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 플라키디아 Galla Placidia | |
이름 | 아일리아 갈라 플라키디아(Aelia Galla Placidia) |
생몰년도 | 388년 ~ 450년 11월 27일 |
출생지 | 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속주 테살로니키 |
사망지 | 서로마 제국 로마 |
매장지 | 불명[A] |
국가 | 서로마 제국 |
가문 | 테오도시우스 왕조 |
가족 |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 이복어머니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어머니 플라비아 갈라 이복오빠 동로마 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 이복오빠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 이복언니 아일리아 풀케리아 남편 서고트의 왕 아타울프(414 ~ 415) 아들 테오도시우스(요절) 남편 서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417 ~ 421)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 딸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 |
재위 | 서로마제국의 황후 |
423년 ~ 4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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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서방 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의 황후.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이자,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여동생. 황제의 딸로 태어나, 황제와 결혼하였으며, 황제의 어머니가 된 여인.
한때 서고트 왕 아타울프의 포로로 끌려가 그와 결혼하기도 하였으나, 서로마로 돌아온 후에는 공동황제 콘스탄티우스 3세와 결혼하여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낳았다. 또한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12년 동안 서로마의 섭정으로 군림했다. 오늘날에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정치를 이끌었던 여걸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갈라 플라키디아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두 번째 황후였던 플라비아 갈라 사이에서 태어났다.[2] 갈라 플라키디아의 출생 시기는 명확하지 않는데, 대략 388~392년 사이로 보인다.갈라의 유년기는 그리 밝지 않았는데, 그의 부모가 모두 어렸을 적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인 플라비아 갈라는 아리우스파 신앙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궁정에서 입지가 불안정했으며 결국 394년에 출산 도중 사망했다. 그 해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밀라노에 위치한 아버지의 궁정으로 가서 한동안 그 곳에서 지냈다.
더욱이 395년, 아버지인 테오도시우스 1세마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테오도시우스의 아들이며 갈라 플라키디아에게는 이복오빠가 되는 호노리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첫 황제로 등극하였다. 이후 여타의 정황을 보건데, 갈라 플라키디아는 오빠인 호노리우스와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로마의 실권자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와 그 아내인 세레나 집에서 양육되었으며 그 곳에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3]
이런 인연 때문인지 갈라 플라키디아는 스틸리코의 아들 에우케리우스와 약혼하기도 했다. 그러나 408년에 스틸리코와 에우케리우스 부자가 호노리우스의 의심을 사서 모두 숙청당하는 바람에 약혼은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당시 갈라 플라키디아는 원로원과 함께 세레나에게 알라리크와 공모하여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명을 뒤집어 씌워 처형하는데 일조하는 등 정치적으로 굉장히 냉혹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스틸리코와 세레나의 죽음은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의 서로마 침공에 중요한 구실을 제공했고, 408~410년 사이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알라리크의 로마 포위망에 갇혀 지내야 했다.
2.2. 첫 번째 결혼
410년 8월,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고트 왕국의 창시자였던 알라리크 1세가 로마를 약탈할 당시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그리고 이후 414년 1월, 알라리크의 처남이자 후계자였던 서고트족의 왕 아타울프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이 성립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 플라키디아가 아름다웠던 미녀였다는 사실도 한몫했겠지만,[4] 로마 제국의 황녀와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 싶어했던 아타울프의 정략적 욕망이 보다 근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아타울프와 결혼한 갈라 플라키디아는 410년 말에 바르셀로나에서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아타울프는 어린 아들에게 장인어른(?)의 이름을 따서 테오도시우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테오도시우스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고, 충격을 받은 아타울프는 아들의 시신을 은관에 담아 바르셀로나 인근에 매장하였다.
415년 9월, 아타울프는 바르셀로나의 궁전에서 목욕을 하던 중 수하였던 시게리크에게 암살당했다. 잠시 권력을 장악한 시게리크는 과부가 된 갈라 플라키디아를 모욕하기 위해 그녀에게 포로들과 함께 12마일[5]을 걸어갈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시게리크를 제거하고 서고트의 왕으로 등극한 왈리아가 서로마 제국과의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그해에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2.3. 두 번째 결혼
서로마로 돌아온 갈라 플라키디아는 417년 1월,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에 의하여 그 휘하의 장군이었던 콘스탄티우스와 혼인하였다. 이후 418년 즈음에 딸인 호노리아를 낳았고, 419년에는 아들인 발렌티니아누스를 낳았다.421년 1월, 당시 서로마의 군사적 실권자였던 콘스탄티우스는 호노리우스와 더불어 서로마의 공동황제로 집권하게 되었다(콘스탄티우스 3세). 그 아내인 갈라 플라키디아도 그에 따라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제위에 오른지 불과 몇개월 후인 그해 9월에 사망하였다. 호노리우스는 또 다시 과부가 된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와 그 어린 자녀들에게 의심을 품곤 위협하기 시작했다. 결국 갈라 플라키디아는 자녀들과 함께 또다시 서로마를 떠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해야했다.
2.4. 섭정
그로부터 2년이 지난 423년 8월, 호노리우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호노리우스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에, 그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제국을 통치할 가장 적법한 후계자는 그 조카이자 갈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이었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였다. 그러나 당시 서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카스티누스는 로마의 프리미케리우스 노타리오룸(primicerius notariorum: 문서 담당관) 요안네스를 황제로 옹립하였다.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황위를 계승하려면 요안네스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동로마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 또한 요안네스의 황제 참칭을 인정하지 않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결국 425년, 요안네스가 라벤나에서 포위당한 끝에 동로마 군대에게 패하여 사망하였으며,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발렌티니아누스는 아직 7세도 넘기지 못한 어린 아이에 불과했다. 결국 갈라 플라키디아는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425~437년에 걸쳐 12년간 섭정으로서 서로마를 통치하였다.
그 과정에서 갈라 플라키디아는 내부적으로는 요안네스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자신을 후원했던 북아프리카 총독 보니파키우스 등의 장군들과 갈등을 빚었고, 외부적으로는 반달족과 고트족, 훈족을 비롯한 이민족들의 침공에 시달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마의 실권은 아에티우스의 수중에 넘어가기 시작하는 가운데, 437년에는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18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되었다. 그에 따라 갈라 플라키디아는 섭정에서 물러났다.
2.5. 말년
그러나 섭정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갈라 플라키디아는 서로마 궁정 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과 발언권을 발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데 갈라 플라키디아의 딸이자 발렌티니아누스의 누나였던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모반을 계획하다가 발각당했을 때에도 얼마든지 처형당할 수 있었으나 고작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유폐된 것에 그친 점 또한 갈라 플라키디아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호노리아는 자신의 처지에 앙심을 품고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구혼 편지를 보내는 대형사고를 저질렀다.450년 11월, 갈라 플라키디아는 약 6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사망할 당시 갈라 플라키디아는 로마시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후 그 시신은 로마 내에 위치한 테오도시우스 가문의 묘소에 매장되었다.[6] 이듬해인 451년에는 아틸라가 호노리아의 청혼을 구실삼아 갈리아를 침공했고 뒤이어 452년에는 이탈리아 반도까지 침공하여 서로마의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갈라 플라키디아로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전해에 죽는 바람에 생전에는 이런 꼴을 보지 못했다.
라벤나에는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그 내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서로마 말기 미술의 걸작이자 정수로 손꼽히고 있다. 다만 그 명칭과는 달리, 갈라 플라키디아는 로마에서 사망한 후 그 일대에 묻혔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갈라 플라키다아의 영묘는 사실 그녀의 진짜 무덤이 아니다. 이 건물은 본래 갈라 플라키디아의 후원으로 라벤나에 건축된 성당의 일부분이었으나 대략 13세기를 전후하여 이것이 그녀의 무덤인 것처럼 와전된 것이다.
[A] 플라키디아는 로마에서 죽었으며 그 인근에 위치한 가문 묘소에 매장되었다. 당시 서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에 갈라 플라키디아 영묘로 전해지는 건물이 있지만, 이는 본래 성당의 일부를 이루던 건축물에 불과했으나 후대에 갈라 플라키디아의 무덤으로 와전된 것이다.[2] 테오도시우스는 통합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그의 사후에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되었다.[3] 세레나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조카이자 양녀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세레나는 갈라 플라키디아의 사촌이자 언니가 된다.[4] 갈라 플라키디아의 외모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훗날 콘스탄티우스 3세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는 점을 보면 상당한 미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5]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대략 19km에 해당된다.[6] 그 위치는 명확하지 않으나 오늘날 성 베드로 성당 인근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