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Decimus Valerius Asiaticus) |
출생 | 기원전 5년, 로마 제국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비엔나(오늘날의 프랑스 비엔느) |
사망 | 47년, 로마 제국 로마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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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이자 반역자. 로마 공화정, 제정 역사상 갈리아 출신의 첫 집정관으로, 두 번이나 집정관에 재임한 인물이다.소유한 루쿨루스의 정원을 노린 메살리나 황후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죽은 귀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금석문 해석 발달과 로마사 재연구 과정을 통해 칼리굴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황제를 시해한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을 배후에서 도운 반역 혐의가 드러나 죽임을 당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로마 유학 시절
성씨(노멘)는 로마 건국때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파트리키 발레리우스 가문 사람 같지만,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의 갈리아인이다. 뉴질랜드와 영국의 저명한 로마사 권위자 로버트 사임 교수가 1958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갈리아인 족장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는 프랑스 쪽 학계의 연구 결과도 비슷한데, 프랑스 학자들의 공통된 이야기에 따르면 아시아티쿠스는 기원전 80년 갈리아 총독을 맡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발레리우스 성씨와 플라쿠스라는 지파 성씨까지 받은 갈리아인 클리엔테스 후손이라고 한다.대개의 반역자처럼 부모 이름도, 형제 이름도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아시아티쿠스는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의 도시 비엔느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경력을 쌓기 위해 로마로 유학왔다고 한다. 이때 그는 갈리아 전역을 클리엔테스로 둔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 파견돼 국비유학 비슷한 방법으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아시아티쿠스는 일찍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이자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대 드루수스와 그 아내 소 안토니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운동 능력이 뛰어나고 레슬링 솜씨가 뛰어난데다 교양이 풍부하다고 평가받아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와 교류할 기회를 얻었고, 정기적으로 소 안토니아 자택에 초대받아 여러 토론을 하며 상류층과 교류하고 배우는 기회까지 얻었다고 한다.
2.2. 정치 경력
발레리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지만, 이름 미상의 부모가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의 총애를 받았다. 즉,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클리엔테스였다.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로마에 유학 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사저에서 유학생활을 했다.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드루수스, 안토니아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형제 모두와 '최고의 친구'가 됐다. 그리고 이런 환경과 인맥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아우구스투스 쪽과도 인연이 깊어졌다. 그 결과,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전폭적인 추천 아래, 속주 출신 갈리아계 로마인임에도 원로원 의원이 됐다.
이렇게 원로원에 입성한 뒤, 아시아티쿠스는 자연스레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쪽 인사가 됐다. 그렇지만 그는 티베리우스 쪽과도 사이가 괜찮았던 터라, 티베리우스 즉위 이후 첫 번째 집정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티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육들로 인정받은 대 드루수스 쪽을 따른 파벌 안에서도 상당한 중진급 인사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세야누스가 활개를 치는 동안의 시기와 티베리우스의 복수극이 활개를 친 시기 동안, 경력을 이어나갔다. 이때 그는 소 안토니아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측근 노릇을 했는지 몰라도, 세야누스의 음모에서 살아남은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칼리굴라가 즉위한 이후, 자신을 유학생활 내내 도와준 안토니아와 그 손자 칼리굴라의 후원 아래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이때 그가 얻은 부동산 중 가장 비싼 곳은 황제령 아이깁투스 내 알짜배기 노른자 땅이었다. 그는 칼리굴라에게 이를 개인영지로 선물받았다.
칼리굴라는 암살 전까지 아시아티쿠스를 신뢰해 그에게 은밀한 사생활 고민부터 정치, 행정 고민까지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2.3. 칼리굴라 암살과 클라우디우스 암살 미수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암살 동기가 의문인 것처럼, 아시아티쿠스가 칼리굴라 암살을 사주하고 후일 클라우디우스와 브리타니쿠스까지 제거해 아우구스투스 일가 전체를 기록말살형으로 단죄하려고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칼리굴라와 아시아티쿠스 모두를 증오한 세네카의 편향되고 불순한 주장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아시아티쿠스와 공개된 연회장에서 아시아티쿠스 아내와 간통을 저질렀다고 자백하고, 아시아티쿠스 앞에서 본인 침대에서 있던 은밀한 문제를 떠들며 아시아티쿠스를 연인처럼 여기며 불평했던 일이 칼리굴라와 서로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티쿠스는 칼리굴라가 암살되기 1시간 전인 41년 1월 24일, 황제의 친구 자격으로 황제 바로 옆에 앉도록 초대받았고 암살 직전까지도 칼리굴라가 아시아티쿠스를 아꼈다는 점, 칼리굴라와 아시아티쿠스 모두 양성애와 동성애를 혐오할 정도로 매우 보수적인 로마귀족적인 면모가 강한 점 등이 확실한 만큼 세네카의 주장을 신뢰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당장 세네카가 칼리굴라가 아시아티쿠스에게 "내가 남자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했다는 은밀한 발언을 알기는 커녕, 듣기도 어려운 일개 신참자 원로원 의원이자 반 황제파 신참자라는 것만 봐도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 물론 마이클 스완의 경우에는 칼리굴라 암살을 기획한 또 다른 설계자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와 아시아티쿠스가 반대의견을 내고 칼리굴라 직책을 가지고 서로 경쟁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확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학자들은 스완의 주장에도 합리적인 여러 증거를 이유로 아시아티쿠스가 카이레아를 조종한 범인이라고 말한다.
아시아티쿠스가 칼리굴라를 제거했다는 증거는 많다. 먼저 아시아티쿠스는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 부자의 클리엔테스인 카이레아와 친분이 있고, 일개 백인대장인 카이레아를 프라이토리아니 대대장과 근위대장에 추천한 인물로 카이레아, 루푸스, 사비누스 등 암살범 20명 남짓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더욱이 아시아티쿠스는 다른 황제 친구들과 달리, 칼리굴라의 모든 동선을 파악하고 있던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암살 1시간 전 황제 초대로 극장에 있던 다른 황제 친구들과 달리 카이레아와 연락을 취해 개최된 긴급 회의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더욱이 회의 내내 다른 황제 친구들과 달리 집정관의 황제 개인재산 가압류, 국고 몰수 조치에 반박하기는 커녕, 도리어 본인이 황제 친구라는 점을 내세워 후임자 선정 등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칼리굴라 암살 직전, 로마를 충격의 도가니로 만든 황제 암살범들의 신원이 불분명함에도 이상하리만큼 카이레아와 그 부하들을 감싸며 게르만족 호위대에게 혼란까지 주고, 칼리굴라가 암살됐다는 말에 흥분해 폭동 준비를 하기 위해 몰린 군중들 앞에서 담대하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반(反) 클라우디우스 움직임까지 조장했다. 이때 아시아티쿠스는 성난 민중들이 "누군가가 카이사르를 시해했다"며 몽둥이를 들고 암살범들과 원로원을 죽이겠다고 화를 내자, 대범하게 나가 "그건 내가 하고 싶었을 정도다"고 말하며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침묵하고 떠나라고 호통을 친 다음 원로원 회의를 재개케했다.
그럼에도 확실한 증거가 없어 아시아티쿠스는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칼리굴라의 유족 및 베스파시아누스를 위시한 칼리굴라의 부하들은 아시아티쿠스에게 증오감을 드러냈다.
2.4. 몰락과 최후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는 여러 장군들을 브리타니아로 보내면서 칼리굴라 암살 배후로 의심받고 있던 아시아티쿠스를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로 데리고 갔다. 이는 그를 로마군에게 황제의 친구로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질로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시아티쿠스는 브리타니아 전쟁에 참전 중인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롯한 옛 칼리굴라 측근들에게 감시받았고,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시켜 아시아티쿠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케했다. 이런 가운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연설 중 갈리아인들의 원로원 편입을 옹호하고 당연한 조치라고 밝히면서 아시아티쿠스를 익명의 이름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폄하하고 그 증오심을 표출했다. 이는 온화하고 많은 사족을 붙여 무례함을 드러내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평소의 언행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발언이었다.그 도적의 비열한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식민지가 로마 시민권의 완전한 혜택을 받기 전에 집정관 계급을 가문에 가져온 그 레슬링 신동이 싫소이다.
허나 클리우디우스는 이 발언 후 아시아티쿠스를 간접적으로 저격했을 뿐 더 이상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3년 뒤인, 서기 46년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생애 두번째 집정관 직에 올랐다. 이때 아시아티쿠스는 브리타니아 참전 경력과 칼리굴라 암살의 또 다른 배후이자 클라우디우스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킨 40년 집정관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1]를 몰락시킨 결정타를 날린 것을 인정받아 찬사도 받았다.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시대동안 직책을 이용해 쌓은 막대한 부를 이용해, 모든 로마귀족들이 소유하고 싶어한 루쿨루스의 정원을 매입해 이를 더 호화롭게 재개발하고 그 가치를 키웠다. 더욱이 그는 젊을 적부터 로마, 이탈리아, 갈리아, 이집트 일대에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이를 재개발해 더 큰 돈을 벌었다. 루그두눔, 게르마니아 일대에 땅을 사고 이를 기반으로 로마군에게 후원 등을 하면서 병사들의 호감을 샀다. 또 여러 인사들을 루쿨루스 정원에 초대해 지지를 받고 제 파벌을 각계에 두루 모아 더 큰 의심을 샀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시아티쿠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황제와 그 측근들을 폭발시켰다. 원로원 의원이 로마군에게 사사로운 감정없이 후원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이 부분은 옛 친구와 동료들까지 분노케 했다. 설상가상으로 탐욕스럽고 그 호화정원을 간절히 원한 메살리나 황후까지 여기에 개입하자 아시아티쿠스의 운명은 결정나고 만다.
서기 47년, 메살리나의 측근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친구이며 아시아티쿠스의 옛 벗인 황제파 원로원 핵심중진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가 아시아티쿠스와 포피이아를 간통죄로 공식 고발했다. 이때 브리타니쿠스의 가정교사인 또 다른 의원 소시비우스 역시 아시아티쿠스를 다른 혐의로 고발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수일리우스 루푸스와 소시비우스의 고발은 불순하고 선의를 가장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타키투스의 주장과 달리 명확한 증거를 토대로 내려진 고발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때 소시비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대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고발의 정당성을 밝혔다.
"또 다른 자, 즉 부호를 조심하십시오, 만만치 않은 힘으로 안락함을 위협하며 황제 일족을 노리고 있습니다. 아시아티쿠스야말로 가이우스 암살의 주범입니다! 그는 대담하게도 공공 집회에서 거리낌 없이 로마 시민에게 그것을 시인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나서서 이 무도한 행위를 뽐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 그는 수도에서 일약 유명해지고, 더군다나 속주들에게까지 명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는 게르마니아 군단 방문 계획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리아 비엔나 출신입니다. 그 지방의 유력한 연고자들이 그를 크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장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를 불러 증거물을 주고 그를 반란 진압 총책임자로 삼아 충분한 병력을 같이 보냈다. 따라서 바이아이에서 머물며 후일을 생각 중인 아시아티쿠스는 전속력으로 달려간 크리스피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체포돼 사슬에 묶여 로마로 끌려갔다.
체포 직후, 아시아티쿠스는 증거가 명확해 원로원에서 심리받을 원로원 특권이 박탈된 채 카이사르 가의 한 침실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때 메살리나도 여기에 동석했는데, 황제와 수사관들 곁에 있던 수일리우스는 여러 증거에도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발뺌을 하던 아시아티쿠스에게 그가 병사들을 타락시키고 온갖 흉악한 짓을 저지르며 뇌물과 방탕에 빠질 기회를 주며 무리를 모으고, 급기야 포피이아와 부정한 육체관계를 맺어 세를 모았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아시아티쿠스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수일리우스는 아시아티쿠스가 간통을 한 것을 넘어 동성애자라고 모함까지 하며 아시아티쿠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에 아시아티쿠스는 전형적인 로마귀족 사내다움을 조롱받았다고 생각해, 수일리우스에게 "네 자식들에게 물어보게나! 그들이 내가 남자임을 보증할 걸세!"라고 윽박지르고 본인을 변호했다.
이때 아시아티쿠스는 처절한 변호를 하면서 죽은 칼리굴라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 놓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크게 감동해 눈믈을 흘리고, 옆에 있던 메살리나조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허나 메살리나는 눈믈을 닦기 위해 방을 나가면서 모든 증거물을 모아 조사를 진행 중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피고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타키투스는 말한다.[2][3] 어쨌든 이 사건 심문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시아티쿠스를 무죄방면할 생각을 했고 이를 심문 조사관을 맡고 있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물었다. 이에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황제와 죽은 게르마니쿠스, 본인과 아시아티쿠스가 어릴 적부터 우정을 나누고 소 안토니아에게 헌신한 일 등을 회상하고 아시아티쿠스의 공적을 간추린 뒤 유죄 증거가 명확하고 너무 많아 그에게 친구로서 어떻게 최후를 맞이할 지 맡겨야 한다고 진언했다.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결정에 따라, 장례식 준비를 마친 다음 스스로 자신의 양쪽 팔목 정맥을 자르고 자결하는 방식으로 죽었다. 이에 관해 타키투스는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침착하고 냉정했다며 원로원의 정신을 보여줬다는 식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죽은 아시아티쿠스의 아내, 아들을 추방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막대한 재산을 상속하도록 했다. 그러나 메살리나는 이 결정에도 루쿨루스 정원만은 강탈해 손아귀에 넣었고, 3년 뒤에는 메살리나가 손에 넣지 못한 아시아티쿠스가 가진 로마, 이탈리아의 부동산은 모조리 국가가 집어 삼켰다.
3. 여담
아시아티쿠스는 현대 프랑스 일대에서 발굴된 리옹 비문에서 드러나듯,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부동산 투자와 재개발을 통한 재테크의 귀재였다.리옹 비문에 따르면, 아시아티쿠스는 비문 제작 당시 갈리아, 이집트, 이탈리아에 재산을 소유했는데 황제령 아이깁투스의 경우,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파이윰과 이집트 필라델피아에 기름진 영지와 여러 부동산을 특권 형태로 보유 중이었다. 더욱이 그는 첫 정규 집정관 경력을 쌓고 생애 두번째 집정관직을 역임한 서기 46년 이후 보유 부동산 일부를 팔고 이중 일부를 루쿨루스 정원을 매입해 재개발해 그 가치를 크게 키워 더 큰 부자가 되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도 부동산을 마련해 본인의 해방노예 중 한명까지 당대에 손 꼽히는 부호로 만들었다.
[1] 가이우스 안니우스 폴리오의 아들로 칼리굴라 암살을 결행한 카이레아, 루푸스, 사비누스의 건과 별개로 칼리굴라를 암살하고 아우구스투스 일족을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는 41년 당시, 공화정 복구를 선언하면서 노골적으로 칼리굴라의 모든 직책과 특권을 요구했다가 몰락했다.[2] 이는 메살리나가 마음 여린 남편이 혹여나 모든 증거를 폐기할까하여 한 조언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인데, 당시에는 메살리나의 악랄함을 부각시키는 소재가 됐다.[3] 여담으로 이때 간통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수감된 포피이아는 메살리나가 심어둔 이들에게 두려움을 느껴 자살했다고 한다. 물론 진짜 이유는 증거가 많아서였다고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