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루푸스 라틴어: Quintus Petillius Cerialis Cesius Ruf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제국 움브리아? |
사망지 |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지위 | 에퀴테스 |
국가 | 로마 제국 |
가족 | 페틸리우스 루푸스(아버지?) 카이시우스 나시카(형?) 소 도미틸라(아내)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아들) 플라비아 도미틸라(딸)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70년 |
전임 |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
동기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 |
후임 | 퀸투스 율리우스 코르디누스 가이우스 루틸리우스 갈리쿠스 불명 |
임기 | 74년 |
전임 | 루키우스 유니우스 퀸투스 비비우스 크리스푸스 티투스 |
동기 |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불명 […]on[…]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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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부디카의 난과 바타비아 반란 진압에 기여한 인물이다.2. 행적
많은 학자들은 그가 움브리아 출신의 에퀴테스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이름으로 볼 때 케리알리스 카이시우스 가문 출신이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페틸리우스에 입양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일각에서는 28년 게르마니쿠스의 친구를 고발했다고 전해지는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라는 설을 제기한다. 그러나 초기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서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60년 그의 형으로 추정되는 페틸리우스 루푸스의 뒤를 이어 9군단 히스파나의 레가투스로 부임해 롱소프와 뉴턴 온 트렌트에 주둔했다.61년 부디카의 난이 일어나자,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가 제14 게미나 군단을 이끌고 반란 주모자 부디카가 이끄는 이케니족을 토벌하러 출진한 동안 또다른 반군이 점거한 카물로두눔(현재 콜체스터)를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전투에서 패배해 전체 병력의 1/3을 잃고 갈리아로 피신했다. 이로 인해 해임되어 로마에서 불우하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69년 네 황제의 해가 한창일 때 베스파시아누스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비텔리우스 추종자들에게 체포되었다가 농민으로 변장해 가까스로 로마를 떠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합류한 뒤 기병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로마로 진군했다.
1,000명 가량의 기병을 이끌고 로마 시내에 진입한 그는 비텔리우스를 따르는 라인 군단병들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지만 적의 격렬한 저항에 시달리다 패퇴했고 기병 연대 지휘관 율리우스 플라비아누스가 생포되었다. 하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도나우 군단병들을 잘 이끌어 저항을 분쇄하고 다음날 로마를 점령했기에 그의 패배가 묻힐 수 있었다. 그 후 70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키빌리스가 일으킨 바타비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루푸스는 제8 아우구스타 군단, 제11 클라우디아 군단, 제13 게미나 군단, 제12 라팍스 군단, 그리고 최근 모집된 군단인 제2 아디우트릭스 군단을 이끌고 출발했다. 하지만 제8 군단은 이탈리아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만 이동하여 라인강의 전략적 교차점을 지켰고, 제11군단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전선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으며, 브리타니아에서 소환된 제14 제미나 군단은 히스파니아에서 소환된 제6 빅트릭스 군단과 제1 아디우트릭스 군단과 함께 갈리아를 방비했다. 따라서 키빌리스를 토벌하는 역할을 맡은 부대는 제2 아디우트릭스 군단, 제13 게미나 군단, 제21 라팍스 군단의 3개 군단이었다.
루푸스의 군대가 몰려오자, 키빌리스의 동맹자 중 한 명인 율리우스 투토르는 항복했고, 휘하 부대는 새 총독에게 귀순했다. 이후 3개 군단이 트레비란족의 수도인 트리어를 위협하자, 트레비란족은 리고두룸 마을 근처에서 맞섰으나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로마군은 트리어에 입성했다. 그는 여기서 보쿨라를 살해하는 데 관여했던 제1 게르마니카 군단과 제16 갈리카 군단병들을 만났다. 그는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로마 시민으로 받아줬다. 그러나 두 군단은 더 이상 신임받지 못했다. 제1 게르마니카 군단은 해산되었고, 제7 게르마니카 군단이 판노니아에 추가되었다. 제16 갈리카 군단은 제16 플라비아 피르마 군단으로 재구성되었다. 또한 루푸스는 트레비란족과 링고네스 족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반역을 저지른 자들만 처벌하고 나머지는 용서했다.
키빌리스와 율리우스 클라시쿠스는 반격에 나섰다. 그들은 6월 7/8일 야간에 트리어에 주둔한 로마군을 기습 공격했다. 한때 진영 안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했지만, 3개 로마 군단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이제 반군의 세력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에 국한되었다. 키빌리스는 어떻게든 활로를 뚫기 위해 휘하 함대를 이끌고 발 강과 라인강에서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러던 중 로마 함대의 기함을 탈취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야기했다. 로마군은 이를 굴욕으로 여기고 바타비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러나 이 무렵 폭우가 내리면서 강이 범람해 로마 함대가 막심한 피해를 입고 진영이 홍수에 휩쓸리는 등 큰 타격을 입자, 로마군은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던 70년 9월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키빌리스는 로마가 이제 모든 자원을 자신에게 쏟아부을 것임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루푸스는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고, 양자는 나발리아 강 위에 다리를 세우고 협의했다. 협상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바타비아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8개의 보조 기병 부대를 추가로 징집하며, 바타바아의 수도 네이메헌은 파괴되고 주민들은 2km 하류에서 무방비 상태로 도시를 재건해야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제10 게미나 군단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바타비아에 주둔하기로 했다.
봉기를 진압한 후 잉글랜드의 총독으로 부임해 요크를 기지로 삼고 칼레도니아인들의 침공에 맞서 3개 군단을 이끌고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총독 임기가 만료된 후 로마로 귀환한 뒤 74년 티투스 클로디우스 에프리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딸인 소 도미틸라와 결혼해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와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낳았다. 퀸투스 페틸리우스 루푸스는 83년 베스파시아누스의 차남 도미티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고, 딸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형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손자이며 95년 집정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러나 95년 남편과 함께 "유대인의 관습에 이끌려 무신론자( άθεότης)가 된"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 남편 클레멘스는 처형되었고, 그녀는 판다테리아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녀가 믿었던 종교는 사실 기독교였다고 하여 훗날 가톨릭과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시성되었다.