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갈레리아 푼다나 (Galeria Fundana) |
출생 | 출생년 미상 로마 |
사망 | 미상 |
배우자 | 비텔리우스 |
아버지 | 가이우스 갈레리우스 |
자녀 |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비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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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 황제의 해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비텔리우스의 황후.2. 생애
그녀의 아버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는 법무관을 역임한 뒤 16년부터 23년까지 아이깁투스(이집트) 행정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게르마니쿠스가 19년 황제의 허가 없이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의 이집트 장관이었고, 세네카가 자신의 아내, 아이들과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당시 이를 도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 귀환 중 난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50년경 비텔리우스와 결혼하여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와 딸 비텔리아를 낳았다. 68년 남편이 갈바 황제에 의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총독으로 보내졌을 때, 그녀는 로마에 남았다. 69년 1월 남편이 라인 방면군 장병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뒤 로마로 진군했을 때 신변이 위태로웠지만, 비텔리우스와 대적한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는 그녀와 가족들을 특별히 보호해줬다.그 후 비텔리우스가 승리하자 루그두눔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남편에게 합류했다. 비텔리우스는 당시 8살이었던 아들에게 지휘관이 착용하는 망토를 씌워준 뒤 아들에게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했다. 이후 비텔리우스가 로마에 입성한 뒤 갈레리아의 친척이자 68년 집정관이며 오토 황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를 처형하려 하자, 그녀는 적극적으로 변호해 그를 용서하게 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의 심각한 악행에 동참하지 않고 주변인들을 너그럽게 대해 인망이 드높았다고 한다. 반면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호화스러운 연회를 즐겼고 남편의 사치 행각에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
69년 12월, 비텔리우스에 대항하여 황제를 칭한 베스파시아누스를 추종하는 도나우 방면 로마군이 로마를 장악하고 비텔리우스를 살해했다. 이때 비텔리우스와 갈리리아의 아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역시 피살되었지만, 그녀와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졌다. 비텔리아는 아버지의 부관이자 벨가이 속주 총독을 맡았던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와 결혼했다.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집정관으로 지명된 발레리우스가 임기를 수행하기 직전에 사망한 뒤,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남자와 재혼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제공한 집에서 유복하게 살았다. 프랑스의 계보학자이자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 등 일부 역사가들은 비텔리아의 재혼 상대는 88년 보결 집정관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모계 조상인[1]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라고 추정한다. 한편 갈레리아 푼다나의 69년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