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09 15:29:11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


파일:Maecenas_Coole_Park.jpg
이름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
(Gaius Cilnius Maecenas)
출생 기원전 74년에서 기원전 70년 사이
로마 공화국 아렌티움(현재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아레초)
사망 기원전 8년
로마 제국 로마
배우자 테렌티아
지위 에퀴테스
직업 정치인, 문예 후원자, 시인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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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로마 제국의 정치인, 문예 후원자, 시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 역할을 맡았으며, 베르길리우스호라티우스를 후원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메세나의 어원이기도 하다.

2. 생애

로마 공화국에 복속된 에트루리아의 도시들 중 하나인 아렌티움(오늘날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아레초) 출신이다. 생일은 4월 13일로 전해지지만, 출생 연도는 기원전 74년에서 70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될 뿐 명확하지 않다. 그의 집안은 투스쿨룸에서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는 아렌티움을 통치한 왕실의 혈통을 물려받은 킬리니우스 가문 출신이라고 한다. 타키투스는 저서 <연대기>에서 그를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라고 지칭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에서 기원전 91년경에 막대한 부동산을 확보해 에퀴테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낸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라는 인물을 언급했다. 이 인물은 그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지만, 라틴어,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고 당대 최고의 시인, 예술가들과 원만하게 교류한 것을 봤을 때 로마 귀족 청년이 받는 것과 유사한 최고급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언제부터 옥타비아누스와 친분을 맺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함께 그리스 유학을 갔을 때 처음 만나서 친분을 맺었을 가능성이 높다. 옥타비아누스는 그와 아그리파 외에도 퀸투스 살비우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등 에트루리아 출신 젊은이들을 친구이자 조언자로 삼았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할 군단 숙영지에 장교로 복무하던 옥타비아누스는 그와 아그리파, 루푸스 등 소규모 수행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이후 기원전 44년 말에서 43년 초까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운 원로원파가 충돌한 무티나 내전과 기원전 42년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파의 대결이 벌어진 필리피 전투 때 옥타비아누스의 군영에 있었지만, 별다른 행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40년, 마이케나스는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지를 장악해 지중해 해상권을 지배하며 로마로의 곡물 운송을 저지하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설득해 옥타비아누스와 섹스투스의 측근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이복 누이 또는 딸인 스크리보니아를 옥타비아누스와 결혼시키게 해, 폼페이우스가 한동안 곡물 운송을 허용하게 해서 식량난으로 인한 민심 이반에 곤란을 겪고 있던 옥타비아누스가 소생할 길을 열었다. 또한 페루시아 내전에서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아내 풀비아가 패배해 세력을 잃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을 포위한 안토니우스를 찾아가서 평화 협상을 수행했다. 안토니우스는 초기엔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양측의 장병들이 서로 싸우기를 거부하자 마음을 돌려 평화 협상에 진지하게 임했다.

그 결과, 기원전 40년 10월 브룬디시움 협약이 체결되었다. 제2차 삼두정치가 5년 연장되었고,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동방 속주를 담당하고 옥타비아누스는 히스파니아에서 이릴리아까지의 서부 속주를 담당하기로 했다. 여기에 세번째 지도자인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속주를 받았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를 결혼시켜 양자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로 했다. 3년 후인 기원전 37년, 마이케나스는 시칠리아 내전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필요했던 옥타비아누스의 지시에 따라 타렌툼에서 안토니우스와 접견했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돕기 위해 130척의 함선을 보내기로 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 대가로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2만 로마 군단병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가 부재한 동안 로마 시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그는 단지 옥타비아누스의 비서일 뿐 별다른 직책을 맡지 않았다. 그럼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 시 관리에 대해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 의원 및 타인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이를 넘기기 전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그의 주요 역할은 반역자, 일탈자 및 폭도에 적절하게 대처해 정권에 대한 반대 세력의 출현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역할의 일환으로 로마에서 발생한 폭동을 단호히 진압했으며, 기원전 30년 삼두의 일원이었으나 실각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들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를 비운 틈을 타 옥타비아누스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적발해 처형하고 젊은 레피두스의 아내 세르빌리아를 압박해 석탄을 삼켜 자살하게 했다.

이렇듯 옥타비아누스의 곁에서 외교관, 조언가, 행정가, 치안관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한 그는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옥타비아누스에게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전리품 상당수를 챙기면서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를 토대로 에스퀼리노 언덕 부지를 사들인 뒤 거기에 웅장한 저택과 온수 수영장,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탑, 거대한 정원을 지었다. 그의 저택은 로마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손꼽혔고, 훗날 티베리우스 등 후대 황제 및 황족들이 그의 별장에서 휴양하곤 했다. 그 외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갖가지 특권을 챙기면서도 원로원에 들어가거나 행정관이 되려 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의 조언가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만족했다.

한편, 마이케나스는 문학과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당대의 다른 후원자들과는 달리 작가들의 작문 스타일을 제한하거나 특정 작품을 제작하도록 명령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명령은 안 했지만 아이아네이아스를 로마의 시조로 조작하거나 하는 등의 율리우스 왕조 용비어천가가 '자발적으로' 쏟아졌다 그의 후원은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평생 이어졌다. 가령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40년경에 그를 처음 만난 이래 기원전 19년에 사망할 때까지 마이케나스와 교류하면서 그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또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지지했다가 브루투스가 필리피 전투에서 패망한 뒤 곤궁한 삶을 살고 있던 시인 호라티우스를 복권시키고 그가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당대 문학, 예술가들은 조건을 붙이지 않고 막대한 후원을 지속적으로 해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그를 칭송하는 작품을 여러 편 발표했고, 후대에도 모범적인 후원자로 각광받았다.

마이케나스 본인도 산문과 운문 작품 여러 편을 집필했다고 알려졌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프로메테우스>, <심포지움>, <삶의 방식>, <옥타비아에 관하여> 등 약 20개의 단편 시 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라틴어를 서투르고 어색하게 구사한다며 조롱했고, 후대의 저술가 세네카, 마르쿠스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 등은 그의 문체가 이상하고 희귀한 단어를 사용하고 어색한 전치사를 구사하는 등 작품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며, "후원자로서는 일류였지만 스스로 작품을 짓는 건 삼류였다"는 조롱섞인 비평을 가했다. 다만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속기를 로마에 처음으로 도입했다고 한다.

마이케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으로서 제 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여성적이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지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거의 매일 연회를 베풀고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입장을 허용했으며 자신의 옷과 그가 제공하는 요리에서 "비 전통적인"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비단과 보석을 걸친 채 거리를 돌아다녔고, 연회에서 해방노예 바틸루스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검소를 미덕으로 여긴 지식인들은 이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마크로비우스는 그의 문학 스타일은 조잡하고 여성스럽고 느슨하며, 행실은 방탕했다고 비판했다. 세네카는 그가 항상 헐렁한 튜닉을 입고 도시를 돌아다니고 공개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그보다 더 남성적인" 내시 두 명을 옆에 뒀다며, "그의 아내는 하나 뿐이지만 실제로 천 번 결혼했다"고 비꼬았다. 하지만 민중은 그런 그를 무척 좋아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서커스나 극장에 참관했을 때마다 청중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로마 제국 수립 후 부귀영화를 누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신임을 돈독히 받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지만, 기원전 20년대 후반부터 주변인들과 불화를 벌였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아그리파가 아우구스투스에게 공화국을 온전하게 복원해야 한다고 진언하자 그는 이를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비웃고 군주제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검소한 생활 방식과 소탈한 태도를 항상 유지했던 아그리파는 그가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여성적으로 행동한다며 꺼렸고, 마이케나스는 일개 농부의 자식이었던 그가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자신보다 듬뿍 받는다고 여겨 질투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23년 여름, 아우구스투스의 외조카이자 소 옥타비아의 아들로서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21세의 나이로 열병에 시달린 끝에 요절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와 결혼했던 친딸 대 율리아티베리우스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때 마이케나스가 율리아를 아그리파와 결혼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명분은 일전에 그가 중병에 걸렸을 때 아그리파에게 인장 반지를 건네주며 후일을 맡겼다가 마르켈루스파 인사들이 반발하면서 황실이 분열될 위기에 놓였으니,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방지하고 그가 아끼는 아그리파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면서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정혼 후 연인 사이인 티베리우스가 대 율리아와 결혼한다면 종국적으로 아그리파가 정적이 될 것이며, 이는 리비아의 차남이며 아우구스투스가 양자 입적을 강하게 구상해 실행 중인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골육상쟁이 초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그가 권력욕이 강한 리비아 드루실라를 견제하고, 자신과 불화를 겪던 아그리파와 화해하고자 이런 제안을 했으리라 추정한다.

그의 제안은 일리가 있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그리파는 소 옥타비아의 큰딸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 생활 중이었고, 사이에 딸이 있었다. 그런 그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결혼한다면, 장차 소 옥타비아와 율리아 간의 갈등이 벌어질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누나가 자신의 양자로 정식입양될 대 드루수스를 사위로 맞이할 것이며, 드루수스가 입양 후 후계구도에 오르면 두 부부를 사돈으로 만들면 된다고 판단하고 마이케나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해 율리아를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 그 대신,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시켰고, 누나 소 옥타비아의 소원을 들어 누나가 친아들로 생각한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아그리파와 이혼한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시켰다.

기원전 22년, 파니우스 카이피오와 무레나가 아우구스투스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고발당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스트리키우스라는 인물이 무레나와 카이피오가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알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마이케나스 등 일부 측근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다. 마이케나스는 곧바로 아내 테렌티아에게 무레나와 카이피오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알렸고, 카이피오와 무레나는 계획이 들통났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도주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기밀을 누설한 마이케나스에 대한 총애를 거둬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수에토니우스의 설명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우며, 그의 기록 외에 마이케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잃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며 부정한다. 실제로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 ~ 21년 사이에 로마에 평배한 불안을 해결하는 문제를 놓고 마이케나스와 상담했다고 밝히는 등, 마이케나스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8년에 아우구스투스에게 전 재산을 양도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아내 테렌티아는 당대 최고의 무용수로,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양자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7년 아우구스투스가 히스파니아 속주와 갈리아를 순행했을 때 그녀를 동행시킨 일 때문에, 다수의 로마인들은 테렌티아를 아우구스투스의 애인으로 간주했다. 마이케나스 본인이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와 테렌티아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3. 기타

  • 살아생전 에트루리아 혈통이나 이 지방 출신 기사계급들도 많이 후원하고, 그들을 아우구스투스에게 추천해 여럿 프라이토리아니에 넣어주고 이들을 근위대장이나 대대장이 되는데 힘을 쏟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로마 역사상 최악의 간신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단명을 초래한 세야누스와 그의 아버지 세야누스 스트라보.

4. 대중매체

4.1. 드라마

4.1.1. ROME

시즌 2부터 출연, 여기에서는 어째 뒤에서 책략을 꾸미는 능글맞고 음흉한 책사 포지션으로 나온다. 첫 등장부터 지원군 사령관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를 모종의 방법으로 난전중에 암살하고 휘하 병력들을 흡수, 그 와중에 '슬프지만, 정말 운이 좋군~ 승리의 영광은 모두 우리 차지니까'라며 이죽대는건 덤(...) 친구이자 같은 위치의 최측근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군무쪽 몰빵에 우직한 스타일이라면 마이케나스는 비서실장 + 국정원장에 돈 많은 한량의 느낌.

4.2. 게임

4.2.1. 도미네이션즈

마이케나스의 히터가 유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