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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올리아(Ollia) |
출생 | 30년 |
로마 제국 이탈리아 폼페이 | |
사망 | 65년(34~35세)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
배우자 |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 (44년 결혼 / 51년 이혼)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51년 결혼 / 58년 이혼) | |
네로 (62년 결혼 / 65년 사망) | |
자녀 |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1],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 |
아버지 | 티투스 올리우스 |
어머니 | 대 포파이아 사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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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전 아내이자 네로의 황후.2. 생애
서기 30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출생했다.부친 티투스 올리우스는 에퀴테스 출신으로 재무관을 지낸 원로원 의원이고, 어머니 대 포파이아 사비나는 집정관을 역임한 명망높은 귀족 가문 출신인 가이우스 포파이누스 사비누스의 딸이다. 따라서 외조부의 가문과 어머니의 사회적 위상이 더 높았는데, 이를 증명하듯 이들 부부의 외동딸임에도 외조부 이름의 여성형으로 지어진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친가는 피케눔과 폼페이 일대에 벽돌공장, 타일 제조 공장을 가지고 있고, 폼페이와 로마에 최고급 빌라를 소유한 부자 중 부자였다.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두 돌이 되기 전인 서기 31년, 아버지 올리우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제거하려는 세야누스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2] 이는 신참자인 아버지 올리우스가 연줄을 잡기 위해, 일찍부터 근위대장 세야누스와 오랜 우정을 나누며 세야누스 파벌에 가담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변에게 제대로 된 공직에 오르기 전에 양심을 팔아 신세를 망쳤다며 동정도 받지 못했다.
이렇게 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세야누스 파벌로 찍혀 풍비박산이 나자 어머니 대 포파이아 사비나는 서기 24년 집정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와 재혼해,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를 낳았다. 그러나 47년,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와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의 반란 이후 사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칼리굴라 황제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의심받던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에 대한 증거가 밝혀지면서 어머니 역시 명을 달리한다.
당시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1세와 그 측근들은 칼리굴라를 암살하고 클라우디우스와 남은 황족들을 죽이려고 한 배후를 캐기 위해 힘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41년 암살 당시부터 칼리굴라 암살 배후의 진범으로 눈초리를 받은 아시아티쿠스를 감시 중이었는데, 아시아티쿠스는 두번째 집정관에 오른 뒤 제 권세를 믿고 로마군에게 기부를 하고 세를 모아 야심을 드러내 결국 고발됐다. 이야기에 따르면, 이를 사주한 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 메살리나이며, 그녀가 집정관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소유한 저택을 빼앗기 위해 대 포파이아 사비나와 발레리우스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뜬소문을 근거삼아 간통 혐의로 고발한 일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타키투스의 기록이 맞다고 해도 아시아티쿠스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의 호의에도 두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고, 41년부터 쌓인 의심이 6년간의 추적 끝에 들통나면서 이 사건이 터진 터라 단순한 덮어 씌우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옥사가 터지면서 아시아티쿠스와 그 친구들, 이들과 연인관계를 맺은 귀부인들은 반역죄, 간통죄로 줄줄이 처벌받았다. 이 당시, 아시아티쿠스의 범죄혐의와 증거가 명확해 아시아티쿠스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무죄를 주장했는데, 클라우디우스 측근들이 대 포파이아 사비나와의 간통 이야기를 꺼내 말문을 막히게 한 다음, 그를 동성애자로 몰아 세우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아시아티쿠스는 매우 보수적인 관념을 가진 로마인이라서 자신이 동성애자로 몰리자, 묵비권을 깨고 화를 냈고 이는 그가 묵비권을 포기하고 자기변호로 이어지게 했다. 따라서 황궁 안에서 열린 심문조사와 재판은 빠르게 진행됐고, 조사가 끝나고 재판 판결만 남았을 때, 대 포파이아 사비나 역시 간통이 발각돼 체포된다.
옛 친구 아시아티쿠스를 살려주고 싶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심문관 비텔리우스는 증거가 너무 명확해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시아티쿠스에게 자살을 강요해 목숨을 끊게 했다. 그리고 이때 대 포파이아 사비나 역시 루쿨루스의 정원을 가진 아시아티쿠스가 연 연회에 참석해 친분을 맺고 불륜 관계인 것이 사실로 드러나 감옥으로 끌려가는데, 대 포파이아 사비나는 감옥에 갇히기 전(혹은 수감된 뒤) 간통죄로 처벌받을 운명과 남은 아이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혹은 메살리나의 협박에 비관해 자살했다.
대 포파이아 사비나가 죽기 3년 전인 서기 44년, 포파이아 사비나는 기사계급 출신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근위대장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결혼하여 아들 루프리우스 크리스푸스를 낳았다. 포파이아의 첫 남편 크리스피누스는 아시아티쿠스 체포와 대 포파이아 사비나 조사를 직접 담당했지만,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리스피누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 아래에서 약 10년 정도 근위대장으로 있을 만큼, 포파이아 사비나의 야망을 충족시켜준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기 47년에는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원로원에게 법무관 직책을 수여받고, 15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일시급으로 포상받는 등 벌이가 훌륭했다. 또 근위대장 이후 전직 법무관 신분으로 귀족 신분을 예정받고 원로원 의원이 될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서기 5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새 황후가 된 소 아그리피나는 메살리나 생전에 자신을 괴롭힌 이유를 내세워,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를 즉각 경질했다. 동료 근위대장 루키우스 루시우스 게타도 함께 교체됐다. 소 아그리피나는 이때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를 불명예스럽게 교체하라고 난리를 피우며, 눈엣가시였던 루시우스 게타도 교체시켰다. 왜냐하면 루시우스 게타가 클라우디우스 황제, 브리타니쿠스에 대해 충성심이 대단하고, 소 아그리피나를 옹립하는데 기여한 팔라스를 제어한 유일한 클라우디우스 측 인사였기 때문이다.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는 루시우스 게타와 달리 불명예스럽게 실직했고, 권력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포파이아 사비나는 이혼하자고 요구했고, 곧 새로운 남자 애인을 구해, 모든 것을 잃은 루프리우스를 압박했다. 결국, 두 사람은 곧 이혼하였다. 이후 포파이아는 자신보다 2살 어린, 당대 최고의 플레이보이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와 결혼했다. 두번째 남편 오토는 친누나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약혼녀였고, 조부와 부친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인 만큼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배경을 가지고 있어 이 재혼은 포파이아 사비나의 야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던 일화가 됐다.
그런데 오토와 함께 밤이슬을 맞으며 길거리를 돌아다닐 정도로 절친이었던 네로가 그녀를 사모하였고, 포파이아 사비나는 황제 네로의 청혼을 받아들여 불륜관계를 맺고 연인이 됐다. 두 사람은 대놓고 오토를 무시하고 밤마다 잠자리를 가졌다. 결국 58년, 네로는 오토와 포파이아 부부를 강제 이혼시키고 오토를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좌천시켰다. 그 후 네로는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포파이아를 새 황후로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가 이혼을 결사 반대했다. 옥타비아는 네로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중요한 존재였고[3], 아내를 대놓고 박대하는 네로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로는 포파이아와 대놓고 불륜을 맺으며 옥타비아를 압박했지만, 소 아그리피나는 며느리 편을 들며 아들과 대립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포파이아는 네로에게 소 아그리피나를 살해하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결국 네로는 59년 근위대를 파견해 어머니를 살해했다. 이후 62년 포파이아가 임신하자, 네로는 옥타비아가 불임이라는 이유로 이혼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뒤이어 옥타비아가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지른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캄파니아로 추방했다가, 옥타비아가 병에 걸렸을 때 치료받지 못하게 한 뒤 옥타비아가 불만을 표한 것을 이유로 삼아 판다테리아 섬으로 유배보냈다. 그리고 이혼 12일 만에 포파이아를 새 황후로 삼았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격노했다. 그들은 옥타비아의 초상화를 앞세우며 "당장 죄없는 황후를 복귀시켜라"라고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네로는 이에 겁을 먹고 옥타비아를 다시 데려와서 재혼하겠다고 약속했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하지만 네로는 옥타비아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그녀의 시종들을 잡아 참혹하게 고문하여 거짓 진술을 받아낸 뒤, 옥타비아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판다테리아 섬으로 처형인들을 보내 옥타비아를 죄인처럼 포박한 뒤 정맥을 잘라 뜨거운 증기 목욕탕에서 질식해 죽는 방식으로 죽였다. 이후 포파이아에게 선물을 주겠다며 옥타비아의 머리를 가져오게 한 다음 직접 확인했다.
당대 로마인들은 포파이아가 네로를 조종하여 소 아그리피나와 옥타비아를 죽게 하였다며 비난했고,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등 로마 역사가들은 그녀를 "무척 아름답지만 실로 냉혹하고 사치스러운 여성"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그녀를 다르게 묘사한다. 그는 로마로 끌려간 유대인 사제들을 변호하기 위해 포파이아를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포파이아는 유대인에게 심하게 굴지 말아달라며 남편을 설득했고 요세푸스에게 선물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예루살렘의 통치자였던 헤롯 아그리파 2세가 아그리파 신전을 가로막은 벽을 허물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포파이아는 유대인의 입장을 이해하여 벽을 허물라고 명령하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한편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폼페이가 상당한 자치권을 획득하도록 도왔다. 훗날 폼페이 유적지를 조사한 학자들은 그녀를 기리는 동상이 폼페이 곳곳에서 발견된 점을 볼 때 폼페이 주민들이 그녀를 고결한 여성으로 추앙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65년, 포파이아는 아기를 임신중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네로가 너무 많은 시간을 경주에 허비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포파이아가 간언하자, 네로가 격분하여 그녀의 복부를 발로 차는 바람에 산모와 아기 모두 죽여버렸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네로가 포파이아의 복부에 발길질을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소한 몸싸움'이었고, 포파이아는 시 낭송 및 경주 대회가 끝난 직후 사망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네로에게 독살당했다는 설을 소개하면서도, 네로는 후계자로 삼을 아들을 얻기를 갈망했기 때문에 임신한 아내를 독살했을 리 없다며 근거 없는 이야기로 단정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지만, 그것이 의도적인 일인지, 우연한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기술했다. 거기다 그녀 사후 네로가 슬퍼했다는 것을 보면 포파이아의 죽음은 네로와의 싸움이 원인이 아닐 가능성이 크며 네로의 발길질이 원인이 되었다한들 네로가 의도하고 죽인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네로는 그녀의 죽음을 무척 슬퍼하여 대대적인 장례식을 치렀고, 시신을 방부처리한 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했으며, 그녀와 딸 클라우디아 아우구스타를 신격화했다. 66년 스타틸리아 메살리나와 결혼했지만 수많은 정부와 남자 노예를 별도로 사귀었는데, 그 중 스포루스라는 노예가 포파이아와 닮은 외모였기 때문에 더욱 각별히 총애했다고 한다.[4]
포파이아 사비나가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는 오토의 의붓아들을 거쳐, 네로의 의붓아들이 됐다. 그는 황궁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계부 네로의 명령으로 낚시를 하던 중 사고사 형태로 살해됐다.
[1] 네로에게 살해됐다.[2] 서기 31년부터 약 10년여간 진행된 세야누스 일당 소탕 과정에서 올리우스처럼 직접 가담자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고 자살 강요형태로 처형된 이들은 거진 그 시신이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3] 원래 네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실제 혈통은 방계였고 반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는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후손이었다. 즉, 옥타비아가 아니었으면 네로는 황제 자리는 언감생심 꿈에서나 볼 만한 위치였다.[4] 당시 로마에서는 동성 결혼이 합법이 아니었음에도 스포루스와의 결혼을 강행했을 정도. 네로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고 그의 시신을 수습해준 이 역시 스포루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