당시, 아버지 세베루스 프로클루스는 폼포니우스 가문에게 확실한 약속을 받아낼 요량으로 아내와 딸 명의의 피시디아 영지와 대저택을 딸 부부의 공동명의로 바꿔줬다는 비문이 있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정략혼이었고, 부부의 나이가 대략 12살 정도 차이가 났다고 한다. 하지만 부부관계는 진짜 좋았고, 폼포니우스 바수스는 결혼 직후 이탈리아에 있던 자신의 거처를 떠나 처가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녀는 딸 폼포니아 움미디아와 아들 폼포니우스 바수스를 낳았다. 이렇듯 부유하면서도 평범한 귀부인으로 살아갔으나, 엘라가발루스 황제 집권 후 남편이 반역 혐의로 처형되면서 과부가 되었다. 이후 221년, 엘라가발루스 황제는 율리아 마이사의 청원을 받아들여 베스타 여사제였던 아퀼리아 세베라 황후와 이혼한 뒤 그녀와 약혼하였고, 원로원은 그녀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선사했다.
그러나 마이사의 권고에 따라 카이사르로 지명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게 민심이 급격하게 쏠리자, 엘라가발루스는 마이사에게 속았다고 판단하였고, 221년 12월 파우스티나와 이혼하고 아퀼리아 세베라와 재혼했다. 그 후 222년 3월 12일 근위대에게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죽이라고 명령했으나, 오히려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이끈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과 안티오키아누스가 엘라가발루스 모자 체포를 명했다. 따라서 222년 3월 12일, 엘라가발루스는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와 함께 피살되었다. 파우스티나는 이혼당한 뒤 피시디아로 돌아갔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다만, 세베루스 왕조 멸문 이후에도 한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사후 딸과 아들에게 막대한 재산을 넘겨줬다는 것을 암시하는 비문이 최근 터키에서 발굴됐다.
딸 폼포니아 움미디아는 그리스 귀족 출신의 원로원 의원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3]와 결혼했고, 피시디아에서 계속 살았다고 한다. 반면 아들 폼포니우스 바수스는 누나와 달리 이탈리아의 폼포니우스 가문을 잇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아버지의 친척 폼포니아 그라티디아와 결혼했다. 안니아 파우스티나의 아들은 서기 238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국가의 적이 된 직후, 원로원 수장인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올랐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공동집정관을 하면서 황제에게 다시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지명받았다고 한다. 아들 폼포니우스 바수스와 손자 폼포니우스 세베루스 바수스가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카루스, 콘스탄티누스 왕조 아래 로마 원로원에서 꾸준히 이름을 날렸다. 따라서 아들의 후손들은 서기 3~5세기까지 로마 원로원, 서로마 원로원에서 번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