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03 00:45:09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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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 ignotus: 불명
  • incertus: 불확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가 계속 집권하였거나 아니면 불명의 다른 인물이 선출되었는지 불명확함
황제 겸 집정관 }}}
1년 1년 보결 2년 2년 보결 3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비니키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르쿠스 헤렌니우스 피켄스 푸블리우스 알페누스 바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발레리아누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3년 보결 4년 4년 보결 5년 5년 보결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섹스투스 아일리우스 카투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볼레수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포스투무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가이우스 클로디우스 리키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마그누스 가이우스 아테이우스 카피토
6년 6년 보결 7년 7년 보결 8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실라누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킬리우스 롱구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8년 보결 9년 9년 보결 10년 10년 보결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가이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마르쿠스 파피우스 무틸루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아울루스 비비우스 하비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퀸투스 포파이우스 세쿤두스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11년 11년 보결 12년 12년 보결 13년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실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가이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13년 보결 14년 15년 15년 보결 16년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센나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섹스투스 아풀레이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16년 보결 17년 17년 보결 18년 18년 보결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마르수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세이우스 투베로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그라이키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볼루세이우스 프로쿨루스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비네이우스 레굴루스
18년 보결 19년 19년 보결 20년 21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빕스타누스 갈루스 루키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막시무스 메살리누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1년 보결 22년 22년 보결 23년 23년 보결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그나이우스 트레멜리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가이우스 비비우스 루피누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가이우스 스테르티니우스 막시무스
24년 24년 보결 25년 25년 보결 26년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아비올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루키우스 비셀리우스 바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그리파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26년 보결 27년 27년 보결 28년 28년 보결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 가이우스 벨라이우스 투토르
29년 29년 보결 30년 30년 보결 31년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나이비우스 수르디누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루벨리우스 게미누스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
31년 보결 31년 보결 31년 보결 32년 32년 보결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섹스투스 테디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33년 33년 보결 34년 34년 보결 35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파울루스 파비우스 페르시쿠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라이나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티투스 루스티우스 눔미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노니아누스
35년 보결 36년 36년 보결 37년 37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섹스투스 파피니우스 알레니우스 가이우스 베티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케로니우스 프로쿨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플라우티우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
37년 보결 38년 38년 보결 39년 39년 보결
아울루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아퀼라 율리아누스 세르비우스 아시니우스 켈레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푸블리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칼푸르니우스 세라누스 섹스투스 노니우스 퀸크틸리아누스 루키우스 아프로니우스 카이시아누스
39년 보결 39년 보결 40년 40년 보결 41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ignotus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sine collega 퀸투스 테렌티우스 쿨레오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41년 보결 41년 보결 41년 보결 42년 42년 보결
퀸투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푸티우스 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
마르쿠스 세이우스 바라누스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42년 보결 43년 43년 보결 43년 보결 43년 보결
코르넬리우스 루푸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섹스투스 팔펠리우스 히스테르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세쿤두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세쿤두스 ignotus 스푸리우스 오피우스
44년 44년 보결 45년 45년 보결 45년 보결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파시에누스 크리스푸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 마르쿠스 비니키우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아울루스 안토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코르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46년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46년 보결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카메리누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퀸투스 술피키우스 카메리누스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툴리우스 게미누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47년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47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세다투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마르쿠스 호르데오니우스 플라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바겔리우스 가이우스 볼라센나 세베루스
48년 48년 보결 49년 49년 보결 50년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퀸투스 베라니우스 루키우스 맘미우스 폴리오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포플리콜라 메살라 빕스타누스 갈루스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롱구스 갈루스 퀸투스 알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수일리우스 네룰리누스
51년 51년 보결 51년 보결 52년 52년 보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디에누스 오르피투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베투스 카르미니우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퀸투스 마르키우스 바레아 소라누스
52년 보결 53년 53년 보결 53년 보결 54년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트레보니우스 푸블리우스 칼비시우스 루소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루키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살비아누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안토니누스 퀸투스 카이키나 프리무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마르켈루스
54년 보결 55년 55년 보결 55년 보결 55년 보결
마르쿠스 아이풀라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누메리우스 케스티우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마르쿠스 트레벨리우스 막시무스
ignotus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55년 보결 55년 보결 56년 56년 보결 56년 보결
푸블리우스 팔푸리우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이툴리쿠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 안나이아누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루푸스
티투스 쿠르틸리우스 만키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키피오 티투스 쿠티우스 킬투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프로쿨루스
56년 보결 57년 57년 보결 58년 58년 보결
루키우스 두비우스 아비투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아그리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트라세아 파이투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카이시우스 마르티알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58년 보결 59년 59년 보결 60년 60년 보결
아울루스 페트로니우스 루르코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아프리카누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아울루스 파코니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마닐리우스 보피스쿠스
61년 61년 보결 62년 62년 보결 62년 보결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 그나이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 푸블리우스 마리우스 퀸투스 만리우스 타르퀴티우스 사투르니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마룰루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루키우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루키우스 아피니우스 갈루스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63년 64년 64년 보결 65년 65년 보결
가이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리키니우스 네르바 실리아누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퀸투스 파비우스 바르바루스 안토니우스 마케르 마르쿠스 율리우스 베스티누스 아티쿠스 푸블리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65년 보결 66년 66년 보결 66년 보결 67년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피우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아프리누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루키우스 율리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아니키우스 케리알리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파키우스 아프리카누스 마르쿠스 베티우스 볼라누스 폰테이우스 카피토
67년 보결 67년 보결 68년 68년 보결 68년 보결
아피우스 안니우스 갈루스 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아스코니우스 실리우스 이탈리쿠스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베룰라누스 세베루스 푸블리우스 갈레리우스 트라칼루스 가이우스 루키우스 텔레시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
69년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세르비우스 갈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마르쿠스 오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그나이우스 아룰레누스 카일루스 사비누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티투스 비니우스 (루피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티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아울루스 마리우스 켈수스
69년 보결 69년 보결 69년 보결 70년 70년 보결
파비우스 발렌스 그나이우스 카이킬리우스 심플렉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아울루스 카이키나 알리에누스 로시우스 레굴루스 가이우스 퀸크티우스 아티쿠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70년 보결 70년 보결 71년 71년 보결 71년 보결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루키우스 안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ignotus 가이우스 라이카니우스 바수스 카이키나 파이투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그나이우스 페디우스 카스쿠스 가이우스 칼페타누스 란티우스 퀴리날리스 발레리우스 페스투스
71년 보결 71년 보결 72년 72년 보결 72년 보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바르바루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두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72년 보결 73년 73년 보결 73년 보결 73년 보결
섹스투스 마르키우스 프리스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오쿨라투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퀸투스 가비우스 아티쿠스 […]m[…] ignotus
74년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74년 보결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퀸투스 비비우스 크리스푸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ignotus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on[…]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74년 보결 74년 보결 75년 75년 보결 75년 보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만리우스 파트루이누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루키우스 파시디에누스 피르무스
76년 76년 보결 76년 보결 76년 보결 77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탐피우스 플라비아누스 갈레오 테티에누스 페트로니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실바누스 스타베리우스 플라비아누스 마르쿠스 풀비우스 길로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77년 보결 77년 보결 77년 보결 78년 78년 보결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폼페이우스 보피스쿠스 가이우스 아룬티우스 카텔리우스 켈레르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데키무스 유니우스 노비우스 프리스쿠스 (루푸스) 퀸투스 코렐리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룬티우스 아퀼라 ignotus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키우스 푸니술라누스 베토니아누스
78년 보결 78년 보결 79년 79년 보결 79년 보결
섹스투스 비툴라시우스 네포스 퀸투스 아르티쿨레이우스 파이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유니우스 카이센니우스 파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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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보결 80년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티투스 루브리우스 아일리우스 네포스 임페라토르 티투스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 파브리키우스 베이엔토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팍투메이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마리우스 마르켈루스 옥타비우스 푸블리우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아리우스 플라쿠스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라미아 플라우티우스 아일리아누스
80년 보결 80년 보결 80년 보결 81년 81년 보결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포스투무스 브라두아 섹스투스 네라니우스 카피토 마르쿠스 티티우스 프루기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노니우스 바수스 마르쿠스 로스키우스 코엘리우스
퀸투스 폼페이우스 트리오 루키우스 아킬리우스 스트라보 티투스 비니키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베루코수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유베날리스
81년 보결 81년 보결 81년 보결 82년 82년 보결
루키우스 베티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스코에디우스 나타 피나리우스 루키우스 카르미니우스 루시타니쿠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세르바이우스 In]noc(ens)
티투스 유니우스 몬타누스 티투스 테티에누스 세레누스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움브리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2년 보결 83년
[…]an(us) [가이우스 아리니우스 Mo]dest(us)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파트루니우스 마르쿠스 라르키우스 마그누스 폼페이우스 실로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 ignotus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퀴에투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
83년 보결 83년 보결 83년 보결 84년 84년 보결
마르쿠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테티우스 율리아누스 루키우스 칼벤티우스 섹스투스 카르미니우스 베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가이우스 피시우스 사비누스 테렌티우스 스트라보 에루키우스 호물루스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 가이우스 오피우스 사비누스 ignotus
84년 보결 84년 보결 85년 85년 보결 85년 보결
가이우스 툴리우스 카피토 폼포니아누스 플로티우스 피르무스 ignot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마르쿠스 아레키누스 클레멘스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리카누스 (마르쿠스 라이키우스 또는 푸블리우스 글리티우스) 갈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카툴루스 메살리누스 루키우스 바이비우스 호노라투스
85년 보결 85년 보결 85년 보결 86년 86년 보결
푸블리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데키무스 아부리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살비우스 리베랄리스 노니우스 바수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가이우스 세키우스 캄파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헤렌니우스 폴리오 퀸투스 율리우스 발부스 [코르넬리우스] 오레스테스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페트로니아누스
86년 보결 86년 보결 86년 보결 87년 87년 보결
incertus 섹스투스 옥타비우스 프론토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
퀸투스 비비우스 세쿤두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칸디두스 마리우스 켈수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티디우스 토시아누스 루키우스 야볼레누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87년 보결 87년 보결 88년 88년 보결 88년 보결
가이우스 벨리키우스 나탈리스 가비디우스 테바니아누스 가이우스 킬니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Ⅳ 데키무스 플로티우스 그리푸스 퀸투스 닌니우스 하스타
가이우스 두케니우스 프로쿨루스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루키우스 미니키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 보누스
88년 보결 89년 89년 보결 89년 보결 90년
마르쿠스 오타킬리우스 카툴루스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푸블리우스 살루스티우스 블라이수스 아울루스 비키리우스 프로쿨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Ⅴ
섹스투스 율리우스 스파르수스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아트라티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사이니아누스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90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푸시오 안니우스 메살라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아카이우스 루푸스 푸블리우스 바이비우스 이탈리쿠스 루키우스 알비우스 풀라이에누스 폴리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세르비아누스 가이우스 카리스타니우스 프론토 가이우스 아퀼리우스 프로쿨루스 그나이우스 피나리우스 아이밀리우스 키카트리쿨라 폼페이우스 롱기누스
90년 보결 91년 91년 보결 91년 보결 92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케리알리스 (또는 마르쿠스 투키우스 케리알리스)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데키무스 미니키우스 파우스티누스 퀸투스 발레리우스 베게투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Ⅵ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카툴리누스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마리누스 푸블리우스 메틸리우스 사비누스 네포스 퀸투스 볼루시우스 사투르니누스
92년 보결 92년 보결 92년 보결 93년 93년 보결
루키우스 베눌레이우스 몬타누스 아프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 아비투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실라누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콜레가 티투스 아비디우스 퀴에투스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 퀸투스 유니우스 아룰레누스 루스티쿠스 퀸투스 페두카이우스 프리스키누스 섹스투스 루시아누스 프로쿨루스
93년 보결 94년 94년 보결 94년 보결 95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라루스 섹스티우스 Na(so) 루키우스 노니우스 칼푸르니우스 토르콰투스 아스프레나스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울리누스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사투르니누스 루키우스 실리우스 데키아누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도미티아누스 아우구스투스 ⅩⅦ
[투키우스 Ceria]lis 티투스 섹스티우스 마기우스 라테라누스 가이우스 안티우스 아울루스 율리우스 콰드라투스 티투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
95년 보결 95년 보결 95년 보결 96년 96년 보결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마르켈루스 아울루스 부키우스 라피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폼포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만리우스 발렌스 퀸투스 파비우스 포스투미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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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카티우스 카이시우스 프론토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폴리나리스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icus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섹스투스 헤르멘티디우스 캄파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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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글리티우스 아틸리우스 아그리콜라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 임페라토르 네르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페르 쿠르비우스 툴루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루키우스 폼포니우스 마테르누스 마르쿠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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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Decimus Valerius Asiaticus)
출생 기원전 5년, 로마 제국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비엔나(오늘날의 프랑스 비엔느)
사망 47년, 로마 제국 로마
직위 원로원 의원, 집정관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과 로마 유학 시절2.2. 정치 경력2.3. 칼리굴라 암살과 클라우디우스 암살 미수2.4. 몰락과 최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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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이자 반역자. 로마 공화정, 제정 역사상 갈리아 출신의 첫 집정관으로, 두 번이나 집정관에 재임한 인물이다.

소유한 루쿨루스의 정원을 노린 메살리나 황후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죽은 귀족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금석문 해석 발달과 로마사 재연구 과정을 통해 칼리굴라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황제를 시해한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을 배후에서 도운 반역 혐의가 드러나 죽임을 당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로마 유학 시절

성씨(노멘)는 로마 건국때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파트리키 발레리우스 가문 사람 같지만,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의 갈리아인이다. 뉴질랜드영국의 저명한 로마사 권위자 로버트 사임 교수가 1958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갈리아인 족장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는 프랑스 쪽 학계의 연구 결과도 비슷한데, 프랑스 학자들의 공통된 이야기에 따르면 아시아티쿠스는 기원전 80년 갈리아 총독을 맡은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발레리우스 성씨와 플라쿠스라는 지파 성씨까지 받은 갈리아인 클리엔테스 후손이라고 한다.

대개의 반역자처럼 부모 이름도, 형제 이름도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아시아티쿠스는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의 도시 비엔느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경력을 쌓기 위해 로마로 유학왔다고 한다. 이때 그는 갈리아 전역을 클리엔테스로 둔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 파견돼 국비유학 비슷한 방법으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아시아티쿠스는 일찍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이자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대 드루수스와 그 아내 소 안토니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운동 능력이 뛰어나고 레슬링 솜씨가 뛰어난데다 교양이 풍부하다고 평가받아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형제와 교류할 기회를 얻었고, 정기적으로 소 안토니아 자택에 초대받아 여러 토론을 하며 상류층과 교류하고 배우는 기회까지 얻었다고 한다.

2.2. 정치 경력

발레리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지만, 이름 미상의 부모가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의 총애를 받았다. 즉,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클리엔테스였다.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로마에 유학 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 부부의 사저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드루수스, 안토니아의 두 아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형제 모두와 '최고의 친구'가 됐다. 그리고 이런 환경과 인맥 속에서 그는 자연스레 아우구스투스 쪽과도 인연이 깊어졌다. 그 결과,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전폭적인 추천 아래, 속주 출신 갈리아계 로마인임에도 원로원 의원이 됐다.

이렇게 원로원에 입성한 뒤, 아시아티쿠스는 자연스레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쪽 인사가 됐다. 그렇지만 그는 티베리우스 쪽과도 사이가 괜찮았던 터라, 티베리우스 즉위 이후 첫 번째 집정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티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육들로 인정받은 대 드루수스 쪽을 따른 파벌 안에서도 상당한 중진급 인사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세야누스가 활개를 치는 동안의 시기와 티베리우스의 복수극이 활개를 친 시기 동안, 경력을 이어나갔다. 이때 그는 소 안토니아와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측근 노릇을 했는지 몰라도, 세야누스의 음모에서 살아남은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칼리굴라가 즉위한 이후, 자신을 유학생활 내내 도와준 안토니아와 그 손자 칼리굴라의 후원 아래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이때 그가 얻은 부동산 중 가장 비싼 곳은 황제령 아이깁투스 내 알짜배기 노른자 땅이었다. 그는 칼리굴라에게 이를 개인영지로 선물받았다.

칼리굴라는 암살 전까지 아시아티쿠스를 신뢰해 그에게 은밀한 사생활 고민부터 정치, 행정 고민까지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2.3. 칼리굴라 암살과 클라우디우스 암살 미수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암살 동기가 의문인 것처럼, 아시아티쿠스가 칼리굴라 암살을 사주하고 후일 클라우디우스와 브리타니쿠스까지 제거해 아우구스투스 일가 전체를 기록말살형으로 단죄하려고 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칼리굴라와 아시아티쿠스 모두를 증오한 세네카의 편향되고 불순한 주장에 따르면, 칼리굴라가 아시아티쿠스와 공개된 연회장에서 아시아티쿠스 아내와 간통을 저질렀다고 자백하고, 아시아티쿠스 앞에서 본인 침대에서 있던 은밀한 문제를 떠들며 아시아티쿠스를 연인처럼 여기며 불평했던 일이 칼리굴라와 서로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아시아티쿠스는 칼리굴라가 암살되기 1시간 전인 41년 1월 24일, 황제의 친구 자격으로 황제 바로 옆에 앉도록 초대받았고 암살 직전까지도 칼리굴라가 아시아티쿠스를 아꼈다는 점, 칼리굴라와 아시아티쿠스 모두 양성애동성애를 혐오할 정도로 매우 보수적인 로마귀족적인 면모가 강한 점 등이 확실한 만큼 세네카의 주장을 신뢰하는 학자는 많지 않다. 당장 세네카가 칼리굴라가 아시아티쿠스에게 "내가 남자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했다는 은밀한 발언을 알기는 커녕, 듣기도 어려운 일개 신참자 원로원 의원이자 반 황제파 신참자라는 것만 봐도 신뢰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 물론 마이클 스완의 경우에는 칼리굴라 암살을 기획한 또 다른 설계자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와 아시아티쿠스가 반대의견을 내고 칼리굴라 직책을 가지고 서로 경쟁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확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학자들은 스완의 주장에도 합리적인 여러 증거를 이유로 아시아티쿠스가 카이레아를 조종한 범인이라고 말한다.

아시아티쿠스가 칼리굴라를 제거했다는 증거는 많다. 먼저 아시아티쿠스는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 부자의 클리엔테스인 카이레아와 친분이 있고, 일개 백인대장인 카이레아를 프라이토리아니 대대장과 근위대장에 추천한 인물로 카이레아, 루푸스, 사비누스 등 암살범 20명 남짓과 무척 가까운 사이였다. 더욱이 아시아티쿠스는 다른 황제 친구들과 달리, 칼리굴라의 모든 동선을 파악하고 있던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암살 1시간 전 황제 초대로 극장에 있던 다른 황제 친구들과 달리 카이레아와 연락을 취해 개최된 긴급 회의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더욱이 회의 내내 다른 황제 친구들과 달리 집정관의 황제 개인재산 가압류, 국고 몰수 조치에 반박하기는 커녕, 도리어 본인이 황제 친구라는 점을 내세워 후임자 선정 등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칼리굴라 암살 직전, 로마를 충격의 도가니로 만든 황제 암살범들의 신원이 불분명함에도 이상하리만큼 카이레아와 그 부하들을 감싸며 게르만족 호위대에게 혼란까지 주고, 칼리굴라가 암살됐다는 말에 흥분해 폭동 준비를 하기 위해 몰린 군중들 앞에서 담대하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반(反) 클라우디우스 움직임까지 조장했다. 이때 아시아티쿠스는 성난 민중들이 "누군가가 카이사르를 시해했다"며 몽둥이를 들고 암살범들과 원로원을 죽이겠다고 화를 내자, 대범하게 나가 "그건 내가 하고 싶었을 정도다"고 말하며 자기가 다 알아서 할테니 침묵하고 떠나라고 호통을 친 다음 원로원 회의를 재개케했다.

그럼에도 확실한 증거가 없어 아시아티쿠스는 처벌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칼리굴라의 유족 및 베스파시아누스를 위시한 칼리굴라의 부하들은 아시아티쿠스에게 증오감을 드러냈다.

2.4. 몰락과 최후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는 여러 장군들을 브리타니아로 보내면서 칼리굴라 암살 배후로 의심받고 있던 아시아티쿠스를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로 데리고 갔다. 이는 그를 로마군에게 황제의 친구로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질로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아시아티쿠스는 브리타니아 전쟁에 참전 중인 베스파시아누스를 비롯한 옛 칼리굴라 측근들에게 감시받았고,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시켜 아시아티쿠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케했다. 이런 가운데,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연설 중 갈리아인들의 원로원 편입을 옹호하고 당연한 조치라고 밝히면서 아시아티쿠스를 익명의 이름을 내세워 공개적으로 폄하하고 그 증오심을 표출했다. 이는 온화하고 많은 사족을 붙여 무례함을 드러내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평소의 언행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그 도적의 비열한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식민지가 로마 시민권의 완전한 혜택을 받기 전에 집정관 계급을 가문에 가져온 그 레슬링 신동이 싫소이다.

허나 클리우디우스는 이 발언 후 아시아티쿠스를 간접적으로 저격했을 뿐 더 이상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3년 뒤인, 서기 46년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는 생애 두번째 집정관 직에 올랐다. 이때 아시아티쿠스는 브리타니아 참전 경력과 칼리굴라 암살의 또 다른 배후이자 클라우디우스 즉위 직후 반란을 일으킨 40년 집정관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1]를 몰락시킨 결정타를 날린 것을 인정받아 찬사도 받았다.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시대동안 직책을 이용해 쌓은 막대한 부를 이용해, 모든 로마귀족들이 소유하고 싶어한 루쿨루스의 정원을 매입해 이를 더 호화롭게 재개발하고 그 가치를 키웠다. 더욱이 그는 젊을 적부터 로마, 이탈리아, 갈리아, 이집트 일대에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고 이를 재개발해 더 큰 돈을 벌었다. 루그두눔, 게르마니아 일대에 땅을 사고 이를 기반으로 로마군에게 후원 등을 하면서 병사들의 호감을 샀다. 또 여러 인사들을 루쿨루스 정원에 초대해 지지를 받고 제 파벌을 각계에 두루 모아 더 큰 의심을 샀다.

그런데 이런 행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시아티쿠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황제와 그 측근들을 폭발시켰다. 원로원 의원이 로마군에게 사사로운 감정없이 후원을 할 이유가 없었기에 이 부분은 옛 친구와 동료들까지 분노케 했다. 설상가상으로 탐욕스럽고 그 호화정원을 간절히 원한 메살리나 황후까지 여기에 개입하자 아시아티쿠스의 운명은 결정나고 만다.

서기 47년, 메살리나의 측근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친구이며 아시아티쿠스의 옛 벗인 황제파 원로원 핵심중진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가 아시아티쿠스와 포피이아를 간통죄로 공식 고발했다. 이때 브리타니쿠스의 가정교사인 또 다른 의원 소시비우스 역시 아시아티쿠스를 다른 혐의로 고발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수일리우스 루푸스와 소시비우스의 고발은 불순하고 선의를 가장했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타키투스의 주장과 달리 명확한 증거를 토대로 내려진 고발이었다고 단언한다. 이때 소시비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대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고발의 정당성을 밝혔다.
"또 다른 자, 즉 부호를 조심하십시오, 만만치 않은 힘으로 안락함을 위협하며 황제 일족을 노리고 있습니다. 아시아티쿠스야말로 가이우스 암살의 주범입니다! 그는 대담하게도 공공 집회에서 거리낌 없이 로마 시민에게 그것을 시인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나서서 이 무도한 행위를 뽐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 그는 수도에서 일약 유명해지고, 더군다나 속주들에게까지 명성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는 게르마니아 군단 방문 계획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리아 비엔나 출신입니다. 그 지방의 유력한 연고자들이 그를 크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장 루프리우스 크리스피누스를 불러 증거물을 주고 그를 반란 진압 총책임자로 삼아 충분한 병력을 같이 보냈다. 따라서 바이아이에서 머물며 후일을 생각 중인 아시아티쿠스는 전속력으로 달려간 크리스피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체포돼 사슬에 묶여 로마로 끌려갔다.

체포 직후, 아시아티쿠스는 증거가 명확해 원로원에서 심리받을 원로원 특권이 박탈된 채 카이사르 가의 한 침실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때 메살리나도 여기에 동석했는데, 황제와 수사관들 곁에 있던 수일리우스는 여러 증거에도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발뺌을 하던 아시아티쿠스에게 그가 병사들을 타락시키고 온갖 흉악한 짓을 저지르며 뇌물과 방탕에 빠질 기회를 주며 무리를 모으고, 급기야 포피이아와 부정한 육체관계를 맺어 세를 모았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아시아티쿠스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따라서 수일리우스는 아시아티쿠스가 간통을 한 것을 넘어 동성애자라고 모함까지 하며 아시아티쿠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에 아시아티쿠스는 전형적인 로마귀족 사내다움을 조롱받았다고 생각해, 수일리우스에게 "네 자식들에게 물어보게나! 그들이 내가 남자임을 보증할 걸세!"라고 윽박지르고 본인을 변호했다.

이때 아시아티쿠스는 처절한 변호를 하면서 죽은 칼리굴라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 놓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크게 감동해 눈믈을 흘리고, 옆에 있던 메살리나조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허나 메살리나는 눈믈을 닦기 위해 방을 나가면서 모든 증거물을 모아 조사를 진행 중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피고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타키투스는 말한다.[2][3] 어쨌든 이 사건 심문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아시아티쿠스를 무죄방면할 생각을 했고 이를 심문 조사관을 맡고 있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물었다. 이에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황제와 죽은 게르마니쿠스, 본인과 아시아티쿠스가 어릴 적부터 우정을 나누고 소 안토니아에게 헌신한 일 등을 회상하고 아시아티쿠스의 공적을 간추린 뒤 유죄 증거가 명확하고 너무 많아 그에게 친구로서 어떻게 최후를 맞이할 지 맡겨야 한다고 진언했다.

따라서 아시아티쿠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결정에 따라, 장례식 준비를 마친 다음 스스로 자신의 양쪽 팔목 정맥을 자르고 자결하는 방식으로 죽었다. 이에 관해 타키투스는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토록 침착하고 냉정했다며 원로원의 정신을 보여줬다는 식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는 죽은 아시아티쿠스의 아내, 아들을 추방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막대한 재산을 상속하도록 했다. 그러나 메살리나는 이 결정에도 루쿨루스 정원만은 강탈해 손아귀에 넣었고, 3년 뒤에는 메살리나가 손에 넣지 못한 아시아티쿠스가 가진 로마, 이탈리아의 부동산은 모조리 국가가 집어 삼켰다.

3. 여담

아시아티쿠스는 현대 프랑스 일대에서 발굴된 리옹 비문에서 드러나듯,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부동산 투자와 재개발을 통한 재테크의 귀재였다.

리옹 비문에 따르면, 아시아티쿠스는 비문 제작 당시 갈리아, 이집트, 이탈리아에 재산을 소유했는데 황제령 아이깁투스의 경우,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파이윰과 이집트 필라델피아에 기름진 영지와 여러 부동산을 특권 형태로 보유 중이었다. 더욱이 그는 첫 정규 집정관 경력을 쌓고 생애 두번째 집정관직을 역임한 서기 46년 이후 보유 부동산 일부를 팔고 이중 일부를 루쿨루스 정원을 매입해 재개발해 그 가치를 크게 키워 더 큰 부자가 되고,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도 부동산을 마련해 본인의 해방노예 중 한명까지 당대에 손 꼽히는 부호로 만들었다.


[1] 가이우스 안니우스 폴리오의 아들로 칼리굴라 암살을 결행한 카이레아, 루푸스, 사비누스의 건과 별개로 칼리굴라를 암살하고 아우구스투스 일족을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는 41년 당시, 공화정 복구를 선언하면서 노골적으로 칼리굴라의 모든 직책과 특권을 요구했다가 몰락했다.[2] 이는 메살리나가 마음 여린 남편이 혹여나 모든 증거를 폐기할까하여 한 조언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해석인데, 당시에는 메살리나의 악랄함을 부각시키는 소재가 됐다.[3] 여담으로 이때 간통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수감된 포피이아는 메살리나가 심어둔 이들에게 두려움을 느껴 자살했다고 한다. 물론 진짜 이유는 증거가 많아서였다고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