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 라틴어: Quintus Iunius Blaesus | |
생몰년도 | 미상 ~ 31년 |
출생지 | 로마 제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유니아 블라이사(누이)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매형) 세야누스(외조카)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아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아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손자)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10년 |
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
동기 |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 |
후임 |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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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노빌레스 씨족인 유니우스 가문의 방계 집안 출신으로, 그가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이름 있는 정치가를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20년경 누이 유니아 블라이사가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와 결혼했다. 블라이수스의 매형이 된 루키우스 세이우스 스트라보는 에트루리아의 에퀴테스였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이자 최측근인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에게 발탁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궁정과 가까워졌고, 나중엔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과 이집트 행정관에 선임되었다. 이렇게 스트라보가 승승장구하자, 블라이우스 역시 출세길에 올랐다.블라이수스는 서기 10년 7월, 세르비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말루기넨시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어 연말까지 직임을 수행했다. 이후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직후 판노니의 여름 숙영지에 모인 3개 다뉴브 군단(8군단 아우구스타, 9군단 히스파나, 15군단 아폴로나리스)의 사령관으로 재차 언급되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병사들이 급여, 복무 기간, 예비군 전역 조건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 끝에 티베리우스 황제의 사절을 죽이려 하자, 그는 그들 앞으로 나아가 "차라리 나를 죽여라. 황제의 사절을 죽이는 것보다 너희 지휘관을 죽이는 게 더 작은 범죄다. 내가 온전하고 무사하여 너희가 의무에 충실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죽어서 너희를 회개로 이끌 것인지 선택하라!"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의 요구를 무시했다.
그 후 블라이수스는 병사들을 설득해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요구 사항을 전하라고 했다. 군인들은 그의 밑에서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역임한 자식들을 사절단 대표로 선택했고, 반란은 일시젉으로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도로 공사를 마치고 진영으로 돌아온 2개 부대가 반란을 선동하면서 병사들이 재차 들고 일어났고, 약탈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블라이수스는 약탈자 몇 명을 체포하여 채찍질을 한 뒤 재판이 열릴 때까지 구금하게 했다. 그러자 군인들이 감옥에 난입하여 수감자들을 모두 풀어주고, 블라잉수스의 부하 몇 명을 잡아서 고문했다. 그 후 블라이수스의 외조카 세야누스가 지휘하는 프라이토니아니 대대 2개가 소 드루수스와 함께 진영에 도착하자, 반군은 그들을 숙영지에 들여보낸 뒤 출구를 봉쇄했다. 이후 블라이수스는 외조카와 함께 소 드루수스가 반란을 평정하는 걸 도왔다.
그 후 블라이수스는 수년간 레가투스로서 판노니아 속주를 다스렸다가 로마로 귀환했다. 20년,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이듬해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선임하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직접 후보를 정하라며 떠밀었다. 황제는 그들이 노예처럼 군다며 비난을 퍼붓고는, 서기 11년 집정관 마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블라이수스 중 한 명을 고르도록 했다. 레피두스는 발언권을 얻었지만 질병과 가족 상황을 이유로 거절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레피두스가 연설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블라이수스가 티베리우스의 심복인 세야누스의 외삼촌이므로 경쟁할 수 없다는 걸 암시한다고 여겼다고 한다. 또한 타키투스는 블라이수스가 총독을 사양하는 척했지만 끝까지 그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아프리카 총독이 된 그는 23년까지 직임을 수행했다.
블라이수스는 아프리카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로마군에서 탈영한 뒤 누미디아 도적단을 이끌고 10여년간 저항하던 무슬라미족 출신의 타크파리나스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서기 21년, 타크파리나스는 사절을 파견해 자신과 그의 부하들에게 영지를 주는 대가로 반란을 종식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로부터 이 제안을 보고받은 티베리우스는 타크파리나스가 협박하고 있다고 여기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들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블라잉수스는 타크파리나스의 기병대를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일으킨 뒤 사방에서 그들을 추격하도록 했다. 그는 적군이 무너질 때까지 겨울 숙영지로 군대를 철수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 결과, 블라이수스는 23년에 타크파리나스의 동생을 생포하고 타크파리나스의 군대를 거의 섬멸한 뒤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아직 타크파리나스가 잡히지 않았지만, 티베리우스는 블라이수스의 공적에 만족을 표하고 블라이수스의 군인들이 지휘관을 임페라토르라고 칭하는 걸 특별히 허락했으며, 개선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블라이수스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간 뒤, 타크파리나스는 또다시 로마를 적대하는 무리를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후임 아프리카 총독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국왕 프톨레마이오스와 힘을 합쳐 타크파리나스를 처단한 뒤, 원로원에 개선 훈장을 수여받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권고에 따라 거부했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는 세야누스가 자기 삼촌이 타크파리나스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개선 훈장을 받았는데, 돌라벨라가 또다시 같은 공적으로 개선 훈장을 받으면 삼촌의 영광이 훼손되는 걸 꺼렸고, 티베리우스를 설득해 돌라벨라의 공적을 없던 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티베리우스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후에 전쟁이 다시 불붙은 것에 대해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 후 외조카 세야누스가 승승장구하면서 블라이수스의 위상 역시 드높아졌으며, 포로 로마노에 눈처럼 하얀 토가를 입고 넓은 보라색 테두리를 두르고 월계관으로 장식된 그의 개선 동상이 새워졌다. 아들 퀸투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는 26년 보결 집정관, 또다른 아들 루키우스 유니우스 블라이수스는 28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장차 로마 사제단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서기 31년 10월 19일,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특명에 따른 원로원에 의해 체포된 뒤 몇 시간 후 처형되었다. 세야누스의 시체는 거리에 던져졌고, 수많은 동상들이 무너지고 박살났다. 그 후 세야누스의 친족 및 가까운 동료들에 대한 공개적인 사냥이 시작되었고, 블라이수스는 굴욕적인 죽음을 당하기 전에 자살했다.
그의 두 아들 퀸투스와 루키우스는 31년 세야누스가 몰락하고 아버지가 자살했을 당시에 해꼬지를 당하지 않았지만, 36년 자신들에게 약속되었던 고위 사제직이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자 신세를 비관하여 자살을 택했다. 그의 손자인 유니우스 블라이수스는 갈리아 루그두눔의 총독을 역임했지만, 69년 비텔리우스 황제가 그의 막대한 부를 탐낸 끝에 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